380화
모습을 드러낸 건 크기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광활한 대지였다.
아니, 정확히는 건물들이 솟아 있는 걸로 봐선 도시 같았다.
그 크기가 워낙 거대해 태양 빛을 완전히 가릴 정도, 스튜디오의 모든 이들이 할 말을 잃었다.
나갑수가 깊은 탄식을 뱉었다.
“……공중 도시인가?”
어릴 적, 만화에서나 보던 장관!
아무래도 페이트가 망해선 안 될 이유가 한 가지 더 늘어버린 것 같았다.
제작진을 포함한 시청자들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저기 삼촌 땅 나온다.”
“삼촌! 엄마, 나두 저기로 햄찌 보러 가면 안 돼?”
“어디 보자, 무이자 12개월로 지른다고 해도……. 차라리 진짜 햄스터를 키우는 게 어떨까, 지은아?”
TV 앞에서 뒹굴거리던 모녀. 이현서와 윤지은이 동시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우당탕탕!
처음에 땅이 흔들릴 땐 지원이가 또 무슨 사건을 벌였구나 싶었다.
하지만 햇빛에 가린 하늘이 어두워지고 공중 도시가 떠올랐을 땐 이현서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허리띠 조금 더 졸라맨다고 죽기야 하겠어? 지은아, 우리도 삼촌네 햄찌 보러 가자!”
페이트 밖에 있는 이들이 흥분할 정도였으니, 페이트에 접속한 플레이어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워낙 방대한 크기 덕에 공중 도시는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도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공중 도시?!”
“미친, 영화에서도 보기 힘든 스케일인데?”
“이러고 손가락만 빨고 있을 때가 아니지!”
일단, 가보자! 플레이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크세르니스 귀환 주문서를 찢었다.
공중 도시 인근에 크세르니스가 있기도 하고, 저런 공중 도시가 괜히 떠오르진 않았을 테니까.
백 퍼센트.
공중 도시는 플레이어 때문에 등장한 것이다. 하나, 페이트에서 저 정도의 공중 도시를 나타나게 만들 정도의 능력을 가진 이는 드물다.
아니, 전 세계에서 단 한 명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였다. 때문에 플레이어들과 전 세계는 기다리고 있었다.
“엑스, 스트리밍 예고 떴냐?!”
*
쿵쿵.
거목이 쿠룰라 주민들 몸에 태우고 바다를 가르기 시작했다.
쿠룰라 앞바다의 수심은 꽤 깊은 편이지만, 거목의 크기가 보통 커야지.
어느새 바다 한가운데에 들어왔건만, 바닷물은 겨우 고목의 무릎에 닿을락 말락 했다.
“좋아. 잘 키운 길동이가 열 거목 안 부럽군.”
엑스가 쿠룰라 지대를 찾은 이유는 간단했다. 쿠룰라의 주민들을 대피시키기 위해서였다.
상인을 설득하던 플레이어들처럼, 엑스도 쿠룰라가 다른 곳보다 상대적으로 좀 더 위험한 지역이라고 판단했다.
‘구름의 신도 모르는 구름이 평범할 리 없지.’
[구름의 신이 당신에게 속삭입니다!]
지상으로 내려오던 도중.
구름의 신이 다급하게 속삭여왔다. 불길한 먹구름이 월드의 사방에서 몰려들고 있다고.
페이트 월드의 일각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는 천계의 신들이다.
신들은 엑스보다 먼저 검은 비에 대한 소식을 입수하게 됐고, 그들의 걱정이 더욱 심화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신들은 월드에 간섭할 수 없었다.
[전쟁의 신이 당신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희생의 신이 모두의 안전을 위해 기도합니다!]
[광대의 신이 당신의 맹활약을 기대합니다!]…….
그런 신들이 의지할 건 엑스뿐!
플레이어는 물론이요, 신들까지. 쏟아지는 기대가 피부로 와닿을 정도다.
“후후.”
그럼에도 엑스는 태연하고도 음흉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막대한 기대에 완벽하게 보답하겠노라!
엑스는 자신감이 넘쳤다.
‘공중 도시라면 NPC들까진 전부 수용 가능해.’
가동을 시작한 공중 도시!
엑스는 양피지를 통해 자울에게 그 상세한 크기를 전달받았었다.
현재 크기만 해도 크세르니스에 뒤처지지 않을 정도.
게다가 곳곳에 세워진 건물들이 보통 건물들이 아니란다.
-아무래도 공간 왜곡 마법이 걸려있는 것 같네.
자울은 공중 도시 건물의 내부 공간이 겉보기보다 훨씬 넓다고 전해왔다.
평범한 가정집 한 채에 장정 수백 명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아르바 대륙, 동대륙, 단절 대륙까지. 가릴 것 없이 다 주민으로 받아들인다면…….’
NPC들만으로도 수억을 가뿐하게 돌파할 인구수!
‘딱, 한 달 치 세금만 받아도 이게 얼마야?!’
그들에게 거둬들일 세금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황홀한 기분이다.
하지만 그건 뒷날의 일이었다. 그것도 페이트가 무사히 서비스를 지속할 때나 꿈꿀 수 있는 일.
엑스의 눈빛이 평정을 되찾았다.
‘그 날을 위해서라도 삭제를 막아야겠지.’
게임 마스터 오피셜, 검은 비는 일종의 삭제 시스템이란다.
어쩔 수 없는 페이트의 서비스 종료를 막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많은 것들을 지켜내야 했다.
‘마음 같아선 도시를 통째로 옮기고 싶지만……. 마법진도 없고 지금 상황에선 현실적으론 불가능한 일이겠지.’
엑스가 별 관계도 없는 NPC들까지 지켜내려고 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NPC야말로 페이트 월드의 진정한 주인들이 아니던가?
파괴된 도시나 환경이야 다시 가꾸면 되지만, 그들이 사라진 페이트 월드는 상상할 수 없을 테니까.
불끈!
엑스가 주먹을 쥐었다.
“훗날, 엄청난 이득을 거머쥐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많은 NPC들을 지켜내겠노라!
당연하게도 엑스, 혼자만의 노력으론 불가능한 일이었다.
페이트 월드가 조그만 촌 동네도 아니고, 축지법을 사용해 달린다고 해도 하나의 몸뚱이로는 무리였다.
[스트리밍을 준비합니다.]
“수정 구체 앞에 서는 것도 간만이구나.”
그러니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플레이어들의 협조가 필요했다.
다시금 철면피를 쓸 시간이란 소리다. 이내, 엑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수정 구체를 응시했다.
[스트리밍이 시작됩니다!]
띠로링!
알림과 동시에 쏟아지는 시청자들. 엑스는 그들의 채팅을 확인하며 감정에 몰입했다.
순수하게 월드를 지켜내고 싶은,
영웅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현재 페이트 월드는 ‘검은 비’라는 대응할 수 없는 재앙에 마주쳤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대로 우리가 웃고, 싸우고, 즐기고, 먹어온 페이트 월드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ㅠㅠㅠㅠ맞아여
-전 페이트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음ㅠㅠㅠ
-안 그래도 메이지 상황 좋지 않은데, 삭제 시스템 못 막으면 그 핑계로 페이트 서비스 종료할지도 모름ㅠㅠㅠ
좋다.
찰나의 순간, 반응을 살핀 엑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검은 비가 모든 것을 삭제시킨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월드를 완벽하게 지키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판단했습니다. 내가,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것이라도 지켜보자고.”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것? 거기까지 얘기하자 알아차린 시청자들이 있었다.
-설마, 그래서 공중 도시를?
-미친, NPC 태우려고 공중 도시 준비한 거라고?!
-대체 몇 수를 내다본 거임?!?
동요하기 시작하는 시청자들!
하지만 그들은 갈등하고 있었다.
그래, 말은 참 좋게만 들렸다.
월드를 지키기 위해 힘을 모으자니, 이것만큼 게이머의 로망을 자극하는 것도 없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곧 현실적인 걱정들이 발목을 붙잡았다.
-검은 비가 우리한테 효과가 없는 것 같긴 해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ㄹㅇ 다젤이나 카이무스 같은 선례도 있고…….
-막말로 우리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NPC를 구할 필요가 있긴 한가?
이런 반응이야,
사실 서운할 것도 없었다.
‘사람이라면 당연한 반응이지.’
입장 바꿔서 생각해봤다.
만약, 자신이 시청자가 돼서 이런 소리를 들었다면…….
‘또 약 파네, 약쟁이 새끼.’
하고, 스트리머에게 한 차례 덕담이나 퍼부어줬을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선 감정에만 호소할 게 아니라 보상을 제시해야 했다.
플레이어들의 마음을 진심으로 움직일 수 있는 구체적이고 솔깃한 보상을!
“NPC들이 우리를 기억할 겁니다.”
-뭔 소리임? 뜬금없이?
“자신들을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은 우리들을, 페이트의 모든 NPC들이 기억할 겁니다. 전설 속의 대마법사, 대영웅, 정복왕처럼 계속해서 우리들의 일화가 역사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죠.”
신조차도 매료시켜버린 화술! 참고로 엑스는 입을 굉장히 잘 터는 편.
시청자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혹 한다?
-ㅋㅋ우리가 페이트의 새로운 전설이 되는 건가?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법ㅋㅋㅋㅋㅋㅋ
-ㄹㅇ 어차피 나는 별로 가진 것도 없는데 걍 이름이라도 남겨야지.
엑스의 뒤를 따르겠다!
술렁거림 속에서 결단을 내리는 시청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호의적인 채팅이 반, 여전히 갈피를 못 잡은 이들이 반이다.
물론, 엑스는 절반의 성공에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엑스가 은근하지만, 확실한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저, 윗분들도 NPC인 거 아시죠?”
윗분들?
누구를 말하는 건가.
그 의미를 잠시, 곱씹던 이들이 곧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니까 신들도 NPC잖아??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
천계의 신들이 전설 등급 아이템을 보상으로 준다는 건 공공연하게 알려진 정보였다.
보상을 쟁취한 이들은 말했었다. 신들의 마음은 위대한 선행을 베풀었을 때 움직였다고.
즉, 검은 비의 위협에 노출된 NPC들을 공중 도시로 인도하는 건, 신들에게서 막대한 점수를 딸 수 있는 절호의 찬스란 소리!
-엌ㅋㅋㅋ 지금 와서 말 바꾸는 게 졸렬하긴 하지만 나도 참가해야지!ㅋㅋㅋ
-이성적으로 생각해봤는데, 이게 피조물이랑 싸우는 것보다 훨씬 덜 위험함ㅋㅋㅋ
-점수 따러 가즈아!!!
5억에 가까운 시청자들이 참여한 채팅방. 그들, 각자의 의견이 하나로 모아지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대사건.
“엑스, 감격의 호소로 전 세계를 움직이다! 헤드라인부터 기가 막히네.”
누군가에겐 둘도 없는 기삿거리가 됐고.
“엄마! 낼 애들한테 삼촌 자랑해도 돼?!”
누군가에겐 자랑거리가.
“자네는 정말이지……!”
또 비행선에서 지켜보던 누군가에겐 덧없는 소원이 이뤄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엑스에게만큼은 그저 첫걸음에 불과했다. 해피엔딩으로 가는 첫걸음 말이다.
[스트리밍을 종료합니다.]
“와, 손가락 말려 들어가는 줄.”
철면피를 뒤집어썼는데도 낯이 간지럽다. 엑스가 담백한 소감을 뱉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네.”
시청자들을 사기극, 아니, 설득한 건 몸풀기에 불과했다.
이제부터가 본 게임의 연속이다.
본 게임이란 건 당연하게도 하얀 가면, 다른 존재와의 전투를 말한다.
엑스는 가만히 전황을 그렸다.
‘검은 비가 새롭게 등장한 이상…….’
NPC 비율이 유달리 많은 엑스의 원정군에는 차질이 생길 확률이 높았다.
시오라스와 리그리앙을 중심으로 짰던 계획들은 물론, 용용이나 호크라를 활용한 게릴라도 자유롭게 쓸 순 없었다.
주섬주섬.
엑스가 인벤토리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끝내주는 효과로 줘 봐요, 좀.”
식기를 꺼냈다.
바쁘게 움직인 탓에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던 5성 천상의 요리, 그 효과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엑스는 천상의 요리를 사용하기 직전까지 투덜거렸다.
“누구는 그쪽 소원 이뤄주려고 개고생인데……?”
하지만 이내, 조잘대던 입이 저절로 다물어졌다.
그뿐이겠는가?
우당탕! 엑스는 너무나도 놀라 들고 있던 국자를 내팽개치기까지 했다.
토끼 눈이 된 엑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가, 갑자기 뭐야 당신?!”
혼자 다 해 먹는 먼치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