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7화
블라썸은 머리를 붙잡았다.
“어째서……?”
페이트 월드라 불리는 이곳은 거짓된 세계였다. 진짜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허상만이 가득한 꿈의 공간.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의심이 들곤 했다.
시작은 요상한 인형부터였다.
-당신과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미식왕이라고 했었나?
그 인형은 다른 인형들과 달랐다. 정해진 대로 행동하지 않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 인형과 마주칠 때마다 머리가 아팠다. 호기심보단 두려움이 앞섰기에 의도적으로 그를 피해 다녔었다.
-이번 생이 안 된다면 다음 생에라도…….
뜻 모를 말.
지끈거리는 두통 뒤, 새롭게 꾸는 꿈속에서도 그 인형은 사라지지 않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저러는 걸까? 호기심이 두려움을 점차 억누르던 때였다.
-미친, 실화냐?!
-그래픽 보소. 진짜 역대급이네, 이거.
-……나가자마자 메이지 주식 풀매수 한다.
‘플레이어’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거짓된 세계에 나타난 ‘진짜’들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매순간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갔다.
블라썸은 플레이어들을 볼 때마다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하고 불안했다.
-나, 로그아웃한다. 내일 일찍 출근해야 돼.
그리고 깨달았다.
그들에겐 거짓된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 사실을 알게 되자 머리는 더욱 복잡해졌다.
블라썸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누구지?
기억나는 게 없어 대답은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미식왕이 떠올랐다.
불현듯, 그라면 뭔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 불편한 감정을 누구에게라도 토해내고 싶었다.
약속했던 장소를 찾았지만, 그는 없었다. 대신 뭐가 좋은 건지, 반갑게 꼬리를 흔드는 생물 하나가 있었다.
-뀨? 사람이다뀨!
사람.
블라썸은 붉고 통통한 생물의 말을 되새겨봤다.
-……내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람은 태어나고 죽는다.
하지만 블라썸에겐 태어났던 기억도, 죽음을 경험했던 기억도 없었다.
꿈속, 모든 게 변해도 그녀는 그대로였다.
그 생물은 대답했었다.
-흐음, 주인이랑 똑같은 걸 보면 사람이 맞다뀨!
저 황금빛 눈동자에 나는 그렇게 비치고 있는 걸까?
블라썸은 이 아이의 주인이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그가 인형인지, 플레이어인지에 따라 자신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블라썸은 마주할 수 있었다.
-진짜 오랜만이네.
은빛 호수를 찾아온 플레이어, 엑스를.
숨어서 지켜본 엑스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엑스는 거짓이 가득한 페이트 월드에서 누구보다 진지했다.
어떻게 보면 가장 쓸데없는 짓을 많이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쓸데없는 행동들이.
-페이트 월드를 지켜내겠습니다!
블라썸의 머리를 부서질 듯 저리게 만들었다. 떨리는 입술 사이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엇을 위해서……?”
엑스로도 모자라 이젠 모든 플레이어들이 영문 모를 행동에 매달리고 있다.
블라썸은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두통이 심했지만 그들을 지켜봐야만 이유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얌전하게 섭종시켜 줄 것 같냐!
-갈 데까지 가보자, 자식들아!
-이쪽도 이판사판이다!
시끄러운 고함 소리 속에서,
가슴에 와닿는 단어가 있었다.
-‘블라썸’을 구해내자!
블라썸(Blossom).
듣는 순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들었다.
잊고 있던 기억의 파편 하나가 떠올랐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의 촉감.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얼굴. 귓가에 아른거리는 그리운 목소리.
-우리 딸은 웃는 게 활짝 핀 꽃처럼 예쁘니까…….
그래, ‘블라썸’이 좋겠다.
“……!”
블라썸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그녀의 심장이 쿵쿵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그 기억을 시작으로 잊고 있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벅찬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 내 이름은……. 나는…….”
자신과의 싸움이 종반부로 향해가던 도중, 그녀에게 접근하는 그림자가 있었다.
“여기에 계셨군요. 한참을 찾았습니다.”
그 목소리는 더없이 기괴하고, 음산하며, 어째서인지 환희에 찬 듯했다.
“우둔하고 불쌍한 우리들의 아버지이자, 어머니이자, 창조주시여.”
하얀 가면이었다.
*
추풍낙엽.
엑스와 용용이 앞에서 오염된 피조물들은 맥을 추지 못했다.
오염된 피조물 군단이 앞길을 가로막는다고 해도, 용용이의 브레스 한 방이면 만사 해결.
“지랄 났군. 저런 성벽을 무슨 수로 뚫지?”
촉수 위에 촉수.
몇 겹으로 방벽을 구축한 성벽이나 성문도 걸림돌이 될 순 없었다.
엑스가 곧바로 5성 천상의 요리 효과를 발동시켰다.
띠로링!
미식왕과의 동화를 알리는 알림.
엑스는 군소리를 잊지 않았다.
“멋있는 거는 자기 혼자만 쓸 생각이었네.”
어느새 엑스는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 활이 보통이 아니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빛의 활!
외관은 성직자들의 밥줄 스킬인 홀리 에로우와 비슷했지만, 그 크기가 비교를 불가했다.
차원의 순교자 (Master) : 소규모 월드 단위의 빛이 응축된 화살을 발사합니다. 위력은 최대 마나와 지능에 비례해 상승하며 사용자의 신성력에 따라 부가적인 효과가 발생합니다.
(마나 소모량 : 최대 마나의 10퍼센트)
기술명은 물론이요.
효과에 설명까지 보통이 아니다.
엑스는 치사하단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진작 가르쳐 주면 좀 좋아? 아껴봤자 뭘 하겠다고.”
팅!
함락된 성을 정조준.
엑스가 활시위를 놓기 무섭게 뻗어져 나간 화살이 성벽에 적중했다.
그와 동시에 찬란한 빛이 성, 전체를 휘감기 시작했다. 변화를 알아챈 이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ㅋㅋㅋㅋ말이 됨???
-ㅁㅊ당연히 안 되지.
-엑스 님, 천계에서 대체 뭘 하고 오신 거임?
-진짜 신이라도 되신 건가요?!
위력을 떠나서 듣도 보도 못한 마법이다.
리그리앙은 물론, 대현자 시오라스도 처음 보는 마법 폭격에 쉽게 정신을 붙잡지 못했다.
“참 나, 너 진짜 어이없는 거 알지?”
아수스가 엑스를 흘겨봤다.
나름대로 서로 볼 거, 못 볼 거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된 게 밑천이 훤히 드러난 자신과 달리 엑스는 숨겨둔 패가 한두 개가 아닌 듯하다.
“내 속을 네가 어떻게 알겠냐.”
그러나 엑스는 속으로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5성 천상의 요리에는 대가가 있었다.
모든 비기는 일회용으로, 일단 사용해버리면 두 번 다시는 사용할 수 없다는 것!
다시금 똑같은 레시피로 천상의 요리를 만들어 먹는다고 해도 소용은 없었다.
[치명적인 일격!]
[성스러운 빛이 ‘오염된 피조물’을 태웁니다!]
[치명적인 일격!]
[오염된 피조물에게 화상 효과가 발생합니다!]
“손이 허전하구나.”
쥐었다, 폈다.
이제 차원의 순교자는 두 번 다시 사용할 수 없었다.
아쉬움도 잠시, 엑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차피 지금은 당장 페이트가 서비스 종료돼도 이상하지 않던 상황이 아니던가?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였다.
“전부 써봐야 여한이 없겠지?”
모든 미식왕의 비기를 사용해 보겠노라! 그것은 맞닥뜨릴 피조물들이 불쌍해질 정도의 결심.
그러기 위해선 지금부터 부지런하게 비기만 난사해도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았다.
절레절레.
엑스가 고개를 저었다.
“남들은 하나 남기기도 힘든 비기를 무슨…….”
수십 번의 세계관 리셋. 그간 미식왕의 창조한 레시피가 한 두 개가 아니었으니까!
*
아르바 대륙 동부.
파죽지세는 힘겨운 전투를 이어가고 있었다.
“폭군의 주먹!”
송월은 전장 한복판에서 종횡무진, 맹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오염된 피조물들이 줄기는커녕 그 개체 수가 눈에 띄게 늘어가고 있었다.
푹-!
피조물의 몸통을 꿰뚫는 창 끝.
기절 상태에 빠진 피조물을 찌르기로 마무리한 빡빡머리 간부가 소식을 전해왔다.
“엑스 쪽은 이미 루얀 코앞까지 도달한 모양입니다!”
“역시 거침이 없군. 그 자식은.”
중앙 화산 부근에서 출발해 벌써 루얀이 코앞이라니! 가는 길에 거쳐 가는 대도시만 해도 다섯 개 넘을 터.
말도 안 되는 진격 속도였다.
송월이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미안하지만, 우리가 발목을 잡게 생겼는데?”
파죽지세는 고전 중이었다.
도시를 탈환하기는커녕 오히려 밀려내고 있었다. 비단 파죽지세뿐만이 아니었다.
오염된 피조물들의 비정상적인 강함과 물량을 플레이어들이 감당하긴 역부족이었다.
“주민들을 최우선으로 대피시켜!”
“발밑을 유심히 살펴. 주민으로 위장한 놈이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거기에다 플레이어들은 NPC들을 대피시키는 데도 신경을 쏟아야 했다.
어떻게 봐도 엑스가 이끄는 크세르니스 연합군이 이상한 것이었다.
송월은 냉철하게 전황을 살폈다.
‘사실, 진작 전멸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건 오로지 플레이어들 덕분이었다.
“파죽지세고 자시고, 일단 막아야지!”
“덤벼라, 새끼들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페이트를 후회 없이 즐기겠다!
플레이어들은 죽을 각오로 전장에 뛰어들었다.
그들의 지원이 없었다면 파죽지세는 진작 전멸을 면치 못했으리라.
송월은 마음을 다잡았다.
여전히 승산은 보이지 않는다.
패배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송월은 자신의 패배가 두렵지 않았다.
개인은 약하지만,
집단은 강하니까.
“내가 쓰러진다고 해도.”
꾸욱-!
주먹을 다잡았다.
“우리가 패배하는 건 아니다!”
뒤엔 또 다른 거대 길드, 플레이어들이 있었고, 최후엔 누구보다 믿음직스런 엑스가 있었으니까.
“철퇴!”
퍽-!
복잡한 생각은 그만뒀다.
송월은 그저 눈앞에 벌어지는 전투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문득, 송월의 움직임이 멈췄다.
[치명적인 일격!]
[당신에게 출혈 효과가 발생했습니다!]
“……빌어먹게 끈질기군.”
바닥에 퍼진 피조물이 치명타를 날려 왔다.
성군의 주먹으로도 상쇄할 수 없는 궤적이었다.
이 정도의 피해를 입어보는 건 아마 엑스와 싸운 이후 처음인 것 같았다.
도움이나 지원은 없었다.
“젠장, 대장!!”
울부짖는 소리를 보니 다들 여유가 없는 모양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꽤 선전했다.
“어디 가서 쪽팔리진 않겠군.”
송월은 하늘을 바라봤다.
사망페널티를 생각해보면, 지금 보게 되는 게 페이트의 마지막 모습이 될 확률이 높았다.
언제나 피와 사냥터, 전장을 떠나지 않고 살아왔으니까. 마지막은 조금 다른 풍경을, 기억에 남기고 싶었다.
“……!”
그런데, 자신은 여유를 즐길 팔자가 아닌 모양이다.
슈우우웅-!
하늘을 뒤덮는 거대한 날개가 보였다.
고고하다.
그들의 비행은 너무나도 찬란하면서 동시에 두려움에 몸을 떨게 만들었다.
동시에 엑스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들게 만들었다.
“엑스, 너는 어떻게 저런 것들과……!”
날개의 주인은 전설의 드래곤!
그들이 다가 아니었다. 드래곤들의 등 위엔 아르바 대륙에선 보기 힘든 얼굴들이 있었다.
반인반수, 드워프, 흑요정, 엘프, 거인, 정령들까지!
“내 평생 아르바 대륙을 밟게 될 날이 올 줄이야. 뒤늦게나마 조상님들의 넋을 기릴 수 있겠군.”
“그나저나 엑스는 어디에 있나? 새로운 장비를 건네줘야 하는데…….”
“크하하, 우릴 위한 전장이 가득하군!”
단절 대륙의 지원군들이 아르바 대륙에 도착한 순간이었다.
혼자 다 해 먹는 먼치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