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하아, 하아-!”
마하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불타오르는 윈드시크릿의 성벽 위에 힘겹게 서 있었다.
그가 다스리던 성, 윈드시크릿은 공격받고 있었다. 성벽 대부분은 공성 병기와 마법에 의해 무너져 있었고 지금 마하임이 서 있는 중앙 성채도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와라, 이 빌어먹을 제국의 번견들아!”
어김없이 다시 몰려온 대륙 연합의 병사들을 향해 마하임은 소리쳤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회백색 털로 뒤덮인 늑대, 아니 그것은 평범한 늑대조차 아니었다. 적어도 얼굴을 제외한 모든 부분은 사람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으니까.
그렇다. 저것들은 대륙 연합의 마도병, 바로 워울프라 불리는 늑대 인간이었던 것이다.
“아우우우우!”
“닥쳐!”
서걱
마하임의 검이 번뜩일 때마다 녀석들의 몸뚱아리가 절단됐다.
이미 사용할 수 있는 마나를 완전히 소진한 상태인지라 그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한 자루의 검뿐이었다.
“아직! 아직 끝나지 않았다!”
검을 갈무리하며 마하임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크르릉, 크와왕!”
“크에에 크아아앙!”
이미 퇴로 같은 것은 없었다.
동맹군들은 이미 와해된 지 오래고, 보이는 것이라고는 성벽 아래서 기어 올라오는 워울프들뿐이다.
사방에서 몰려오는 녀석들의 수는 이제 세 자리 수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큭…. 정말 끝이 없구나!”
마하임의 온몸이 천근같이 무거웠다. 벌써 그는 3일째 단 한 시간도 자지 못하고 검을 휘두르고 있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제길! 제기랄!”
마하임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사방에서 무한정으로 몰아닥치는 저 워울프를 모두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크르르르, 크아앙!”
마하임이 잠시 움찔하는 사이, 그를 포위하고 있던 워울프 10마리가 단숨에 마하임을 덮쳤다.
마하임은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지만, 이미 지칠 대로 지쳐 한계를 몇 번이고 넘나든 그인지라 자신을 향해 몰아닥치는 저 워울프들을 모두 막아 낼 수는 없었다.
“커억!”
마하임은 신음을 터트렸다. 그의 얼굴은 바닥에 처박혔고 워울프들은 마하임의 양팔과 양다리, 그리고 허리와 머리를 각각 움켜쥐고선 마하임의 움직임을 완벽히 봉쇄했다.
“이거 놔! 놔란 말이다!!!”
마하임은 미친 듯 발버둥 치며 소리 질렀다. 그러나 워울프들은 마하임을 짓누른 채 역한 공기를 뿜어낼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고오오오오오오-!
바로 그때 귀가 먹먹해질 것 같은 굉음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다.
워울프조차도 소리에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이 소리는 크고 자극적이었다. 그리고 그 소리가 조금 잠잠해질 무렵, 하늘에서는 거대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제의 비공정인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마하임은 중얼거렸다.
고대 마도 과학의 결정체. 제국이 만들어 낸 창공의 거성. 그 크기는 웬만한 범선보다 더 거대했다.
저 비공정이 나타났다는 것은 이 윈드시크릿의 운명도 다른 아르케비니아의 성들처럼 그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뜻했다.
“크하하하! 그래, 높은 곳에서 보니 어떤가, 제국의 황제여! 수백, 아니 수천만 명을 학살한 소감이 대체 어떤지 듣고 싶구나!”
마하임은 광소했다. 한없이 허무하고 한없이 허탈했다. 어차피 이렇게 될 것을 왜 그렇게 발버둥 쳤을까?
그는 거센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절망감에 웃고 또 웃을 뿐이었다.
슈욱, 슈우우우 크르르르르.
비공정은 허공에서 한 번 선회한 후,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득히 보이는 불타는 성벽 위에서 희미한 사람의 형태가 나타났다.
그것들은 마치 물 위에 비친 그림자처럼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게다가 주변의 사물과 거의 같은 색으로 위장되어 있어 얼핏 보기에는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마하임은 저것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륜, 네 이놈!!”
마하임의 말에 반응이라도 하듯이 그 흐릿한 잔상 중 하나가 모습을 갖춰 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하임 자신보다는 조금 작은 키의 새하얀 코트를 입은 남성이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는 언제나처럼 기괴한 형태의 금속 잿빛 가면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마하임 왕자, 아니 폐하.”
“크아아아!”
마하임은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어 워울프들을 뿌리쳤다. 그리고 단숨에 하륜에게 달려가 검을 휘둘렀다.
캉-! 파각!
그러나 마하임의 검은 하륜에게 닿지 못했다.
그의 검은 허공에서 거대한 벽에 부딪힌 것처럼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부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마하임 역시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처박혀 버렸다.
“마스터 명령을….”
마하임의 목과 팔을 짓누른 그 무언가가 말했다.
그것은 형체마저 일정치 않았다. 인간과 비슷했지만, 전혀 다른 존재. 인간이면서도 인간의 길을 벗어난 자, 통칭 흑신선(黑神仙)들이었다.
“아직 죽여선 곤란합니다. 저희의 계획을 망쳐 놓은 대가는 확실하게 치러 주셔야겠죠?”
하륜이 손짓하자 흑신선 중 하나가 검붉은 주머니 하나를 가지고 마하임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 주머니에는 마하임의 머리보다 조금 더 큰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흑신선은 마하임의 앞에서 그 주머니 속에 든 것을 꺼내 들었다.
“네 이놈…!! 네가 정녕 사람이냐! 사람이냔 말이다!!!”
마하임은 분노하고 또 분노했다. 그것은 마하임의 오른팔이자 윈드시크릿의 수호자라고 불리었던 장군, 요한의 머리였다.
피투성이로 변해 반쯤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뭉개져 있었지만, 마하임이 어찌 그의 얼굴을 잊을 수 있으랴!
마하임은 그를 바라보며 미친 듯 울부짖었다. 그런 마하임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하륜은 천천히 말을 다시 이었다.
“엘프족 여왕 세실의 시신도 찾아 드리고 싶었지만, 그녀는 정령왕을 소환해 흑신선 대대 하나를 전멸시킨 뒤 자폭해 버려서 말이지요. 머리카락 한 올도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씁쓸한 목소리로 말하는 하륜. 그런 하륜을 향해 마하임은 소리쳤다.
“어째서지? 왜 이런 무의미한 살육을 저지르는 거냐!?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마하임은 피를 토하듯 말한다.
이미 아르케비니아 본성이 함락되면서 100만 이상의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다. 그리고 이건 어디까지나 일부에 불과했다.
아르케비니아 말고도 수많은 나라가 이들의 무차별 공격에 희생당했다.
대륙 연합은 타협도, 항복 권고도 없었다. 그들의 선전 포고는 언제나 일방적이었고, 대륙 연합의 군대가 지나간 곳에는 오직 죽음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네, 그들에게 죄는 없지요. 이해해 달라는 소리는 하지 않겠습니다. 저희는 그저 최선을 다할 뿐. 당신은, 그래. 이해할 수 없겠죠….”
하륜은 이 말만을 남기고 처음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허공에 녹아들 듯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허공에 떠 있는 거대한 제국의 비공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이이잉-
그때 들려온 기괴하면서도 섬뜩한 울림. 그 울림은 저 비공정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리고 마하임은 이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저건 제국군의 대량 살상 마도병기 ‘포톤캐넌’이 발사 준비를 마쳤다는 징조였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비공정에선 새하얀 죽음의 빛줄기가 윈드시크릿을 향해 내리꽂혔다.
슈우우욱 콰콰쾅!!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 포톤캐넌의 상식을 초월한 파괴력 앞에 윈드시크릿은, 문자 그대로 증발해 버렸다.
마하임 그가 소중히 여겼던 모든 것들과 함께….
그렇게 마하임의 생은 끝났다.
* * *
“으아아아악!”
마하임은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가슴은 터져 나갈 듯 두근거렸고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무엇이 현실인지 무엇이 꿈인지 구별조차 할 수 없는 이 불쾌하고도 끔찍한 기분.
“여긴?!”
숨을 몰아쉬며 마하임은 주변을 살폈다. 마하임 자신은 낡은 침대 위에 상체를 일으키고 앉아 있었다.
아르케비니아를 상징하는 저울과 검이 교차하는 저 문양, 이곳은 자신의 집무실이 있었던 윈드시크릿의 영빈관이 틀림없었다.
“난 죽었을 텐데!”
마하임은 비틀거리면서 집무실 구석에 위치한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거울에 보인 것은 다름 아닌 10년 전 자신이었다.
“이럴 수가…. 지금 내가 꿈을 꾸는 것은 아니겠지?”
자신의 얼굴을 더듬거리며 마하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자신은 분명히 죽었다. 불타오르는 윈드시크릿의 성벽 위에서.
그런데 지금 자신의 눈앞에 보인 것은 무려 10년 전,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자신이었다.
“저기 왕자, 아니 영주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바로 그때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 마하임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하륜. 한때 자신의 충성된 신하이자, 자신의 등에 칼을 꽂고 배신한 원수.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악의 축!
“설마 넌 하륜?!”
“네. 하륜 맞습니다만.”
가면을 쓰고 몸에 딱 붙는 검은색 튜닉을 위아래로 차려입은 그는 자신이 마지막 보았던 하륜의 모습 그대로였다.
“으아아아!”
마하임은 망설이지 않고 하륜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그러나 이제 막 회귀한 마하임의 공격은 동네 건달의 주먹질만도 못했다.
“곤란합니다, 또 이러시면!!!”
하륜은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것만으로 마하임의 어설픈 공격을 가볍게 피한 뒤, 그의 팔을 가볍게 꺾어 바닥에 처박아 버렸다.
쾅!
“크윽!”
마하임은 땅에 처박혀 신음했다. 그런 마하임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하륜은 말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정말 너무하십니다. 제가 말씀드렸죠. 야밤에 벌꿀주는 자제해 달라고 말입니다!”
하륜은 정말 화가 난 듯 소리쳤다. 그의 입장에선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매일 술이나 퍼마시며 인생을 허비하고 있는 쓰레기 같은 주군을 섬기는 와중에 급기야는 그 주군의 주먹세례가 뜬금없이 날아왔으니 말이다.
“이 배신자! 죽여 버릴 거야! 반드시 죽여 버릴 거라고!!”
마하임은 팔이 꺾인 채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말했다. 그는 지난밤 벌꿀주를 8병이나 비우고 새벽 늦게까지 민폐를 끼치다 잠들었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술이 덜 깨 발음조차 정확하지 않았다. 지금 마하임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알코올 중독자가 주사를 부리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배신자라고요? 아, 또 이상한 꿈 꾸셨구나. 장담하건대 절대 그런 일 없을 겁니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영주님 같은 봉을 놓치면 제가 병신이죠. 어서 정신 차리세요. 더는 집무를 미룰 수 없습니다. 지금 결재하실 서류가 얼마나 많은지 알고나 계십니까?”
하륜은 마하임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어서 반문했다.
집도 절도 없는, 과거의 기억조차 대부분 잃은 자신을 주점에서 친해졌다는 이유만으로 덥석 ‘서기관’으로 고용해 준 마하임을 배신할 리 없었던 것이다.
솔직히 지금 심정이라면 마하임이 짖으라고 하면 짖는 시늉까지 할 자신이 있는 하륜이었다.
“하, 하하하! 그래. 역시 돌아온 게 맞네. 젠장, 제기랄…!”
허탈한 듯 웃는 마하임. 자신은 죽지 않고 과거로 돌아왔다. 그것 말고는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이걸 누가 믿어 줄 것인가? 어쩌면 하륜의 말처럼 한낮 꿈일지도 몰랐다.
“대체 왜 그러십니까? 영주님. 저도 좀 알아듣게 설명해 주시면 안 될까요?”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하륜. 그런 하륜을 바라보며 마하임의 머릿속은 더욱더 복잡해 졌다.
그 미래에서 일어난 하륜의 배신….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필요했던 순간에 하륜은 마하임을 배신했다. 그리고 제국에 붙어 마하임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
그것이 10년 후의 마하임에게 닥쳐올 미래였다.
“…설명한다고 네가 믿어 줄까?”
“그건 모르죠. 전 의외로 포용력이 넓거든요. 논리적으로 앞뒤만 맞는다면, 과거로 회귀하셨다고 하더라도 믿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만?”
하륜의 말에 마하임은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분명 그는 농담 삼아 한 말이었겠지만, 마하임에게 있어선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설마, 정말 회귀…하신 겁니까?”
“…….”
마하임이 침묵하자 하륜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표정은 가면에 감추어져 있어 볼 수 없었지만, 뭔가 알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영주님께서 ‘미래’에서 보고 온 것들을.”
마하임은 마치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그리고 마하임은 입을 열었다.
미치도록 지키고 싶었고 미치도록 살리고 싶었지만, 결국 아무도 살리지 못하고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 미래.
그 절망으로 점철된 미래를, 자신의 최고의 친구이자 적이었던 하륜에게 펼쳐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