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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군주-2화 (2/194)

2화

타탁 탁-

마하임의 집무실 구석에 있는 벽난로에서 장작 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하륜은 무척이나 곤혹스러웠다.

자신의 새로운 봉이라고 생각했던 저 영주가 갑작스레 꺼낸 말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황당한 이야기였다.

“이거야 원. 황당하다 못해 당혹스러울 정도의 이야기군요.”

그러나 알코올 중독자의 망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디테일한 이야기에 하륜은 다음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망설여야만 했다.

“이렇게 난감한 이야기는 처음입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자신의 가면을 만지작거리며 하륜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마하임, 그의 말이 단순히 디테일이 높기만 했다면 그럴듯한 거짓말로 치부하고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마하임은 지금껏 자신이 알던 그 와는 다른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정말 마하임 님이 맞긴 한 겁니까?”

“나는 나다. 믿기 싫으면 당장 나가도 좋다.”

눈에 살기까지 도는 얼굴로 마하임은 말했다.

지난밤까지만 해도 마하임은 고작 17살이라는 나이에 알코올 의존증을 앓고 있는 망나니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 있는 마하임은, 뭐라 말할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아수라장을 헤치고 나온, 백전노장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뭐, 좋습니다. 영주님의 말을 요약해 본다면 영주님은 10년 후의 미래에서 지금으로 회귀했다는 거죠. 맞나요?”

“난 내가 겪은 사실만을 이야기했을 뿐이다.”

마하임은 여전히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하륜의 질문에 답했다.

하륜은 그런 마하임을 바라보며 지금의 상황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좋습니다. 당신이 만약 내가 찾던 인물이라면….’

대륙이 망하든 말든 그저 방관자로서 일생을 마치려 했던 그였지만, 마하임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역시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저 영주는 미래에서 왔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미래는 파괴와 절망만이 넘치는 데드엔딩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하륜은 그런 미래 따위 인정할 수 없었다.

“영주님, 확률론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알아.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 네놈한테 귀가 따갑도록 들었으니까.”

“어? 전 한 번도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말이죠.”

“시끄러, 내가 알고 있는 그 미래에서 네놈은 심심하면 나에게 말했다. ‘이 세상에 100%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99.99%의 확률로 실패한다 하더라도 0.01%의 성공 확률은 엄연히 존재한다고 했다.”

그 미래에서 하륜이 없었다면 압도적인 물량으로 몰아치는 제국의 공격을 절대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륜은 그 절망적인 전쟁에서 최악의 상황에 부딪힐 때마다 늘 입에 이 말을 달고 살았다.

‘영주님, 우리에게는 아직도 0.01%의 승산이 있습니다. 그 승산에 모든 것을 걸어 보죠.’

그리고 하륜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 무슨 수를 써도 이길 수 없어 보이는 그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그 미래에서 마하임은 제국과의 싸움을 시작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 말대로입니다. 전 미래가 정해져 있다고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말도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그럼 한 번 더 들으십시오. 설령 영주님이 보신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전 그따위 미래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맹세코 그런 미래는 영주님께 찾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륜은 이를 깨물었다. 아무런 꿈도 희망도 없었던 그였지만, 마하임이 겪은 ‘미래’를 안 이상 방관자로서만 있을 수 없었다.

운명이란 항상 그런 것이기에.

“아무래도 좀 바빠질 것 같군요.”

하륜은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어쩌면 시간은 마하임의 말보다 훨씬 더 부족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대로 넋 놓고 파멸만을 기다릴 하륜이 아니었다.

“그럼 이번에도 ‘사탕무’부터 시작하는 거냐?”

“하하, 이거야 원, 그건 반칙입니다.”

마하임의 말을 들은 하륜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미래에서 회귀했으니 자신이 앞으로 무슨 일을 하려는지 아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참고로 말하지. 난 너를 믿지 않는다.”

여전히 살기를 거두지 않고 마하임은 차갑게 하륜을 향해 말했다.

하륜이 배신할지 안 할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제국에 맞서기 위해선 하륜의 힘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아무리 그가 미래에 배신했다 하더라도.

“믿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전 그저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니까요.”

하륜은 이 말을 남기고 마하임의 방을 빠져나갔다.

마하임은 하륜이 나간 뒤에도 한 참 동안 그대로 앉아서 하륜이 사라진 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망설이지 않겠어.”

마하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속이 메스껍고 머리는 여전히 어지러웠지만, 전장에서 이런 일은 허다했다. 솔직히, 이런 것은 고통의 축에도 들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단 하나. 그 절망적인 미래를 바꿀 만한 실마리를 찾는 것이었다.

하륜이 말한 확률론이 맞다면 어디엔가 분명히 이 절망적인 미래를 바꿀 만한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뜻했다.

그것만 찾는다면, 승산은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이론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찾아내고 말 거다. 아니, 찾아내야만 한다! 반드시.”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앞으로 남겨진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뭔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내지 못하면, 그 절망적인 미래를 그저 반복할 뿐이었다.

그런 미래를 다시 반복할 바에는 차라리 자결을 택하리라. 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하는 마하임이었다.

* * *

“안 돼. 설탕무는.”

마하임은 하륜을 바라보며 단칼에 그의 제안을 거부했다.

늦은 밤, 마하임의 집무실. 마하임과 하륜은 앞으로의 윈드시크릿 운영에 대해 토론을 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 토론은 시작부터 암초에 걸리고 말았다.

“왜죠? 설마, 영주님이 말한 그 미래에서 이 방법이 무슨 문제를 일으킨 겁니까?”

역시 하륜은 명석했다. 마하임이 뭐라 말하지도 않았는데 어느 정도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하긴, 회귀 전의 그 세계에서 하륜은 대륙 최고의 두뇌를 지닌 책사라 불렸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방법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단지 문제가 있다면, 우린 사탕무에서 추출한 설탕을 유통해 수익을 얻을 수 있을 만큼의 무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거다.”

“하…. 역시. 그게 문제였군요.”

마하임의 말을 들은 하륜은 탄식이 섞인 한숨을 내 쉬었다.

설탕은 온대성 기후를 지닌 대륙, 다시 말해 시노쿠 대륙에서는 구하기가 매우 어려운 귀중한 향신료였다.

설탕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와 마찬가지로 ‘사탕수수’에서 가장 쉽고 많이 얻을 수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시노쿠 대륙에선 기후와 토질 문제 때문에 재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설탕을 구하기 위해서는 시노쿠 대륙에서 수천km 떨어진 열대 지방에서 수입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물론 그 외에도 방법이 없진 않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탕무라는 작물에서 설탕을 추출하는 방법이었다.

사탕무는 재배하기도 쉬웠고 수확량도 나름 많아서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라도 다 키울 수 있는 작물이었다.

그러나 사탕무에서 추출할 수 있는 설탕의 양은 적기도 적었거니와, 설령 추출한다고 하더라도 씁쓸한 맛이 많이 가미되어 설탕의 단맛을 제대로 내지 못했다.

그래서, 귀족이나 부자들은 사탕무에서 추출된 설탕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러한 사탕무였기에 상업용으로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그러나 하륜은 이 사탕무를 올바르게 이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어디서 그런 정보를 입수한 것인지는 몰라도 하륜은 사탕무에서 설탕을 추출하는 새로운 방법을 알고 있었다.

현재의 추출법은 단순하면서도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설탕을 추출할 수 없었을 뿐.

하륜의 방법을 이용하면 사탕수수를 이용해 만든 설탕과 동일한 수준의 설탕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그 빌어먹을 미래에서, 네가 고안해 낸 정제법으로 제조한 설탕은 불티나게 팔렸지. 하지만, 우린 이걸 지킬 만한 힘이 없었다.”

이 설탕의 냄새를 맡은 이웃 영지와, 그리고 마하임의 아버지가 황제로 군림하고 있는 아르케비니아 본성의 세력까지 이 설탕을 차지하기 위해 윈드시크릿으로 몰려든 것이다.

그 결과 윈드시크릿은 이웃 영지와 아르케비니아 귀족 세력, 그리고 인근 국가의 군대까지 몰려들어 영지전을 넘어서 국제적인 전쟁터가 되어 버렸다.

그 덕분에 마하임은 본성 아르케비니아로 유배 아닌 유배를 떠나야 했고, 하륜 역시 울며 겨자 먹기로 마하임과 함께 본성으로 끌려가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마하임의 설명을 모두 들은 하륜은 안타까움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군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후우, 정말 어렵군요. 미래를 알아도 바꿀 만한 힘이 없다는 건, 정말 저주나 다름없군요. 영주님이 왜 그토록 괴로워하시는지 이제야 이해가 갑니다.”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 그였지만, 자신이 생각해 놓은 비장의 수가 이런 식으로 나비 효과를 일으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안 돼. 그 미래에서도 할 수 있을 만한 일은 다 해 보고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 사탕무였으니까.”

그 미래에서도 하륜은 사탕무가 위험한 방법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탕무에서 추출한 설탕은 최대한의 보안을 유지한 채 암시장을 통해 조금씩 유통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설탕은 한 번 맛보면 절대 잊을 수 없다는 악마의 가루라는 명성답게 순식간에 소문은 퍼져 나갔고, 결국 이 설탕의 정체는 밝혀지고 말았다.

“역시 그렇군요. 저도 사실 설탕 유통은 그다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너무 위험한 도박이라서 말이죠.”

하륜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역시 설탕은 너무나 위험한 도박이었다.

지금 같은 혼란의 시대에 아무런 힘도 없는 약소 귀족이 설탕이라는 귀중품을 다룬다는 것 자체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방법을 바꾸어 보죠. 평범한 것이 안 된다면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한번 해 보는 겁니다.”

하륜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나기 시작했다. 솔직히 성공할 가능성은 무척이나 낮았지만, 마하임 저 사람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너, 이번에는 또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는 거냐?!”

“흐흐흐,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단 영주님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합니다만.”

하륜이 저런 모습을 보일 때면 어김없이 뭔가 말도 안 되는 일을 계획할 때였다.

하지만 마하임은 알고 있었다. 하륜이 저렇게 말할 때 그의 기책은 100%의 확률로 성공했다는 것을.

“그 방법이라면, 미래를, 그 젓 같은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글쎄요. 확률론적으로 100%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만.”

“뭐 좋다. 네가 그렇게 말하면 100% 성공한다는 이야기니까.”

“하하하, 이거 정말 못 말릴 분을 주군으로 섬기고 말았군요. 좋습니다. 한번 해 보죠. 그 젓 같은 미래를 한번 바꿔 봅시다.”

하륜은 간만에 온몸에 힘이 넘쳤다. 그를 괴롭히던 끝없는 권태감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의 가슴은 정말 오랜만에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저도 끝을 봐야겠습니다. 설령 ‘소멸’ 처분을 받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해내고 말 겁니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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