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뭐지….’
두근거리는 가슴을 추스르며 마하임은 소리가 난 방향으로 신경을 집중했다.
“제발 부탁합니다…. 이것마저 가져가시면 저희는 죽어요!!”
나이 든 노파와 소녀, 그리고 그 주위를 포위하듯 둘러싸고 있는 윈드시크릿의 병사들이 멀리 눈에 띄었다.
이것만 봐도 마하임은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가을 징수인가?”
저 병사들은 가을이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군포(軍布)세와 주민세의 징수를 위해 파견된 것이 분명했다.
군포세는 병역을 하는 대신 나라에 세금 바치는 세금으로서 남녀노소, 나이 불문, 돈이 있건 없건 반드시 내야 하는 것이었다.
만약 돈이 없다면 토지로, 그것도 없다면 심지어 자신의 몸이라도 팔아서라도 내야만 했다.
물론 원칙적으로는 세액 자체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듯 세금 징수에는 부정부패가 따르기 마련이다.
“허어, 올여름에도 그냥 대충 넘어가지 않았나?”
“할머니, 더는 우리도 봐주지 못합니다.”
병사들은 마치 좋은 이웃 아저씨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속생각은 전혀 달랐다.
원래 군포세와 주민세는 일정한 수입원이 있는 3인 가족에 한해서만 징수한다.
즉, 3인 가족 이하는 낼 필요가 없는 세금이었다. 지금 이들은 부당 징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노파의 무지를 비웃으면서….
“하지만 이것만은….”
노파는 눈물로 애원했다. 계속된 가뭄으로 올해 농사도 대흉이었다.
올해 거두어들인 밀을 다 합쳐 봐야 지금 이 병사들이 노리고 있는 한 자루가 다였다.
“그야 그쪽 사정이고, 우리들도 제대로 징수를 해 가지 않으면 징계를 당한단 말일세.”
리더로 보이는 건장한 청년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의 시선은 노파의 곁에 딱 붙어 떨어지지 않으려는 작은 소녀에게 닿아 있었다.
“그 애는 눈이 안 보이는 건가?”
“네, 하나뿐인 손녀인데, 열병을 들었을 때 제때 약을 못 써서…. 제발 이 애를 봐서라도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소녀를 꼭 감싸 안은 노파가 엎드려 흐느꼈다.
그 안쓰러운 모습에 다른 병사들은 조금 머쓱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리더는 좀 달랐다.
“그러고 보니 애도 있었군. 그럼 세금을 더 걷어야 하겠네. 얘들아! 저 노파의 집을 뒤져서 돈 될 만한 건 모두 찾아내!”
“…옙!”
노파의 집을 뒤지기 시작하는 병사들, 노파와 소녀는 눈물로 이들을 막아섰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 빌어먹을 늙은이가!”
퍽!
“아악!”
노파는 리더의 발길질 한 방에 나가떨어져 버렸다. 흥분한 그는 쓰러진 노파에게 계속 발길질을 날렸다.
일순간 피투성이가 되어 버린 노파. 그러나 이성을 잃은 발길질은 멈추지 않았다. 눈먼 소녀가 울부짖으며 그의 팔을 붙들고 늘어져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제발 그만하세요! 뭐든 다 할 테니까, 그러니까!”
“시끄럿! 본보기를 한번 보여 줘야 말을 잘 듣지!”
병사들의 리더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소녀를 거칠게 바닥으로 밀어 버렸다. 같은 병사들조차 그 참혹함에 눈을 돌릴 정도였다.
“뭣들 하고 있나! 물건을 챙겨 이동한다!”
무시무시한 리더의 외침에 그때야 정신을 차린 병사들은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곡식 주머니를 챙겼다. 바로 그때였다.
“이게 무슨 소동이지.”
목소리가 들려온 곳에는 곱상하게 생긴 청년이 서 있었다. 선명한 금발이 유난히 눈에 띄는 소년, 그는 다름 아닌 마하임이었다.
“뉘, 뉘신지?”
병사들은 갑작스러운 마하임의 출현에 조금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특히 마하임의 선명한 금발은 귀족을 상징하기에 더욱 그러했다.
“지금 감히 내 이름을 묻는 건가?”
마하임의 말에 병사들은 순간할 말을 잃었다.
귀족으로 보이는 저 청년의 말이 맞긴 하다. 어찌 감히 귀족에게 병사 따위가 함부로 대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믿는 바가 있었다.
“하, 이것 참. 어디 촌구석에서 굴러 온 귀족 자제분인지는 모르겠는데. 괜한 참견 말고 꺼지시오.”
이 말을 들은 마하임은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놈들이 하는 짓은 명백히 불법. 그의 눈에 띈 이상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어딜 가나 너희 같은 녀석들이 있기 마련이지.”
마하임은 그들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하긴, 어딜 봐도 자신은 아직 성인도 아니었고 방어구도 착용하지 않은 애송이에 불과했으니 저들의 반응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당연하다고 용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예나 지금이나 저런 놈들에게는 몽둥이가 답인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진리. 지금 저들에게는 저승에 가서도 잊을 수 없는 화끈한 이벤트가 필요함이 분명했다.
“오페라. 전투 모드인가 뭔가를 지금 사용 가능하나?”
[가능합니다. 목표는 전방의 적대 반응을 보이는 4명입니까?]
“맞아. 찢어 죽이고 싶지만, 이래 봬도 영주다. 생포해서 법정에 세우고 싶은데, 가능할까?”
[가능합니다. 단, 아직 튜토리얼 이전이기 때문에 제가 직접 오토파일럿 모드로 임의 실행할 텐데, 승인해 주시겠습니까?]
“오토파일럿 모드?”
[용어 설명 : 오토파일럿 모드란? 서포트 AI가 시류를 사용하는 사용자의 육체를 임의 제어하는 것으로, 정해진 임무를 최적, 최고의 효율로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마하임은 오페라의 각주까지 보일 듯한 설명을 들었지만, 영 따라 갈 수 없었다.
역시 고대인의 기술은 이해할 수도 이해하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갑자기 피로해진 마하임은 이제 아무래도 좋다는 심정으로 말했다.
“알아서 해. 결과만 같으면 상관없다.”
[알겠습니다. 지금부터 마하임 님의 육체는 저 오페라가 제어합니다.]
오페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하임은 태어난 이후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기묘한 감각에 순간 당황했다.
분명 온몸의 감각은 온전히 다 남아 있는데도 몸이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어이? 저 귀족 나부랭이 미쳐 버린 거 아냐?”
“그러게,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혼자서 중얼중얼 거린다냐.”
“야, 빨리 정리하자. 징수해야 될 곳 아직 많이 남았다.”
“크큭, 덤으로 저 귀족 새끼는 노예 상인한테 넘겨서 푼돈이라도 챙기고 말이야. 후후후.”
앞으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전혀 예상치 못한 병사들은 여유롭게 웃으며 마하임을 포위했다. 그리고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그들의 여유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전장에서의 물량이란 절대적인 승리를 뜻하는 것이었으니까.
일당백의 용사란 말은 솔직히 있을 수 없었다. 만약 있다 하더라도 그야말로 극소수의 타고난 무력을 지닌 자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반적으로 아무리 전투에 익숙한 전사라 할지라도 완전 무장한 병사 4명에게 포위당해 공격당하면 십중팔구는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두 눈으로 사물을 파악하고 움직인다. 사람이 한 번에 볼 수 있는 각도는 기껏해야 180도 정도. 전투에 몰입하면 시야는 그것보다 훨씬 좁아졌다.
포위 공격이란 다시 말해 그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서 공격하기 위한 진법.
아무리 단련된 전사라 할지라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피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평범한 인간에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오페라가 제어하는 12만 5천 개의 나노머신은 마하임의 시야를 사방 360도 전부를 완벽하게 커버해 주었다.
다시 말해 지금의 마하임에게 있어서 사각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우선 팔 하나만 받아 가마!”
어느새 마하임의 뒤로 돌아간 병사 하나가 매섭게 그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들은 악당이긴 했지만, 기본적인 보법과 검술은 그 어떤 성의 병사보다 잘 단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검은 허무할 정도로 간단히 목표물에서 빗나가 버렸다.
마하임은 마치 뒤통수에도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옆으로 살짝 몸을 비트는 것만으로 간단히 놈의 공격을 피해 버린 것이다.
“어쭈 피했어? 괜한 허세는 아니었구나. 좋다! 전원 돌격!!!”
병사들의 리더는 검을 고쳐 쥐고선 마하임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다른 병사들도 기다렸다는 듯 마하임을 향해 달렸다.
[목표 확인, 비살상 제압 모드 이행. 미션 개시]
적의 접근을 확인한 오페라는 마하임에게 받은 첫 번째 명령을 실행하기 위해 나노머신 시류에게 일제히 명령을 내렸다.
12만 7천 개로 이루어진 나노머신 집합체 시류는 마하임의 몸을 단숨에 인류라는 카테고리의 벽을 깨고 고대인의 전사, ‘초인’으로 순식간에 탈바꿈시켰다.
그리고 전설로만 남아 있는 ‘초인’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빠악-! 콰지직!
묵직한 울림과 함께 가장 먼저 달려든 리더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가 휘두른 검 역시 기묘한 방향으로 휘어져 있었다.
달려오던 경비병들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그도 그럴 것이 마하임이 날카로운 돌려차기 한 방으로 자신들의 리더를 쓰러트렸던 것이다.
단순히 쓰러트리기만 했다면 간혹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세상은 넓고 무술에 능한 고수는 많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마하임이 보여 준 기술은, 뭔가 이질적인 것이었다.
마하임이 발을 살짝 올린 것까지는 보았지만, 그다음 동작은 병사 중 그 누구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리더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고, 그의 싸구려 검은 90도 각도로 휘어져 버렸다.
“오페라, 방금 시간이 느리게 흐른 것같이 보였다. 뭐지?”
[마하임 님의 뇌를 통상의 10배로 오버클럭했습니다. 목표 대상 4명 중 1명 전투 불능 확인. 미션을 속행하시겠습니까?]
“좋아. 부탁하지.”
[알겠습니다. 미션을 재개합니다.]
오페라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마하임은 마치 땅을 날 듯 가장 가까이 있는 병사를 향해 달려갔다.
그 움직임이 어찌나 빠른지 남은 병사들은 마하임의 잔상조차 보지 못했다.
빠악! 퍽, 투아악!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마하임은 그야말로 무자비하게 병사를 구타하기 시작했다.
상하좌우에서 쏟아지는 마하임의 펀치 공격은 잘 훈련된 병사의 반응 속도를 아득히 상회하는 것이었다.
지금 마하임의 근육은 뇌의 오버클럭에 동조해 10배 이상의 파워를 내고 있었다.
이미 마하힘의 몸은 호모 웨포니투스로 완전 개조되어 있기에 일반적인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또 10배를 강화시켰으니 마음만 먹는다면 저 병사 정도는 간단히 찢어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시류는 마하임의 명령대로 급소 가격을 완벽히 배제한 채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병사를 난타하고 있었다.
“컥, 크헉! 이제 그만…. 컥!”
슈각 슈아악!
“제발 용서를, 아아악!”
쓰러지지도 못하고 두들겨 맞는 병사는 살려 달라고 애원했지만 오페라는 멈추지 않았다.
아직 죽기 직전이라는 목표를 완료하지 못했던 것이다.
피와 살이 사방으로 튀었다. 마하임의 주먹은 바람을 가르며 병사의 상반신을 무차별 난타했다.
그는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 갑옷은 전혀 방어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치명상을 막아 의식조차 잃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목표물 완전 침묵 확인. 이 이상 공격 시 사망의 위험성이 있으므로 공격을 중단합니다. 다음 목표물 확인. 공략을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