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그렇기에 식량은 둘째 치더라도 부패한 병사들이 뒈지는 꼴을 보고 싶었던 영지민들은 꾸역꾸역 광장으로 모여든 것이다.
“아르케비니아 제5왕자이시자, 윈드시크릿의 신임 영주 마하임 폰 잉그램 님을 열렬히 환영해 주시길 바랍니다!”
“와아아아아아!!!”
광장이 떠나갈 듯한 함성이 사방을 진동시켰다. 마하임은 예상치 못했던 영지민들의 반응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뭐지, 이건?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왜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습니까? 노파와 앞 못 보는 소녀를 구해 냈잖습니까? 제가 입소문이 잘 퍼지도록 손을 좀 썼죠. 물론 생각 이상으로 잘 퍼져서 저 역시도 좀 놀랐지만 말입니다.”
하륜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뒤로 물러섰다. 마하임은 웃어야 할지 찡그려야 할지를 망설이다 하륜이 서 있던 단상 위에 올라섰다.
“난 구질구질한 연설 따윈 하지 않겠다. 나는 ‘법’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고 생각한다. 귀족이든 평민이든, 노예든! 누구나 법 앞에서는 평등하다. 그리하여 내 오늘 그 ‘법’을 집행하리니, 죄인을 끌고 와라!”
마하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동아줄로 줄줄이 묶여 있는 4명의 병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재판은 무슨 재판이냐! 죽여! 죽여 버려라!”
“저런 새끼들이 설치니 윈드시크릿이 망하는 거야!”
“당장 끌어내! 저놈들은 돌에 맞아 죽어야 해!”
분노한 영지민들의 외침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영지민들은 참지 못하고 저마다 돌팔매질을 하기 시작했고 묶여 있는 병사들을 지키던 호위병들은 깜짝 놀라 방패를 치켜들었다.
“조용! 저들은 마땅히 받아야 할 죗값을 치를 것이다. 다시 돌을 던진다면, 내가 친히 벌할 것인즉 모두 자중하도록!”
마하임의 쩌렁쩌렁한 외침이 순간 터져 나왔다.
이 혼란 속에 원래라면 묻혀 버리는 게 당연했지만, 시류의 힘으로 강화된 그의 성대는 일반적인 성량을 수십 배 뛰어넘는 목소리로 순식간에 영지민을 압도해 버렸다.
쥐죽은 듯 조용해진 광장. 마하임은 천천히 묶여 있는 4명의 병사 앞으로 다가갔다.
“죄인들은 들어라. 아르케비니아 형법 제12항 2조에 의거해 양민 학대 및 약탈은 참수형에 처하게 되어 있다. 이의 있는가?”
마하임은 전날 사건의 주인공인 4명의 병사에게 말했다.
“풋, 이의? 닥치고 죽이시지? 귀족 나리. 뭐? 법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다? 멋진 개소리 잘 들었수다.”
“그러게, 크큭. 보아하니 아직 젖살도 안 빠진 애새끼인 듯한데, 아가야.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단다.”
어제 마하임에게 순식간에 제압당한 2명의 경비병들은 마치 실성한 듯 낄낄거리며 말했다.
“현실이라…. 그래, 현실은 시궁창이지. 언제나 그렇듯이 말이야.”
마하임은 담담히 그들의 말에 대꾸했다. 사실 그들의 말은 틀린 게 없다는 것을 마하임 역시도 알고 있었다.
법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책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일 뿐이지,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너네 귀족들은 초야권이니 뭐니 하면서 잘도 여자들을 강간하고 처다니면서, 물건 좀 가져갔다고 사형이라고? 키킥. 그래, 죽여라. 빨리 죽여! 이 시궁창 같은 세상 더 살아서 뭐 하나?!”
2명의 병사는 윈드시크릿에서 10년 이상 근무한 잔뼈가 굵은 병사였다.
그리고 그 횟수만큼이나 볼꼴 못 볼꼴을 모두 보아 왔기에 아르케비니아 귀족들의 만행은 이미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 알고 있었다.
“전 영주가 복상사했다는 말 들었수? 신임 영주님. 그건 말이야, 새빨간 거짓말이야. 사실은 말이지 10살도 되지 않는 꼬맹이를 강간하려다 이를 본 분노한 영지민 누군가에게 암살당한 거야. 큭큭.”
물론 마하임 역시 알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누가 죽인 것까지도 말이다.
그 암살범은 세실 일리암스. 윈드 시크릿의 도둑 길드 마스터였다.
“할 말은 다 했는가?”
마하임은 들은 척도 않고 둘을 향해 말했다.
그들의 말이 틀린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죄는 죄, 벌은 벌이었다.
마하임은 이들을 살려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설령 살려 준다 하더라도 그들의 썩어 빠진 근본은 절대 바뀌지 않으리라.
“요한. 네가 직접 집행해라. 네 부하들이니 네가 끝까지 책임져야겠지?”
“…알겠습니다. 영주님.”
요한은 굳은 얼굴로 조용히 대답했다. 법을 어긴 그들의 사형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자신이 손수 키워 낸 병사를 자신의 손으로 죽인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영주의 명령은 절대적인 것. 게다가 저들은 현행범이었기에 영주의 직접 사면 없이는 사형을 면할 길이 없었다.
“다 너희들을 제대로 이끌지 못한 내 잘못이다. 원망하려면 날 원망해라.”
“씨X 귀족의 개새x. 너의 X 같은 아버지 제페쉬 백작과 함께 너도 머지않아 지옥에 떨어질 거다.”
“쓸데없는 소리 관두고 후딱 합시다. 죽기 참 좋은 날인 것 같구려. 나중에 지옥에서 봅시다. 하하하!”
2명의 병사는 미친 듯 웃었다. 그런 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요한은 자신의 애검을 뽑아 들었다.
바스타드 소드급의 장검이었지만 요한은 마치 목검을 다루듯 가볍게 한 손에 움켜쥐었다.
슈아아악-!
검은 검집에서 뽑혀져 나오기가 무섭게 새하얀 빛을 뿜어냈다. 이전에 휴이, 듀이가 잠시 보여 줬던 오러소드와는 한눈에 봐도 차원이 다를 정도의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A급 오러소드 반응 확인. 경계 바랍니다.]
말할 것도 없이 오페라의 즉각적인 경고음이 마하임의 귀를 타고 들어왔다.
마스터 소드의 칭호를 받는 조건이 S급 오러소드의 사용 유무였는데, A급 오러소드를 저리 자유롭게 꺼내는 것을 보니 과연 미래에 마스터 소드에 오르는 재목다웠다.
“집행해라.”
“네, 영주님.”
마하임의 말이 떨어지자 요한은 무겁게 답했다.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단칼에 나란히 앉아 있는 병사들의 목을 베어 버렸다.
와아아아아아!!
이를 지켜보던 영지민들의 함성이 다시금 광장을 뒤흔들었다.
요한이 베어 버린 2명의 병사들의 목에선 피 한 방울 흘러나오지 않았다.
오러소드는 세포 자체를 괴사시키는 힘이 깃들어 있었기에 오러소드에 당한 상처는 마치 지독한 화상처럼 녹아내려 버리기 때문이었다.
“휴이, 듀이라고 했던가?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지? 난 법 앞에선 모두가 평등하다고 했다. 정말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마하임은 넌지시 그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이들은 지금 죽어 버린 2명의 병사들과는 뭔가 조금은 달라 보였으니까.
‘휴이, 이런 건 네 전공이잖아. 말해. 난 이런 거 소질 없어.’
‘하아, 듀이 네놈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어쩔 수 없지.’
마하임을 눈치를 살피던 휴이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런 법은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휴이는 나름 글 밥을 먹은 몰락한 귀족의 자제였기에 마하임의 의도를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었다.
뭐 그렇다고 해 봤자 자신의 죽음은 확정이었지만 말이다.
“그건 사실이지.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그 법을 누가 집행하느냐에 따라서 모두에게 평등할 수도 있겠죠.”
휴이의 말에 마하임은 자신도 모르게 그를 바라보았다.
“결국 법이란 도구. 칼이나 화살 같은 무기와 다를 바 없습니다. 누가 그 검을, 그 활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만인 앞에서 평등할지 아니면 때와 상황에 따라 변하는 고무줄 잣대가 될지 결정 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후후, 어디선가 주워들은 건 좀 있구나. 그래, 좋다. 네가 보기엔 내가 그 도구를 만인 앞에서 평등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마하임의 물음에 휴이는 생각에 잠겼다.
쉽게 죽일 수도 있는데 굳이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대답이 어쩌면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글쎄요. 보아하니 무력은 우리 대장님보다 뛰어나신 듯하지만, 그 정도 힘으로는 만민 앞에서는 고사하고 이 윈드시크릿에서조차도 평등하게 법을 집행할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마하임은 휴이의 말을 듣고서 날카롭게 질문을 던졌다. 휴이는 마하임의 말에 가슴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지만 지체 없이 입을 열었다.
“누가 뭐래도 현 윈드시크릿의 실질적인 지배자는 저기 우리 경비대장님이신 요한님의 아버지 제페쉬 백작이니까요.”
휴이의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요한 역시도 인상을 찡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아버지 제페쉬 백작의 악명은 이웃 영지까지 알려질 정도로 대단했던 것이다.
“역시 죽이기엔 아까운 인재다. 요한.”
“네, 영주님!”
“이 둘을 앞으로 내가 만들 직속 부대에 편입시킨다.”
“그, 그럼 살려 주시는 겁니까?”
“오러소드를 사용할 수 있는 병사는 흔치 않지. 더군다나 머리도 좀 돌아가는 것 같고. 손을 좀 보면 쓸 만한 졸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마하임은 이 말만을 남기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그의 얼굴은 아무런 감흥도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속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마하임에게는 반드시 넘어야 할 벽, 제페쉬 백작이 있음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그가 버티고 있는 한 윈드시크릿을 완전히 지배하기는 불가능했다.
이미 말아먹은 그 미래에서도 제페쉬 백작과의 의미 없는 세력 다툼 때문에 얼마나 많은 희생과 시간을 허비하였던가?!
‘이번만큼은 다를 거다. 제페쉬 백작!’
마하임의 다음 목표는 그렇게 정해졌다.
* * *
윈드시크릿 성은 아르케비니아에서도 가장 작은 영지에 속했지만, 성을 지키는 경비병들의 수준만큼은 타 영지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았다.
대수림이라 불리는 대규모의 몬스터 서식지가 인근에 있는 것도 한몫했지만, 그 이전에 윈드시크릿 경비대 대장인 요한의 감독하에 경비병들은 매일같이 지옥 훈련을 받고 있었다.
거기다 그 훈련은 최근 3달 사이에 더 엄격해졌다. 가뜩이나 힘든 훈련이 더 힘들어졌으니 경비병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다.
“그대로 연병장 20바퀴를 돈다. 실시!”
“실시!”
요한의 말에 40여 명의 윈드시크릿 경비대 병력이 달리기 시작했다.
이미 오전 훈련을 마쳐야 할 시간이 지났지만, 그 누구도 불평하지 않는다. 그나마 요한에게 훈련을 받는 것이 훨씬 편했으니까 말이다.
신임 영주가 부임하고 나서 훈령의 양과 질은 완벽히 달라졌다.
특히 이 영주의 엄격함은 도를 넘었다. 그가 시키는 훈련은 어디까지가 훈련인지, 어디까지가 실전인지 구별조차 되지 않았다.
“오늘도 내 몸에 손을 못 대면 각오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마하임은 연병장 한쪽 구석에 2명의 병사에게 둘러싸여 있다. 다름 아닌 휴이와 듀이였다.
그들은 3달 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뻔했지만, 마하임의 눈에 들어 겨우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살아남은 그들 앞에 기다리는 것은 죽음보다 더 괴로운 지옥 훈련이었다.
“어서 공격하지 못할까!”
마하임의 외침에 휴이와 듀이는 마지못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들고 있는 목검은 이미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고 몸은 천근만근 같았지만,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또 어떠한 가혹 행위를 당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움직임은 영 적극적이지 못했다. 지금껏 수없이 공격해 보았지만, 영주의 머리끝도 스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거기 있어라. 내가 그리 가지.”
“아, 아닙니다! 듀이 가자!”
“썅! 나도 모르겠다, 으아아아!!”
휴이와 듀이는 마지못해 마하임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쳐 팔조차 제대로 안 올라갔지만, 그들에게는 애초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부웅-
목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연이어 이어졌다.
언뜻 보기엔 조잡해 보였지만 그들의 검술은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전장에서 다져진 실전 검술이었다. 웬만한 영지의 기사들도 이들을 상대하기 껄끄러울 것이다.
“후우, 좋아. 오페라, 시류 오버클럭x3 실행!”
[네, 마하임 님. 오버클럭x3 실행. 전술 지원 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