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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군주-11화 (11/194)

11화

“음, 어쩔 수 없나? 하긴 뭐, 증거 인멸도 필요하니. 하지만 여기서 먹는 건 안 돼.”

세실은 갈등하다 결국 리자드맨들이 요구를 허락했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리자드맨들은 움직였다.

“케에에엑. 우리도 그쯤은 안다, 족장.”

“키이익! 족장 최고. 몇 달 만의 인육이냐. 케에엑.”

녀석들은 큰 덩치에 걸맞지 않게 날렵한 움직임으로 시체들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절단된 팔이며 다리 등 단 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깔끔히 챙겨 어깨에 짊어졌다.

2m가 넘는 키에 덩치도 웬만한 성인 남자 2명보다 더 큰 놈들이라 사람 한둘 둘러업어도 전혀 힘든 기색조차 없다.

“어이 영주. 무섭지 않아? 설마 리자드맨에 대해 모르진 않을 테고.”

아무렇지도 않게 리자드맨을 바라보는 마하임을 향해 세실은 신기한 듯 말했다.

솔직히 리자드맨을 보고서 저렇게 태연한 사람은 마하임이 처음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보아하니 저 리자드맨들은 그대가 길들인 것 같아 경계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설령 저 녀석들이 야생의 리자드맨이라 할지라도 나를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지는 않는다.”

“와우, 대단한 자신감이네. 뭐, 혼자서 드래건 용병단을 박살 냈으니 인정해 줄 만은 해.”

세실은 이렇게 말하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용병단의 리더, 마하임이 방금 쓰러트린 다크엘프를 살펴보았다.

그녀는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듯했다. 이리저리 다크엘프를 살펴보던 세실은 갑자기 인상을 구겼다.

“이거 골치 아파졌네. 아직 성인식도 안 치른 녀석이잖아. 어이 영주. 너 아직 결혼 안 했지?”

뜬금없는 세실의 질문에 마하임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르케비니아 왕족은 18세가 되어야 성인식을 하고 결혼할 수 있었다. 아무튼, 그거와 별개로 다크엘프가 성인식을 안 한 것하고 자신의 결혼 여부가 무슨 관련이 있는지 그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건 갑자기 왜 묻지?”

“아, 맞다. 왕족은 후궁도 두고 첩도 많이 두지? 그럼 상관없겠다. 저 다크엘프는 아무래도 영주 네가 책임져야 할 거 같아.”

“그건 또 무슨 소린가?”

“하긴, 영주 넌 잘 모르겠네. 다크엘프의 관습에 대해서 말이야.”

그리고 이어진 세실의 장황한 설명들. 마하임은 그 말을 듣고는 갑자기 뒷골이 아파져 옴을 느꼈다.

다크엘프 사회는 철저히 주종 관계로 이루어진다. 특히 자신이 인정한 자와의 싸움에서 패한 다크엘프는 승자를 자신의 ‘루’로 인정하고 절대 충성한다는 것이다.

“여기 봐, 다크엘프의 양쪽 귀에 귀걸이가 2개 다 있지? 성인식을 치른 다크엘프는 귀걸이를 하나만 하고 있어. 그리고 그 성인식이란 자신을 굴복시킨 자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을 의미하지.”

“그럼 내가 저 다크엘프의 주인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응. 아니면 자결할걸? 그게 다크엘프의 전통이자,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길이니까.”

“…….”

“뭐 좋잖아? 검기를 사용하는 다크엘프라니! 아아, 내 부하로 맞이했음 딱 좋았을 텐데. 칫, 영주 네가 선수 쳤으니 어쩔 수 없지. 너 줄 테니까, 잘 보살펴 줘. 다크엘프는 까칠해도, 주인으로 인정한 자에겐 목숨을 걸고 충성하니까.”

세실은 마치 선심이라도 쓴다는 듯 마하임에게 말했다.

저 건방짐 역시 여전했다. 미래에서도 그녀는 그 누구 앞에서도 존댓말을 사용하는 것을 본 적 없었다. 압도적인 자신감. 그것이 세실 일리암스였다.

“뭔가 엄청난 짐덩이를 떠안은 것 같은데….”

“혹여나 저 다크엘프가 자결을 하거나 죽었다는 이야기가 내 귀에 들렸다? 그럼 넌 죽은 목숨이야. 알아들었어?”

노골적으로 살기를 드러내는 세실. 그 무시무시한 살기에 마하임은 온몸이 욱신거릴 정도였다.

지금 세실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없었지만, 오페라의 힘을 100%다 끌어낸다 하더라도 솔직히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녀가 사용하는 정령술의 위력은 제국의 거대 비공정마저 일격에 격추할 정도였으니까. 게다가 제아무리 마하임이 강하다 할지라도 저 리자드맨들을 전부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크르르, 족장. 저 마차 안에 있는 것들도 우리 먹어도 되나? 키에에엑!”

“익, 이 멍청이들아! 그거 건들면 다 죽어!”

멀리서 들려온 리자드맨의 목소리에 세실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마하임은 그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역시 못 말리는 녀석들이랄까?

“미안, 못난 모습 보이고 말았네. 어쨌든 잘해 봐. 자세한 건 저 애가 깨어나면 직접 물어보면 될 거야. 나는 저쪽 상황이 좀 걱정이 돼서 말이지. 그럼 다음에 봐.”

세실은 이렇게 말하고는 아인족 노예들이 갇혀 있는 마차 쪽으로 달려갔다. 남겨진 것은 마하임과 이 다크엘프뿐이었다.

“뭐, 나쁠 건 없겠지. 하지만….”

성인식에 대해선 몰랐지만 다크엘프의 충성심은 마하임도 익히 알고 있었다.

지금 마하임에게는 단 한 명의 인제라도 더 필요한 상황이었기에 이것은 그야말로 행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다크엘프, 원래는 세실의 부하가 아니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세실에게 유능한 다크엘프 부하가 1명 있었다. 항상 은밀하게 행동했기에 직접 마주칠 일은 거의 없었으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지금 저 다크엘프와 매우 닮았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마하임은 미래를 바꾼 것이다. 본래의 역사는 아마도 이곳에서 저 다크엘프는 세실과 싸워 패배한 후 세실의 부하가 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마하임 자신이 끼어들면서 미래가 바뀌어 버린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된 것이군.”

마하임은 무릎을 굽히고 다시금 다크엘프의 얼굴을 살폈다.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다크엘프, 안색이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상당한 미모였다.

새하얀 은발에 건강미 넘치는 검은 피부, 가슴도 상당히 컸다. 자신의 아내, 시아라는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할 정도였다.

물론 마하임의 취향과는 좀 동떨어졌지만, 뭐 어떤가? 지금 마하임에게는 엘프든 오크든 단 한 명의 인재가 아쉬울 때였다.

‘이게 행운인지 불행일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구나.’

늦든 빠르든, 미래는 반드시 바뀐다. 아니, 애초에 그가 본 것이 정말 미래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지만, 마하임이 그것을 알고 있는 한 바뀔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 시기가 너무 이르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시간의 흐름은 강물 같은 것, 그 상류에서 일어난 조그만 변화가 미래에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예상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지금 이것저것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우선은 이 다크엘프를 영빈관으로 옮겨 치료해 주는 것이 급선무였다.

마하임은 곧바로 다크엘프를 어깨에 둘러업었다. 얼핏 봐도 다크엘프의 키는 자신보다 컸지만 생각보다는 가벼웠다.

“이쯤에서 돌아가 볼까?”

뒤늦게 이 사태를 파악한 경비병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아마도 오늘 이 소동으로 경비대장인 요한은 밤잠을 설칠 것이 분명했다. 조금은 미안한 생각도 들었지만, 이것 역시 결과론적으로 본다면 영지민을 위한 것이기에 감수해야만 했다.

어쨌거나 이미 목표는 달성했고, 덤으로 다크엘프까지 얻었으니 생각지도 못한 행운임은 틀림없었다.

마하임은 다크엘프를 어깨에 둘러업고 윈드시크릿의 좁고 어두운 골목길로 소리 없이 사라졌다.

* * *

다크엘프와의 일전을 벌인 지도 벌써 3일이 지났다.

일상으로 돌아온 마하임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영빈관의 집무실에서 하루를 시작했다.

“역시 아침의 홍차는 최고로군.”

마하임은 자신의 서재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잔을 들이켰다.

이제 제법 날씨도 추워졌다. 11월 초겨울의 문턱인지라 뜨거운 한 잔의 홍차는 마음까지 따듯하게 해 주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정말 끝이 없구나.”

서재 가득 쌓여 있는 서류 뭉치를 바라보며 마하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것들 대부분은 전 영주가 남긴 숙제 아닌 숙제였다. 꼴에 영주라고 그 씀씀이는 얼마나 헤펐는지 마하임이 파악한 빚만 해도 웬만한 영지의 1년 예산과 맞먹었다.

“이렇게 많은 돈을 어떻게 빌렸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마하임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예 작정하고 한탕 해 먹고 튈 생각이었는지, 차용 증서만 해도 100개는 되는 것 같았다.

당장 어제만 해도 이웃 영지에서 빚을 갚으라고 사람이 찾아왔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일단은 마하임 자신과는 상관없다고 잡아떼 보았지만, 차용증에 찍힌 아르케비니아 왕가의 문장을 보고서는 그저 수긍하는 길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대로 방치해 버린다면 윈드시크릿은 인근 영지와 병합될지도 몰랐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처음에는 사탕무로 어떻게 버텼지만, 이번엔 사탕무라는 카드조차 사용할 수 없었다.

“지금은 버티는 거다. 이제 시작이니까….”

마하임의 눈은 날카롭게 빛났다. 이미 계획은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 세워 뒀다.

하륜이 직접 계획한 것이기에 성공 확률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계획을 실행할 인재 확보만 하면 끝이었다.

똑똑-

갑작스레 들려온 노크 소리에 마하임은 겨우 흥분을 가라앉혔다. 누군지는 이미 짐작은 갔다.

홍차를 한 모금 들이킨 마하임은 평소의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열려 있다. 들어와라.”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은 하륜이었다. 그는 품에 책이며 각종 서류를 한아름 안고 있었다.

“으- 정말 심하군요. 이전 영주는 영지를 다스릴 생각이 전혀 없었나 봅니다.”

멍청한 시골 영주의 등이나 쳐 먹으면서 느긋한 생활을 즐기려던 하륜의 계획은 이미 완전히 틀어져 버렸다.

마하임이 본격적으로 영지를 운영하기 시작하자 연일 야근에 숨 돌릴 틈조차 없었다.

마하임이 각성하고 난 뒤 나름 각오를 하고는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비축해 놓은 식량은 얼마나 남았지?”

“거의 다 떨어졌습니다. 영주님이 드실 것도 이번 달 말이면 똑 떨어질걸요.”

“어쩔 수 없지. 서둘러야겠군. 그 다크엘프는 아직인가?”

“당연하죠. 장 파열입니다. 제가 아니었다면 죽었을 거라고요.”

하륜은 도끼눈을 뜨며 말했다. 3일 전 밤, 마하임이 뜬금없이 데려온 다크엘프는 보통의 인간이라면 즉사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의 큰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하륜은 가망 없다며 포기하자고 했지만, 마하임은 막무가내로 살려 내라며 하륜을 윽박질렀다.

심지어는 저 다크엘프를 못 살리면 죽여 버리겠다고 했으니, 하륜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서러워서 서기관 하겠나….

그리하여 하륜은 눈물의 개복 수술을 무려 6시간 동안 해야만 했다.

변변찮은 수술 도구도, 조수도 없는 상황에서 이런 대수술은 사실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륜은 단순한 서기관이 아니었다. 마하임조차 아직 하륜의 정확한 정체를 알지는 못했지만, 그는 만능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다방면에서 뛰어난 지식과 학식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아르케비니아의 정권을 잡으면 충분히 보상해 주마. 그러니 잔말 말고 잘 치료하도록.”

“네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건 그렇고, 용케도 다크엘프의 생포하셨더군요. 다크엘프는 프라이드가 높아서 생포당할 상황이 오면 자결하는 게 보통인데요.”

“자결할 시간이 없었을 거다. 일격에 쓰러트렸으니까.”

마하임의 말을 들은 하륜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하임의 나노머신 시류에 대한 적응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미 기능 대부분을 완벽하게 컨트롤할 뿐만 아니라 동기화율도 엄청나게 뛰어나 거부 반응조차 없었으니, 지금껏 수없이 나노머신 시류를 시술한 하륜이었지만 정말 듣지도 보지도 못한 케이스였다.

“그럼 전, 다크엘프의 상태나 한번 보고 오겠습니다. 제가 처방한 항생제가 잘 듣는지도 봐야 하니까요.”

하륜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마하임은 다시 서재에 앉아서 두꺼운 서류 뭉치를 다시금 펼쳐 들었다.

해야 할 일은 태산 같았다.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 마하임의 사정상 하륜 외의 서기관이나 행정원을 따로 둘 형편도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전 영주처럼 강제로 주민들을 부리기는 싫었다. 지금은 적을 만들기보다는 아군을 만들어야 할 때였다. 이제 겨우 민심을 얻어 가는 단계에서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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