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자, 맛있는 고등어 3마리가 단돈 3실링. 입니다!”
“이봐요, 손님! 더는 못 깎는다고 해도 그러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닙니다! 2개 사면 1개는 덤! 자, 오세요! 오세요! 놓치면 평생 후회합니다!”
물건을 파는 상인들의 목소리가 좁고 긴 윈드시크릿의 중앙로를 따라 사방에서 들려온다.
이곳은 윈드시크릿의 상업 구역. 시장이 열리는 곳이었다.
며칠 전 마하임과 아나모네와 일전을 벌인 곳도 여기였다. 그 격렬했던 전투의 흔적은 이미 깨끗이 지워져 있었고 거리는 오가는 사람들로 거리는 분주했다.
‘아직 희망은 있어 보이는군.’
마하임은 느긋하게 주위를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세실과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가는 길에 민심도 살필 겸해서 조금 돌아가더라도 이곳에 들른 것이다.
도시의 상황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물건을 파는 사람과 사려는 사람이 뒤엉켜 거리는 활기로 넘쳤다.
마하임이 직접 세율을 관리함은 물론, 비리 척결에 열을 올린 덕분에 다른 곳은 몰라도 상업 구역, 즉 시장만은 번창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반짝 효과일 뿐이라는 것을 마하임도 알고 있었다.
‘물건을 파는 사람보다 사는 사람이 적다니, 좋은 상황은 아니다.’
시장은 그런대로 돌아가고 있었지만, 구조적으로 매우 불안정했다.
전 영주의 실정과 오랜 경기 침체는 윈드시크릿 주민 대부분을 가난하게 만들었고 그것은 곧 구매력 감소를 불러왔다. 더군다나 요 몇 년간 흉작이 계속되어 윈드시크릿은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백작 어르신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어디서 고개를 쳐들고 있냐! 썩 엎드리지 못할까!”
바로 그때 들려온 목소리에 마하임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한 무리의 사람들.
저마다 번쩍거리는 플레이트 메일로 무장한 병사들이 마차 한 대를 호위하며 걸어간다. 금박이 입혀진 화려한 마차는 제법 멀리 떨어진 마하임이 있는 곳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제페쉬 백작, 드디어 납시었군.’
이 윈드시크릿에서 저런 고급 마차를 타고 다닐 사람은 단 한 명, 제페쉬 백작뿐이었다.
그는 윈드시크릿 최고의 재력가이자 이곳에 사는 유일한 귀족이었다.
그의 과거에 대해서는 마하임 역시 아는 것은 별로 없다. 아마도 정계의 암투에서 밀려나 이곳까지 흘러든 듯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백작 정도 되는 귀족이 이런 변두리 성에서 살 이유가 없었다.
‘가관이로구나. 호랑이 없는 숲에 여우가 왕이라고 했던가?’
주위를 돌아보니 땅에 바짝 엎드린 윈드시크릿의 상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요즘 왕도에서도 이런 광경은 보기 힘들다. 마하임은 순간 화가 치솟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그의 노예 수송단을 턴 지 아직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다. 지금 눈에 띄는 짓을 했다간 마하임 자신이 범인이라는 것을 자인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물론 제페쉬를 지금 이 자리에서 죽여 버려 화근을 미리 제거하는 방법도 있었다.
호위 병력이라고 해 봤자 고작 10명. 보아하니 아나모네의 용병단보다 실력이 좋은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방법은 여러모로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좀 더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라면 제페쉬라는 인재는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외교력과 인맥에 관해서라면 그를 따라올 인물은 아르케비니아 왕국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페쉬, 그는 마하임의 오른팔인 요한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조금만 기다려라, 제페쉬. 널 위해 두 번 다시 잊지 못할 화려한 이벤트를 만들어 줄 테니.’
상업 지구를 벗어난 마하임은 곧장 세실과의 약속 장소인 은빛화살 주점으로 향했다.
은빛화살이란 윈드시크릿에서 가장 오래된 주점 중 하나였다. 미래의 기억 속의 자신은 이곳에 종종 드나든 것 같은데, 지금은 그럴 여유도, 시간도 없었기 이번이 처음이었다.
“여긴 여전하구나.”
늦은 오후 황혼이 드리운 은빛화살은 제법 운치가 있었다. 주점치고는 드물게 3층 건물로 지어진 이곳은 도시의 외곽인데도 불구하고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당시에는 그저 그렇거니 하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이곳은 단순한 주점이 아닐 가능성이 컸다.
주점에 다가가자 나무로 만든 낡은 여닫이문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안에서는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섞여 은은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마하임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주점 안으로 들어갔다.
끼이익-
주점 안의 후끈한 열기가 마하임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초겨울 밖은 꽤 쌀쌀했지만, 안은 뜨거운 열기가 후끈하게 느껴질 정도로 더웠다. 마하임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팔에 걸치고 주점 안으로 향했다.
주점 안의 구조는 이미 익숙했다.
왼쪽 옆으로는 카운터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대여섯 명이 어울려 무언가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고, 건물 중앙 곳곳에 배치된 둥근 탁자에도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북쪽으로 길게 뻗은 건물의 끄트머리에 꾸며진 무대에서는 음유시인으로 보이는 금발의 여성이 튜트를 튕기며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어둠. 그리고 빛이 교차하는 곳
누가 그것을 어둠이라고 했나요.
누가 그것을 빛이라고 했나요.
흩어진 이 혼돈 속에서
나 홀로 하늘을 바라봅니다.]
어디서 들은 노래일까? 노랫말이 상당히 귀에 익은 곡이었다. 마하임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넋을 잃고 그 노랫소리에 빠져들었다.
[빛보다는 어둠이, 희망보다는 절망이 더욱 가까이 느껴지지만.
나 그대와 함께 있기에, 그대 나와 함께 있기에.
슬퍼하지 마세요. 절망하지 마세요.
아직은 하늘을 바라볼 수 있잖아요.]
잔잔하면서도 그 속에 흘러넘치는 강렬한 메시지에 술에 취한 사람들조차 이 순간만은 잔을 놓았다.
노래는 점점 클라이맥스에 다다랐고, 튜트의 은은한 소리도 경쾌한 리듬으로 바뀌어 갔다.
[자, 두 손을 모아요. 의지를 담아 희망을 담아.
이제는 눈을 뜰 때.
차디찬 밤의 저편에 따스한 아침이 있듯이.
희망은 항상 절망의 저편에 있는 법.
자 이제 눈물은 그만, 우리 손을 잡아요.
눈부시도록 찬란한 그날을 향해….]
노래가 끝나자 주점이 떠나갈 정도의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음유시인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무대 뒤편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박수 소리는 끊이지 않았고 마하임은 노랫소리에 취해 굳은 듯 서 있을 뿐이다.
그렇게 얼마나 서 있었을까? 누군가 마하임에게 말을 걸어왔다.
“마담 언니의 노래 정말 좋죠?”
마하임은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이곳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반인반마의 켄타우로스족 소녀가 마하임을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켄타우로스족은 상반신은 인간이 이었지만 그들의 하반신은 보통의 말이나 다를 바 없었다.
4개의 다리와 살랑살랑 흔들리는 긴 갈퀴의 꼬리는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신기했다.
“식사하실 건가요? 아니면 술?”
분홍빛 셔츠에 새하얀 앞치마를 두른 소녀는 한쪽 손에는 쟁반을 들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드워프만큼이나 우직하기로 명성이 자자한 켄타우로스족도 어린 소녀만큼은 매우 귀여웠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 마하임 자신이 구해 준 노예들이 생각이 났다. 그들 중에도 딱 이 소녀 또래의 켄타우로스를 본 기억이 있었다.
과연 그들이 무사히 피했을까? 세실을 만나면 꼭 물어봐야겠다고 마하임은 생각했다.
“손님?”
“아, 미안 맥주와 간단한 안주 좀 부탁하지.”
“네 선금이고요. 30실링입니다.”
1골드는 일반 노무자의 한 달 월급이었고, 100실링이 1골드인 것을 고려할 때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이었다.
그만큼 음식물 가격이 폭등했음을 의미했다. 이는 마하임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좀 비싸군.”
“무슨 말씀을. 요즘 물가가 얼마나 치솟는데요. 그나마 우리 가게는 싼 거예요. 이웃집 가게는 한번 가 보세요. 얼마나 받는지.”
“…….”
마하임은 그 이상 묻지 않고 주머니에서 50실링짜리 동전 하나를 꺼내 들어 소녀의 손에 들려 주었다.
“나머진 팁이다.”
“와핫~ 감사합니다.”
두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꾸벅 쑥이며 인사하는 켄타우루스족 소녀. 그녀뿐만 아니라 이곳에 있는 사람들 대다수가 아인종이었다.
맞은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자들은 드워프에 건장한 덩치와 이마에 불쑥 솟은 외뿔을 자랑하는 노움족도 보였다.
윈드시크릿에서 엘프나 드워프 같은 아인종을 보는 것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여기처럼 한곳에 모여 있는 것을 보기는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요 녀석, 팁을 받으면 안 된다고 했을 텐데.”
“이잉- 죄송해요.”
갑작스레 나타난 여성 한 명이 켄타우로스족 소녀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소녀는 머리를 감싸 안으며 고통스러워했다. 제법 묵직한 소리가 난 것을 볼 때, 엄살을 부리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어서 주문받아 와! 거스름돈 잊지 말고.”
“네에….”
시무룩한 표정의 소녀. 그녀는 힘없이 카운터로 너털너털 걸어갔다. 소녀가 카운터로 가서 조리원에게 주문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 그녀는 마하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음유시인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파란색 두건으로 얼굴에서부터 어깨까지 칭칭 감고 있었다.
몸에 착 달라붙는 볼륨감 있는 겉옷과 짧은 스커트가 아니라면 여자인지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대는, 방금 그 음유시인?”
“아아, 이건 그냥 작업복 같은 거야. 어때? 내 노래. 꽤 괜찮지 않아?”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마하임은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세실 일리암스였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노래가 귀에 익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륙 연합과의 치열한 전쟁의 와중에서 잠시라도 휴식을 취할 때면 그녀는 어김없이 노래를 불렀다.
방금 부른 곡도 아마 그 노래 중 하나일 것이다.
특별한 이능의 힘이 깃들어진 것도 아니었지만, 이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었다. 죽어 가던 병사들조차도 이 노래를 들을 때만큼은 고통을 잊을 수 있었고.
세실은 얼굴을 감고 있던 두건을 풀었다. 그러자 황금색으로 넘실대는 긴 머리칼이 가장 먼저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마하임도 금발이긴 했지만 세실만큼이나 선명하진 않았다.
“휴우. 자, 그럼 우리 영주님께서 나한테 뭘 받아 가시려고 이런 누추한 곳까지 찾아왔는지 들어볼까?”
세실은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을 가볍게 닦아 내며 말했다. 10년 후의 미래에서 보았을 때나 지금이나 그녀의 아름다움은 여전했다.
다크엘프인 아나모네 역시 상당한 미인이었지만, 세실 역시 그에 비해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아나모네가 차갑고 날카로운 이미지라면 그녀는 천진난만한 소녀같이 순수한 느낌이었다.
물론 그것은 전장이 아닌 일상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전장에서 그녀의 모습은 시아라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사신.
대해적과 더불어 금발의 사신이라는 별칭이 괜히 붙은 것이 아니다.
“여기선 곤란하다. 장소를 옮기지.”
“괜찮아,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지금 이곳에 ‘인간’은 영주 너밖에 없거든.”
이미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지금 이곳에는 인간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아니 틀림없이 이곳은 세실의 아지트임이 틀림없었다.
세실이 손뼉을 두 번 치자 열려 있던 입구의 문도 스르르 닫히더니 묵직한 소리와 함께 빗장까지 걸렸다.
“참고로 말하는데, 나는 지금 기분이 별로 안 좋거든.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조심하는 것이 좋을 거야.”
“참고하지.”
대놓고 살기를 뿜어내는 세실을 향해 마하임은 담담히 대답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