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이미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는 예상했기에 그다지 새로운 것도 없었다. 그러나 과연 그녀가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것인가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주문하신 맥주랑 안주 나왔어요.”
갑작스럽게 들려온 귀여운 목소리에 팽팽하던 긴장감이 단숨에 깨어졌다.
맥주와 안줏거리가 담긴 쟁반을 든 켄타우로스 소녀가 다가오자 세실의 살기는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그녀의 살기에 눌려 눈치만 보던 아인종들도 그제야 다시 술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마담 언니. 가뜩이나 장사도 안 되는데 가게에서 살기나 뿜어내고. 대체 무슨 짓이에요! 지난달에도 적자인 거 알아요, 몰라요?”
“아아, 미안. 미안.”
“혹시라도 가게 안에서 싸움박질이라도 하는 날엔 알아서 하세요!”
쾅-!
그녀는 맥주잔과 해산물로 만든 안주가 담긴 그릇을 마하임과 세실의 앞에 힘껏 내려놓고서는 뒤돌아서 성큼성큼 카운터로 돌아갔다.
“거스름돈은 주고 가야지. 로한나.”
“아이, 그런 건 좀 잊어 달라고요. 정말 마담 언니는 장사할 줄 모른다니까!”
다시 돌아온 로한나는 10실링짜리 동전 2개를 마하임 앞에 내려놓고서는 얼굴이 빨개져 2층으로 사라졌다.
마하임은 웃지도, 그렇다고 심각한 표정도 짓기도 뭐해 그냥 멍하니 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세실 역시도 조금은 당황스러운 모양인지 자신의 귓불 사이로 흘러내린 머리칼만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한동안 둘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저 애가 누군지 알겠어?”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세실이었다. 마하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세실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네가 구한 노예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애야. 다른 녀석들은 ‘락슌’의 금단 증상을 못 견디고 모두 죽어 버렸거든.”
그녀의 간략한 설명에 마하임은 말없이 침묵했다.
‘락슌’. 대륙의 마도사들이 만든 최악의 마약이다. 만들기도 어렵고 가격도 비싸서 구하기는 어렵지만, 최면과 세뇌에 이보다 탁월한 약도 또 없었다.
그래서 고가의 노예들을 이 마약으로 세뇌시켜 주인에게 복종시키는 것이 관례 아닌 관례였다.
“저 애도 과거의 기억은 하나도 없어. 자아도 거의 붕괴한 상태였고. 어쩔 수 없어 ‘마법사’의 도움을 좀 빌렸지.”
대충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은 갔다. 기억을 강제로 심는 마법의 존재는 마하임도 들은 바 있다.
하지만 그런 정신계 마법을 쓸 정도의 마법사라면 최소 대마법사급의 능력을 지닌 자일 텐데, 윈드시크릿에 그런 마법사가 있다는 이야긴 들어본 바 없었다.
‘누굴까?’
몹시도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물어볼 분위기가 아니었다. 세실은 마하임을 바라보며 다시금 말을 이었다.
“어이 영주. 왜 인간들은 노예가 필요한 걸까? 엘프들도 드워프들도, 심지어는 리자드맨들도 노예는 만들지 않아. 그런데 왜 인간들은, 자신의 동족조차 노예로 삼아 학대하는 걸까? 한번 생각해 본 적 있어?”
비록 아르케비니아에서는 불법이라고 하더라도 대부분 국가에서는 아직도 노예 제도가 성행 중이었다.
그리고 아르케비니아 역시도 법으로만 정해져 있을 뿐이지, 암암리에 노예 거래는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미래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인 현실. 마하임은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땠다.
“그것은 인간의 나약해서다. 그래서 탐욕과 지배욕으로 그 나약함을 채우려 한 결과겠지.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마하임 자신도 한때 노예 제도는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아인족은 인간들보다 열등하며 그들을 노예로 삼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 적도 분명 있었다.
그러나 시아라를 만나고, 그리고 수많은 전쟁의 끝에서야 마하임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들 역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그들은 최후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지켜야 했던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호오, 넌 꼭 ‘인간’이 아닌 것처럼 말하네?”
“노예는 나약한 인간들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나는 강하다. 내가 필요한 것은 노예가 아닌 백성뿐이다. 다시 한번 말한다. 내 영지에는 ‘백성’이 있을 뿐. 노예는 존재하지도 존재해서도 안 된다.”
마하임은 목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것은 마하임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세실은 그런 마하임을 마치 신기한 장난감이라도 찾은 것처럼 바라보았다. 위아래로 훑어본 마하임의 외모는 이제 막 소년의 티를 벗은 그저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그런데도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범상치 않다. 세실은 애써 그것을 무시하고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런 영주님께서 제페쉬는 왜 그냥 내버려 두는 걸까?”
“내버려 둘 생각 없다. 그 때문에 내가 여기에 온 거다.”
마하임은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세실에게 던졌다.
이건 또 무엇일까? 마치 생일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세실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고 종이를 펼쳐 보았다.
“영주 너, 설마!”
“그래. 그 설마다. 앞으로 2일 뒤. 제페쉬 백작의 저택에서 대규모 노예 시장이 열린다. 바로 그날 제페쉬를 친다.”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더는 미룰 수도 미루고 싶지도 않았다. 넋이 나간 듯 종이에 시선을 빼앗긴 세실을 향해 마하임은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윈드시크릿의 위기는 너도 잘 알 테지. 영지는 가난하고, 도움을 구할 곳은 없다. 올겨울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굶어 죽을지 생각해 봤나?”
“그래도 이것은 너무 황당한! 너 다른 나라에서 온 귀족들까지 죽여 버릴 생각이냐?”
마하임이 준 종이에는 3일 뒤 제페쉬 백작의 저택 습격 계획과 이에 따른 행동 지침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물론. 윈드시크릿에 있는 이상, 윈드시크릿의 법을 따라야 한다. 노예를 사러 왔으면 응당한 대가를 치를 각오를 했다는 것이겠지. 그들이 가져온 재화는 모조리 압수해 영지의 기반을 닦는 데 쓸 거다.”
“미쳐도 제대로 미쳤네. 잘못되면 영지전까지 각오해야 해!”
“잘못될 리 없다.”
마하임은 확신에 차 있었다. 사실 이 계획의 초안은 원래 세실 그녀가 짠 것이니까. 거기다 하륜이 튜닝까지 했으니, 계획 자체는 완벽 그 자체였다.
물론 시기상으로 훨씬 더 시간이 흐른 5년 뒤에나 일어날 일이었지만, 이 계획이 성공했기에 마하임은 최소한의 군비는 비축할 수 있었다.
“무리야. 무리. 제페쉬 백작의 호위병은 둘째 치더라도, 다른 영지에서 온 귀족들의 호위 병력까지 상대해야 한다고.”
“그래서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다.”
“거부하겠어. 이건 기름통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드는 짓이야! 나의 부하들을 그런 위험에 노출시킬 수는 없어.”
세실은 단호히 거부했다. 그녀라고 제페쉬 저택을 털 계획을 세워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실천에 옮긴 적은 없었다.
일단 제페쉬의 저택은 성곽을 연상시킬 정도로 튼튼한 벽으로 보호되고 있었고, 그가 직접 고용한 용병들로 경계도 삼엄했다.
평소에도 위험천만한 곳인데, 노예 시장이 열리는 당일에 제페쉬의 저택을 털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좋아. 백번 양보해서, 일개 영주가 영지전을 불사하고 이런 무모한 짓을 하려는 이유가 뭐야?”
세실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어느 날 뜬금없이 나타난 저 영주가 하는 일이란 하나같이 이상한 일들뿐이었다.
지금까지 이곳을 거쳐 간 영주란 것들은 전부 자신의 몸보신에 바빴다.
그러나 저 영주는 달랐다. 약탈은커녕 수탈에 시달리던 주민이 일으킨 폭동조차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무마시켜 버렸다.
그토록 악랄하게 걷어 가던 세금도 대부분 그쳤다. 그리고 이어진 부정부패의 척결. 영주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지만, 그 누구도 하지 않았던 그런 일들을 마하임 하고 있었다.
“무모하다라, 그래.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너도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안다면 나처럼 될 수밖에 없을 거다.”
“얼씨구. 무슨 용한 점쟁이라도 만난 모양이야?”
“점 따위는 믿지 않는다. 다만….”
“다만?”
마하임은 잠시 말을 끊었다. 자신이 경험한 미래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사실 난감했다. 잠시 말을 끊었던 마하임은 무겁게 말을 이었다.
“…나는 꿈을 꿨다.”
“꿈?”
“그래. 꿈이다. 그 꿈은 미래의 꿈이었다. 내가 이런 무모한 짓을 하지 않은 바로 그 미래의 꿈.”
아르케비니아 왕성이 불타고 윈드시크릿이 함락되던 그날 밤. 마하임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들은 대륙 연합의 병사들에게 짓밟혔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그래 그 꿈 때문에 이 무모하다 못해 황당한 일을 벌이려고 하려는 거야? 이봐, 정신 차려 영주. 꿈은 꿈일 뿐이라고.”
“그래, 그저 덧없는 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꿈에서 나는 그 무엇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 내가 지키고자 하는 것들은 어김없이 불타오르고 내가 구하고자 하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모두 죽어 버렸지.”
지금 생각해도 그 기억들은 너무나 선명해 현실보다도 더 현실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이 꿈이건 현실이건 지금의 마하임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지금 이 ‘무모한 짓’을 하지 않으면 그 꿈속의 미래가 현실이 된다는 강박뿐이었다.
“유감스럽지만 그 빌어먹을 꿈속에는 너도 있었다. 불타오르는 아르파의 기함 ‘가리온’을 이끌고 윈드시크릿으로 망명한 하이엘프 일족의 마지막 황녀, 세실 일리암스가 말이지.”
마하임의 말에 세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가출이나 다름없이 고향을 떠나 스스로 하이엘프임을 버리고 산 지 10여 년. 그것은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세실 만의 비밀이었다.
그런 비밀을 저 마하임이란 영주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그걸!?”
“귀를 자른다고 ‘하이엘프’가 인간이 될 수 없지.”
그것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세실의 비밀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하이엘프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뾰족한 귀마저 잘라 버렸다.
그리고 스스로도 인간보다 더 인간처럼 살아온 세실이었다.
“세실 일리암스. 너도 나와 같은 운명을 지니고 있다. 지금부터 움직이지 않으면 늦다. 머지않아 대륙 연합은 움직인다. 자치령이니 중립국이니 해도 ‘아르파’의 패망은 시간문제다.”
마하임이 알고 있는 미래의 대륙 연합은 세계의 정화를 부르짖으며 아인종을 포함한 모든 인류를 탄압하고 학살했다.
그것이 앞으로 몇 년 안에 벌어질 일. 시간은 절대 많지 않았다.
“닥쳐라!”
챙-!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그녀의 검이 마하임의 목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그러나 마하임은 조금도 놀란 기색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을 따름이었다.
“난 진실을 말한 것뿐이다.”
“진실? 웃기지 마. 네놈의 잠꼬대 같은 꿈 이야기가 미래에 일어날 일이라고? 그걸 나보고 믿으란 이야기야?”
“믿든 말든 상관없다. 다만,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뿐!”
챙-!
마하임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뽑았다. 그의 검은 세실의 검을 단숨에 밀어내고 그녀가 조금 전 마하임에게 한 것처럼, 세실의 목 바로 아래까지 깊숙이 파고들어 멈춰 있었다.
“좋아. 마음에 드는데, 영주. ‘정의’조차도 승자가 만드는 세상 아니겠어? 나와 싸워 이겨 봐. 네가 이기면 원대로 제페쉬 백작을 치는 데 도와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