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그녀와의 일전은 피할 수 없음을 마하임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미래의 기억 속에서도 세실이 마하임의 동료가 된 계기가 된 것은 시아라와 세실, 둘 간의 목숨을 건 결투가 있었던 뒤부터였다.
지금이라고 이것이 달라질 이유는 없었다. 문제는 여기서 마하임이 그녀를 이길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었다.
‘이길 수 있을까?’
그녀의 전성기 실력은 시아라와 호각. 만약 그 실력대로라면 마하임이 이길 가능성은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하지만 그때는 전쟁 중이었고 지금의 세실 일리암스에게는 그 전장의 처절함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마하임이라고 그냥 이곳에 온 것은 아니었다.
마하임에게는 나노머신 시류와 오페라의 서포터가 있었다. 그리고 그 외에도 세실을 위해 준비한 비장의 한 수가 있었기에 마하임으로서는 지려야 질 수 없는 싸움인 것이다.
“그럼 사양치 말고, 죽어!”
마하임의 검을 자신의 검으로 밀치며 세실은 놀라운 속도로 마하임의 심장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마하임은 순간 움찔하지만, 그저 단순한 찌르기 공격이었다. 저런 공격은 검으로 쳐 내 막으면 그만이었다.
[경고, 고농도 정령 반응 확인.]
“알고 있다!”
오페라의 말에 마하임은 짧게 대답했다. 평범해 보이지만 저것은 절대 평범한 공격이 아니었다.
여기서 저 검을 막으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정령의 힘이 담긴 검, 즉 정령검은 물리적인 힘으로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막을 수 없다면, 피하면 그만!”
순식간에 x5로 오버클럭한 마하임은 세실의 검을 가까스로 피했다.
오페라의 공격 예측 시스템이 없었다면 절대 피할 수 없을 정도로 공격은 날카로웠다. 하지만 안심하긴 일렀다. 세실의 검의 집요하게 마하임을 뒤쫓았기 때문이었다.
부웅-!
세실의 검이 마하임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허공을 가르는 기분 나쁜 진동. 어깨가 잘려 나가는 듯한 고통에 마하임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칫, 역시 강하군.’
마하임은 이 기술에 대해 세실 만큼이나 잘 알고 있었다. 무려 3년 이상 매일이다시피 전장에서 등을 맞대고 같이 싸운 전우의 기술을 모를 리 없었다.
하이엘프들은 타고난 정령사들이다. 그중에서도 세실의 능력은 탁월해서 물체에 정령을 직접 빙의시켜 속성을 부여할 수 있었다.
아마도 지금 저 검에 빙의된 것은 바람의 정령 실프. 생명이 깃든 모든 것을 절단하는 궁극기.
제아무리 튼튼한 방패도 저 공격은 막을 수 없었다. 검 자체를 바람의 정령으로 변화시켜 생명의 본질을 공격했기에 물리적인 방법으로 이것을 저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무적의 기술이란 존재하지 않는 법.’
정령에 빙의된 검은 모든 물리력을 무시하지만, 그것은 곧 상대의 물리 공격에 대해 방어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막을 수 없다면 오직 공격만 있을 뿐이다!’
마하임은 뒤로 물러나는 척하다가 갑자기 세실을 향해 달려들었다.
공격을 막을 수 없다면 공격을 하면 되는 것이다. 비록 그녀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겠지만 세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두둑한 배짱과 죽음을 각오한 결단력뿐.
“죽어 보자, 세실!”
마하임은 세실의 공격을 무시한 채 검을 앞세우고 돌진했다.
“이 멍청한 영주가!”
세실은 깜짝 놀라 검을 물리고 뒤로 물러섰다. 그대로 싸웠다면 세실의 승리는 분명했지만, 그녀 역시 치명상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명분도, 실리도 없는 싸움에서 목숨을 걸 만큼 그녀는 어리석지 않다. 검을 고쳐 잡은 세실은 재빨리 마하임과 거리를 벌렸다.
“그 정도로 날 죽일 수 있겠나?”
“하- 정말 어이가 가출하시겠네. 내 정령검도 알고 있는 거야?”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난 꿈에서 ‘미래를 보았다’라고.”
“아직도 그 꿈 타령이냐? 정신 좀 차려, 영주. 네가 열심인 건 아는데 이번 건 좀 아니야!”
세실이라고 특별히 마하임에 대해 악감정은 없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마하임처럼 ‘영주’다운 영주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 사실이었다.
마하임이 영주로 부임해 온 지난 석 달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물론 세실이 주업이라고 할 수 있는 암시장은 조금 힘들어졌지만, 부업으로 하는 수송업이라든지 은빛화살 등의 수입은 오히려 늘었다.
이대로 간다면 굳이 무리해서 암시장을 굴릴 필요가 없을지도 몰랐다.
“그 정도는 나도 안다. 그러나 이대로는 그 무엇도 지킬 수 없다.”
“그게 목숨보다 더 중요해? 왜 그렇게 자신의 목숨을 막 굴려? 죽으면 다 끝이라고.”
세실은 질렸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선 저 영주는 세실이 싸워 본 그 어떠한 자들과도 달랐다.
이능의 능력도, 탁월한 무력도 그에게서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것을 뛰어넘은 그 무엇인가가 마하임에게선 느껴졌다.
“죽으면 끝이라고? 정말 그럴까? 나는 죽는 것보다 더 괴로운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 미래의 악몽. 그 끔찍한 진실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지금 자신이 하지 않으면, 그 모든 것이 현실이 된다. 그것이 미래를 경험한 마하임의 진실이었다.
“너도 있을 텐데. 설령 죽더라도 지키고 싶은 것 말이지.”
“유감스럽게도 내게는 그런 것이 없는걸?”
“정말 그럴까? 네게도 지킬 것은 있다. 이대로라면 분명 너도 보게 되겠지. 네 동생 리나 일리암스가 제국의 황제에게 범해진 뒤 죽임을 당하는 것을 말이지.”
세실, 그녀가 윈드시크릿에 귀화한 그날 밤. 마하임은 불타오르는 아르파의 기함 위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제 동생의 시신 앞에서 울부짖는 그녀를 보았다.
바로 그날, 해적왕 세실 일리암스는 금발의 사신이 된다.
“닥쳐! 어디서 그런 막말을!”
어째서 마하임이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녀를 분노케 한 것은 마하임이 말하는 모든 것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점이었다.
제국과 아르파는 해묵은 갈등으로 벌써 몇 차례의 전쟁을 치렀다. 그 결과는 일방적인 패배였다.
세실이 자신의 귀를 잘라 버리고 동생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밖에 없었던 것도, 리나가 원치 않은 여왕의 자리에 오른 것도 모두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이었다.
“막말? 이미 아르파는 제국의 반식민지가 아니었던가? 이제 약 4년 남았다. 어쩌면 더 빠를지도 모르지.”
세실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살기, 그리고 그와 함께 붉게 빛나는 투명한 물 덩어리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중급 물의 정령소환이 감지되었습니다. 소환 완료 예정 시간 앞으로 5초.]
‘제길! 운디네인가? 그렇다면!’
세실의 주특기인 물의 정령 소환. 저것은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워터캐넌’이 틀림없었다.
그 위력은 공성 병기에 버금갔다. 게다가 저것은 매직 미사일처럼 목표물을 끝까지 추적하는 최악의 기술이었다.
“영주, 네가 말한 그 미래를 바꿀 만한 능력이 네게 있는지 내가 시험해 주지. 가라, 운디네!”
세실의 외침에 함께 붉게 빛나는 물 덩어리들이 마하임을 향해 쏘아졌다.
알고 있던 만큼의 위력은 느껴지지 않지만 저걸 맞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점은 똑같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날아오는 속도가 비교적 느리다는 것. 그렇다면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오페라! 시류 x10 5초 한정 기동!”
몸에 엄청난 부하가 가해지겠지만, 지금 여기서 이걸 사용하지 않으면 패배는 확정이었다.
마하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오페라는 마하임이 현재 사용 가능한 최대 오버클럭 x10을 구현했다. 그리고, 시간은 멈췄다.
‘역시, 이건 기분 나쁘군.’
지독한 적막이 순식간에 마하임의 오감을 마비시켰다. 주위의 모든 것들의 움직임은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멈춰 있었다.
정확히는 멈춘 것이 아니라, 마하임의 뇌 연산 속도와 신체 시계 자체가 10x10, 즉 100배 이상 순간 향상되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 3초.]
“충분하다!”
쿵!
묵직한 충격음과 함께 마하임은 무서운 속도로 세실을 향해 돌진했다.
세실은 마하임의 움직임을 보지도 못했다. 마하임은 단숨에 워터캐넌의 사정권을 벗어나 세실과의 거리를 제로로 만들어 버렸다.
“뭐, 뭐야!”
세실은 마하임이 순식간에 사라져 자신 앞에 나타나자 경악했다. 이런 기술이 있다는 이야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마하임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세실을 향해 오페라를 발도했다.
쓔아악! 쩡-!
검과 검이 부딪치는 묵직한 울림. 마하임의 회심의 일격은 세실의 검에 의해 어이없이 간단히 막혔다.
원래라면 설사 막았다 하더라도 2차 충격으로 날아가 버렸어야 했다. 그러나 세실은 미동도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중급 땅의 정령 소환 확인. 2차 공격에 유의해 주십시오.]
“역시 단순한 눈속임으로는 안 되는군.”
마하임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이번 일격으로 어떻게든 세실을 전투 불능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그것은 마하임의 희망 사항에 불과했다.
“정말 서프라이즈한 이벤트였어. 하지만 그 정도로 날 이길 순 없을걸?”
세실의 검에서 피어오른 노란색 아지랑이가 흐릿하게 보였다. 그녀의 검에는 이미 땅의 정령이 빙의되어 있었다.
바람의 정령이 물리력을 무시하는 것이라면 땅의 정령은 중력을 제어했다.
세실의 검이 마하임의 검과 부딪히는 순간 그녀의 검에 빙의한 땅의 정령 ‘노움’은 세실의 몸에 평소의 10배 이상의 질량을 부여한 것이다.
결국 마하임은 커다란 바위를 검으로 내려친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 되고 말았다.
“과연 그럴까? 널 쓰러트리기 위해 준비해 놓은 이벤트는 얼마든지 있다!”
“보나마나 또 잡다한 눈속임이겠지. 슬슬 지겨워지니까 이쯤에서 끝내자, 영주!”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게 말은 했지만 세실의 등은 이미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단 1초라도 정령 빙의가 늦었다면 자신의 검과 함께 허리가 두 동강 났을지도 몰랐다.
“그럼 신세 진 것은 돌려줘야겠지?”
세실의 검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람의 정령 실프가 다시 소환됐음을 의미했다.
마하임의 등 뒤로는 아직도 워터캐넌의 붉은 물방울이 서서히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 어떡해서든 반격을 해야 했지만, 방금 공격이 막힌 여파로 팔에 가해진 충격이 너무나 컸다.
사실 지금 이렇게 검을 들고 있는 것조차 기적에 가까웠다.
“영주, 넌 약해. 매번 목숨을 던져 싸우지만,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너라는 존재는 그저 무력할 뿐이지. 봐, 나조차도 못 이기는데 미래를 바꾼다고? 겨우 그 정도의 힘으로? 웃기지 마. 넌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일 뿐이야.”
그리고 그것은 세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국의 손아귀에서 고향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사력을 다했다.
그러나 제국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그녀의 이런 노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패배와 패배 끝에 귀까지 자신의 손으로 자르는 수모를 당하며 여기까지 왔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 네 말대로다. 나는 약하다. 내가 본 미래에도 그랬고,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지.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나는 약하지만, ‘우리’는 강하다. 아나모네!”
“존명!”
마하임의 외침과 동시에 그의 그림자 속에서 검은 인형(人形)이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