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다크엘프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전설적인 기술, 그림자 은신술이었다.
“다, 다크엘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아나모네의 등장에 세실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나모네는 거침없이 세실을 향해 검기로 번뜩이는 검을 날렸다.
까앙-!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로 주위가 쩌렁쩌렁 울렸다. 세실은 가까스로 다시 한번 더 땅의 정령을 소환해 검에 빙의시켜 아나모네의 검을 막았다.
그러나 세실이 잊은 것이 하나 있었다. 검기는 정령술 파괴에 특화된 최강의 기술이란 점이었다.
“이런 망할!”
땅의 정령은 순식간에 소멸되어 버렸고, 세실은 그 반동으로 뒤로 튕겨졌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아 땅에 처박히는 것만은 피할 수 있었지만, 이때의 충격으로 그녀가 소환한 워터캐넌도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다.
“다친 곳은 없나? 루.”
“덕분에.”
마하임은 짧게 대답한다. 아나모네는 검기를 흩뿌리면서 마하임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세실은 자신의 검을 움켜쥐고서는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얼굴에서 지금까지의 여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특히 정령과 동기화 중이었던 터라 검기로 인한 정령 소멸은 생각 이상으로 큰 타격이었다.
“아야야, 역시 검기는 제일 싫어.”
극심한 두통에 세실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누군가 망치로 머리를 때리는 것만 같았다. 아나모네는 그런 세실을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루, 명령하라. 오늘 저 빌어먹을 도둑고양이와 사생결단을 내겠다.”
노골적으로 적대심을 드러내는 아나모네. 이 둘은 이전에도 몇 번 겨뤄 본 적이 있는 상대였다.
마하임에게 패하기 전, 용병으로 일하던 아나모네는 돈이 되는 일은 닥치는 대로 했다.
그러다 보니 아나모네의 주업은 노예들을 운송하는 일이 되어 버렸고, 이것은 세실과의 충돌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할 생각인가? 세실.”
마하임은 검을 치켜들며 말했다. 그를 본 세실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무래도 아주 귀찮고 위험한 일에 말려든 것 같았다.
물론 영주가 자신에게 의뢰가 있다고 말할 때부터 이렇게 될 것을 짐작은 했지만, 이 정도로 무모한 짓을 벌일 줄은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거부한다면?”
세실은 차갑게 마하임을 향해 쏘아붙였다. 그녀로서는 아쉬운 것이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거부하면 그만이었다.
“그렇다면 넌 나의 적이다.”
이 말을 들은 마하임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마하임의 말에 세실은 저도 모르게 실소가 흘러나왔다.
“적? 적이라고? 겨우 다크엘프 한 명 데려왔다고 영주가 내 적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세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점 2층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의 것과는 동떨어진 이질적인 소리들. 마하임은 단번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크르릉, 뭐냐 족장. 은빛화살에서 싸움은 금지라면서! 크르르르.”
“크릉 싸움. 우리도 끼워 주라. 카라르르르!”
“적이다, 싸움이다-! 케에에엑!”
녀석들은 다름 아닌 리자드맨이었다. 주점이 소란스러워지자 숨어 있던 녀석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녹색의 피부에 2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덩치. 이들이 2층 계단에 나타나자, 계단이 순간 꽉 막힌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마하임은 말없이 녀석들을 노려봤다. 그 미래의 기억 속에서는 아군이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세실의 말 한마디면 저 리자드맨들은 단숨에 적으로 변할 것이다.
리자드맨들은 큰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순식간에 주점 아래까지 내려와 마하임 주변을 서성였다.
“루, 위험하다.”
아나모네는 마하임의 앞을 가로막으며 검기의 농도를 더욱 진하게 만들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이었지만 상당한 수의 리자드맨 때문에 너무나 긴장해 아나모네는 머리칼이 곤두서는 듯했다.
“뛰는 놈 위에는 나는 놈이 있기 마련이지. 안 그래?”
세실의 말에 마하임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그런 마하임을 세실은 재미난 장난감이라도 찾은 듯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7:3”
바로 그때 들려온 세실의 목소리. 잔뜩 긴장해 있는 마하임을 향해 세실은 방끗 웃으며 말했다. 마하임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5:5”
“이 망할 영주야! 선금도 없이 신용 거래라고. 게다가 귀족 놈들한테서 뺏은 물건들은 어떻게 다 처분할 거지? 결국 그것까지 나한테 다 시킬 거잖아!”
무려 5장에 걸쳐 빼곡히 쓰여 있는 마하임의 작전 계획서를 집어 던지면서 세실은 말했다.
마하임이 건넨 이 작전 계획표는 생각 이상으로 치밀했다. 처음에는 그저 말도 안 되는 망상이라고 생각했지만 마하임의 계획을 찬찬히 훑어본 결과, 이 당돌한 영주가 호언장담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정보다. 너도 충분히 알 텐데?”
그 종이에는 노예 시장의 구체적인 규모와 참석 인원, 그리고 호위병들의 배치와 총인원까지 세밀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예상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와 대응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정리되어 있었으니 세실로서는 정말 놀랄 수밖에 없었다.
“6:4. 물론 내가 6이다. 싫다면 나 혼자 한다.”
마하임은 딱 잘라 말했다. 영지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약탈한 전부가 있어도 모자랄 상황에서 더는 양보 할 수 없었다.
세실은 마하임을 노려보다 땅을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정말 내가 못 살아. 좋아, 내가 졌다. 졌다고.”
“크릉 졌다? 족장, 우린 아직 싸우지도 않았다.”
“크르르르…. 싸우자! 우리 싸움 좋아한다.”
“시끄럿!”
발끈한 세실의 외침에 기세 좋게 크르렁거리던 리자드맨들이 찔끔했다.
마하임이 제시한 기회. 위험천만하긴 했지만, 그만큼 수입도 확실했다. 마하임의 계획대로만 된다면 몇 년을 벌어야 할 돈을 하룻저녁에 벌 수 있었다.
그녀 역시 돈이 급한 것은 매한가지, 세실은 뒤로 휙 돌아서더니 마하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5.5:4.5”
“…….”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세실. 역시 계산 하나는 철저한 그녀였다.
이 이상 기 싸움을 해선 서로에게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한 마하임은 세실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좋다. 여기선 양보를 하는 게 맞겠지.”
“역시, 영주는 거래할 줄 아네. 자, 파티다! 오늘 여기 이 꼬맹이가 거하게 쏜댄다!”
“크륵 정말?! 이 작은 인간이 사는 거냐?”
“케케에엑! 우리 먹는 거 좋아한다. 케엑.”
다시 소란스러워지는 주점 안. 흥분한 리자드맨들이 날뛰는 바람에 주변은 어수선하기 그지없었다.
마하임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이를 바라보았다. 세실은 피식 웃으며 마하임에게로 다가갔다. 아나모네는 검을 치켜들며 여전히 세실을 경계했지만….
“무슨 속셈이냐? 도둑고양이.”
“쯧쯧, 융통성 없기는. 계약금으로 생각하라고. 같은 배를 탔으니 축배를 들어야 하지 않겠어?”
세실은 이렇게 말하고는 아우성치는 리자드맨들에게로 걸어갔다. 마하임은 그런 세실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할 수 없지. 오늘은 어울려 주는 수밖에.”
주점은 안은 언제 싸웠느냐는 듯 다시금 흥겨운 음악 소리가 다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렇든 저렇든 첫 단추는 대충 끼워진 것 같았다.
여전히 변수는 많았고 앞으로의 일들은 예측 불가능했지만, 오늘은 여기서 만족해도 좋을 듯했다.
* * *
부드러운 어둠이 깔린 조그마한 방. 벽에 걸린 램프는 희미한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화려한 장식 같은 것은 없었지만, 방은 충분하리만큼 깔끔하고 아늑해 보였다. 그리고 이 방의 한구석, 그곳에는 침대에 누워 있는 아름다운 중년 여성과 귀여운 꼬마 아이가 무언가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마하임, 램프 좀 꺼 주시겠어요?”
“웅. 하지만 잠자기에는 아직 너무 이른걸요?”
꼬마는 무언가 맘에 안 드는 것이 있는 모양인지 볼을 불퉁하게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은 아직 해가 저문 지도 얼마 안 된 이른 저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여성은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꼬마의 풍성한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을 뿐이었다.
“그래요. 마하임. 아직은 잠들 수 없죠. 지금은 잠들 시간이 아니라, 먼 미래를 바라볼 시간. 자, 불 좀 꺼 주시겠어요? 이 엄마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으니까요···.”
여성은 힘없이 말을 흩트렸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을 본다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나이가 든 지금도 여전히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이었지만, 이상하리만큼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핏기 하나 없는 차가운 얼굴. 그 얼굴에는 이미 죽음이라는 불청객이 선명한 자취를 드러내고 있었다.
“네, 지금 바로 끌게요. 엄마.”
여전히 알 수 없는 여성의 말에 꼬마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램프가 있는 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키가 작은 그로서는 바로 램프를 끌 수 없었다. 잠시 두리번거리던 꼬마는 근처의 의자를 가져와서야 겨우 램프에 손이 닿을 수 있었다.
꼬마는 자신의 고사리 같은 손으로 램프 바닥에 있는 자그마한 밸브를 돌렸다. 그러자 램프는 천천히 빛을 잃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칠흑 같은 어둠이 내리깔린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 지금 이 엄마가 하는 말 잘 기억해 두세요. 아직은 알 수 없겠지만 먼 미래, 당신의 푸른 성운(星雲)이 지금 여기 펼쳐질 테니까.”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때였다. 마치 이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조그마한 빛의 덩어리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각기 크기도 밝기도 다른 빛들이었지만 그것들은 시간이 갈수록 수를 더해 갔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 빛들은 이 조그마한 방을 넘어 무한한 별의 바다를 이루었다.
“이곳은 사람의 운명이 흘러가는 천구(天球). 모든 운명은 여기서 시작되고 여기 끝난답니다.”
어디가 위인지, 어디가 아래인지조차 구별할 수 없는 별의 바다 위에 그녀는 모든 것을 초월한 듯 두둥실 떠 있었다.
이를 바라보던 마하임은 그 신비한 모습에 완전히 넋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녀는 그러한 마하임을 향하여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어둠으로 가득한 천구, 그 가운데서 유난히 밝게 빛나는 푸른빛의 덩어리를 가리켰다.
“저것은 시공과 운명을 뛰어넘는 푸른 페가수스, 마하임 너의 운명을 상징하는 성스러운 별.”
“페가수스?”
“그래요. 비록 첩에 불과한 저의 소생이지만, 하늘이 정한 천운조차 바꾸는 힘을 지니고 태어났답니다.”
그녀의 눈에는 이미 투명하게 빛나는 액체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자신에게 시간을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으련만, 이제 그녀에게 남겨진 시간은 고작 수분에 불과했다.
“그러나 꼭 기억해 두세요. 당신의 주위에는 언제나 암흑의 ‘흑십자성(黑十字星)’이 함께 한다는 것을.”
한숨을 쉬듯 그녀는 말꼬릴 흐렸다. 찬란히 빛나는 그 푸른 별 주위에는 어느 사이에 나타난 암울한 기운의 적갈색 별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이 별들은 푸른 별을 당장이라도 잡아먹어 버릴 듯 그 위세를 떨쳤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시겠어요?”
이 별들은 그녀의 손길이 닿기가 무섭게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것이 사라지자 푸른 별은 더욱더 밝은 빛을 더해 갔다.
“응. 마하임 약속해.”
꼬마 마하임은 자신의 맑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여성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어느새 그의 곁에 다가온 그녀는 꼬마 마하임의 조그마한 귀에 조용히 속삭였다.
“운명의 빛깔은 청명한 하늘. 부디 그 푸른 상냥함을 잊지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