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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군주-17화 (17/194)

17화

마하임은 눈을 떴다. 어머니의 꿈,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일부러 기억하려 해도 어려운 오래전 일이었지만 마하임의 잠재의식은 이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하긴, 기억 못 하는 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 그날은 마하임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이었으니까.

그의 어머니는 전설적인 점성술사였다.

하늘의 기운을 읽고 미래를 점치는 무녀. 그녀의 예언은 너무나 정확해 각국의 왕들은 대소사가 있으면 어김없이 그녀를 찾아왔다.

그런 그녀가 어째서 아르케비니아 국왕의 후궁이 되었는지는 아직도 수수께끼였다. 이를 묻는 자에게 그녀는 언제나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운명의 별이 그곳에 멈춰 섰으니까요.’

그녀의 말처럼 그것이 그녀의 운명일지는 몰랐지만, 그 운명은 행복과는 인연이 멀었다.

아르케비니아 국왕은 정략결혼을 통해 국가의 안정을 꽤했기에 그녀 말고도 12명의 후궁이 더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왕궁에는 후궁들 간의 세력 다툼이 극심했고, 마하임의 어머니도 자기가 원하건 원치 않건 이 다툼에 말려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독에 천천히 중독되어 결국엔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끝났다.

“언제 잠든 거지? 오래간만에 마셨더니 주량이 많이 줄었군.”

마하임은 아직도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중얼거렸다.

[알코올로 인한 컨디션 저하가 확인되었습니다. 알코올 중화 모드로 이행할까요?]

“후, 괜찮다. 원래 술이란 건 이런 기분을 즐기기 위해서니까.”

오페라의 말에 마하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페라의 서포트는 여러모로 편리하긴 했지만, 조금 귀찮게 느껴질 정도로 간섭을 할 때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결국 마하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큰 불만은 없었다.

“오페라, 넌 대체 뭐지? 엘프들이 말하는 ‘정령’ 같은 거냐?”

스스로 사고하고 계약자에게 지식과 힘을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는 엘프들이 정령 회랑에서 소환하는 정령과 오페라는 유사한 점이 많았다.

하륜에게 들은 바로는 오페라는 고대인이 만든 인공지능이라 했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형식번호 1023.30.22. SSS급 전술 통합 지원 AI 오페라 멘탈 제네시스 시리즈의 오리지널 버전이 저 오페라의 표준 시리얼 넘버라 할 수 있습니다. 본 AI는 지난 578년간 쌓아 온 데이터를 기반으로, 등록된 사용자의 완벽한 생명 유지 및 전술 전략 지원에 최적화된 시스템으로서 탁월한 신뢰성과 안정성으로 지속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습니다]

“됐다. 오페라. 그냥 아는 것으로 치자.”

역시 고대인의 기술로 만든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너무 난이도가 높은 듯했다.

마하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펴보았다. 술이 약한 아나모네는 마하임의 무릎을 베고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마하임 역시 제법 많이 마셔 몸을 가누기도 힘들었지만, 이상하게도 정신만은 또렷했다.

“영주, 혼자서 뭘 그리 중얼거려? 안 자?”

멍한 얼굴로 앉아 있는 마하임을 향해 세실이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그 미래에서도 그랬듯이 세실은 정말 술을 잘 마셨다. 타고난 술꾼 드워프와 술내기를 해서 이길 정도였으니 더는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방금 깼다. 잠시 꿈을 꾼 것 같군.”

최근 잠자리에 들면 어김없이 그 미래의 꿈들이 마하임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그 때문에 잠을 자도 잔 것 같지도 않았다. 며칠씩 잠을 안 잘 때도 허다했다. 그리고 잠을 잔다 해도 4시간 이상 자기가 힘들었다.

“근데 영주, 영주가 봤다는 그 미래 말이야.”

세실은 마하임 곁에 바짝 다가와 앉았다. 그녀의 몸에서 나는 상큼한 과실주 냄새가 마하임의 코를 간지럽혔다.

하이엘프 일족인 만큼 그녀의 미모 역시 보통이 아니다. 흐릿한 주점 안의 등잔불에 비친 세실의 모습은 옛이야기 속에 나오는 여신만큼이나 아름답게 보였다.

“그저 꿈일 뿐이지. 네 말처럼.”

“헤에-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내 미래도 봤다면서?”

“…….”

돌이켜 보면 그 모든 것이, 심지어는 지금 이 순간마저도 모두 꿈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세실의 부드러운 숨소리는 이 모든 것이 현실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뭐 좋아. 영주가 뭘 봤건 나야 돈만 많이 벌면 되지 뭐. 근데 말이야, 이번 계획이 성공했다 쳐. 그담은 뭐 할 거야?”

그녀의 질문에 마하임은 잠시 침묵했다. 마하임 자신이 바라는 것.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나는 나의 나라를 세울 것이다.”

“호오. 반란이라도 일으킬 생각?”

세실은 마하임에 대해 제법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마하임과 첫 만남은 꽤 인상 깊었기에 그에 대해 적지 않게 조사를 했었다.

아르케비니아의 5번째 왕자이자, 아무런 지지 기반도 없는 몰락한 왕족.

마하임이 윈드시크릿의 영주로 온 것도 사실상 유배나 다름없었다. 그런 그가 왕이 된다니, 반란 말고는 달리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필요하다면.”

반란. 아니 그 이상의 일들도 마하임은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미래를 피해 갈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못하랴!

“적어도 내 백성이, 내 친구가 대륙 연합에게 짓밟히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큰 이상이나 목표는 따위는 없었다. 마하임이 바라는 것들은 단 하나.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고 싶을 따름이다.

“뭐, 충분하다랄까? 이제야 알겠네. 영주 네가 필사적인 이유를 말이야.”

세실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자신의 가득 찬 술잔을 마하임 앞으로 내미는 그녀.

세실 역시 마하임만큼이나 반드시 지키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귀마저 베어 버린 세실이었다. 그 간절함에는 세실 역시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너나 나나 꼬여 버린 인생이지만, 좋아. 한번 해 보자. 인생이란 거 별거 있나? 빌어먹을 미래, 한번 바꿔 보자고.”

세실은 마하임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마하임은 피식 웃고선 술잔을 받아 들었다.

세실은 시원스럽게 술잔에 술을 따른 뒤 자신의 술잔을 들었다. 잔과 잔은 부딪히고, 두 영웅의 우연이자 필연적인 동맹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 * *

다음 날 아침. 윈드시크릿에는 늦은 겨울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원래 한 달 전부터 시작되었어야 할 비였지만, 오늘에서야 처음 내리기 시작한 비였다.

“좀 많이 내려 줬으면 좋으련만.”

세실은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녀가 입고 있던 적갈색 우의가 이미 흠뻑 젖었지만, 오랜만의 비라 그저 반가울 따름이었다.

벌써 3년째 계속된 오랜 가뭄, 그녀라고 좋을 리가 없었다. 저수지는 이미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고, 윈드시크릿 인근에 흐르는 강조차 메말랐다.

이대로 한두 해만 계속된다면 윈드시크릿은 불모지가 되어 버릴 것이다.

비록 임시긴 하지만 이곳은 세실의 근거지였고 이곳을 잃는다면 그녀로서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나저나, 귀족 놈들의 생각은 알다가도 모르겠단 말이야.”

지금 세실이 나와 있는 곳은 윈드시크릿의 선착장이었다.

윈드시크릿은 바다와 인접한 항구 마을이었으므로 간혹 타국에서 온 상선 같은 것이 오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밤 도착한 이 배는 상선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컸다. 그렇다면 전함이라는 이야긴데 전함치고는 좀 많이 이상했다.

“롤카의 하급 귀족 에스탄테 자작의 프리깃급 전용선이로군요.”

세실의 맞은편에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썰렁한 선착장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이상히 여길 만도 했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배에 집중할 따름이었다.

“에스탄테 자작이라, 후. 80이 넘은 영감탱이가 아직도 여색이라니. 쯧쯧.”

롤카는 제국 다음으로 큰 세력을 지닌 왕국이었다. 아르케비니아와는 꽤 멀리 떨어진 나라였지만, 최근 해상 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해 갑자기 세력이 커진 나라였다.

그 때문에 윈드시크릿의 항구에도 롤카 왕국의 배가 방문하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상선도 아닌 전함이, 그것도 롤카의 귀족이 탄 배가 올 만한 이유는 몇 되지 않았다. 외교적인 목적이라면 더욱이 아니다.

게다가 에스탄테 자작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변태. 말할 것도 없이 제페쉬 백작의 노예 시장에 참석하려고 이곳에 온 것이다.

“에스탄테 자작이 잘나가긴 하나 봐, 선수를 아예 금으로 만들어 버리다니.”

에스탄테 백작의 배는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크고 아름다웠지만, 배를 외관을 장식하고 있는 장식물 하나하나도 범상치 않았다.

특히 선수를 장식하고 있는 롤카의 상징 ‘용두상(龍頭上)’은 전체가 황금으로 만들어져 있어 이른 아침의 미명에도 단연 돋보였다.

“설마요, 도금입니다. 저게 다 금이라면 무게 때문에 선체가 앞으로 쏠려야 합니다. 근데 저 배는 조금도 그러한 점을 찾아볼 수 없죠. 아주 얇은 금박을 입혔음이 분명합니다. 이 정도는 상식입니다. 상식.”

“그럼 난 상식도 모르는 바보란 말?”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고….”

세실의 말에 그 보이지 않는 존재는 난처한 듯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곤 방금 말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너 잘난 거 아니까 그 은신 마법 좀 풀지 그래? 누가 보면 유령이랑 이야기하는 줄 알겠다.”

“마법이라뇨. 그런 근원도 원리도 알 수 없는 것과 이것을 비교하지 마시길. 이건 고대 인류 과학의 결정체, 광학미체(光學微體)란 겁니다.”

“또 시작이네. 아예 그냥 과학자라고 불러 드릴까? 위대한 연금술사 하륜 님.”

세실의 말이 끝나자 더 이상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검은 그림자 같은 것이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주변의 이미지와 비슷했지만, 확실히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그것은 점차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더니 세실과 비슷한 키의 사람 형상으로 바뀌었다.

“아니요. 사양하겠습니다. 제가 알던 과학은, 이미 죽었습니다.”

모습은 드러냈지만, 얼굴은 물론 그 어디도 맨살은 보이지 않았다. 음침한 잿빛 망토에 검은색 가면, 특히 그 가면은 평범함과 거리가 멀었다.

“그나저나 그 가면 안 불편해? 보는 내가 답답할 지경이야.”

“저도 벗고 싶지만, 나름의 사정이 있으니 이해해 주시길.”

가면의 연금술사, 하륜. 그에 대해 세실이 아는 것은 몇 되지 않았다. 일 때문에 10년 전부터 만나 온 사이이지만 대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일반적인 연금술사들처럼 진리를 탐구한다거나 문자 그대로 금을 만드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아니, 정말 연금술사인지도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구태여 그의 본심을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그는 세실에게 있어서 고객이었고, 이번에는 아마도 동업자가 될 것 같았다.

“뭐, 그건 개인의 사정이니 그렇다 치고, 네가 영주한테 나에 대해 말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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