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설마요. 전 당신이 여기에 와 계신지도 영주님 때문에 알았습니다.”
“칫, 됐어. 하여튼 영주나 네놈이나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하륜이 뜬금없이 신임 영주의 서기관으로 취업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드디어 저 사이비 연금술사가 사람이 되려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전날 영주 사건의 복선임이 틀림없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생각해?”
“뭘 말입니까?”
“저 영주, 미래를 봤다는데 말이지.”
“정확히는 ‘회귀’를 했다고 합니다.”
“풋, 그 말 정말 믿어? 과거 회귀라니, 무슨 싸구려 소설도 아니고 말이야.”
“전, 믿습니다.”
“헐, 정말?!”
세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륜의 성격이라면 세실 역시 제법 알고 있었다.
지독할 정도로 논리적이며, 현실적인 그는 비이성적이며 비과학적인 것을 철저히 배척했다. 그래서 가끔 인간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인물이 바로 하륜이었다.
“네, 마하임 님이 보신 미래는 현재 저희가 처한 상황을 정확히 반영한 미래를 예측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가 본 미래는 현실로 나타날 가능성이 매우 크겠지요.”
“과학 신봉자인 너한테서 이런 말을 듣는다니, 정말 의외인걸?”
“음, 전 충분히 과학적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하아, 됐어. 말을 꺼낸 내가 바보지. 어쨌거나 빼도 박도 못 하고 영주랑 같은 배를 타고 말았네.”
세실은 혀를 차며 말했다. 계약한 이상 끝을 보는 게 그녀의 원칙이었기에 그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세실은 마하임과의 계약을 이행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번 건은 위험하긴 했지만, 잘만 풀린다면 그동안 그녀가 계획해 온 독립 상단 창설을 위한 시드 머니를 확보할 최고의 기회였다.
“까짓것, 한번 해 보지 뭐. 죽기밖에 더 하겠어?”
“걱정 마십시오. 제가 짠 계획은 완벽하니까요. 그럼 D-Day날 뵙도록 하죠.”
하륜은 언제나 그렇듯 소리 없이 사라졌다. 세실은 하륜이 사라진 허공을 바라보며 날카로운 안광을 흩뿌릴 뿐이었다.
* * *
세실과 계약을 마친 마하임은 정말 미칠 듯이 바쁜 한 주간을 보냈다.
이번에 치를 거사는 향후 마하임의 계획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이벤트였다.
만에 하나 실패한다면 최악의 경우 영지를 잃고 방랑의 길을 걸어야 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미래를 바꾼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린다.
“후우, 아무리 준비한들, 조바심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구나.”
마하임은 자신의 서재 앞에 앉아 자조 섞인 한숨을 내 쉬었다.
하륜은 자신의 계획은 완벽하니 반드시 성공한다고 호언장담을 했지만, 아무리 봐도 이길 만한 구석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일단 객관적인 전력만 봐서도 제페쉬가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가 직접 지휘하는 경호 인력만 해도 1,000명에 육박했고, 거기다 용병까지 운용하고 있었으니 실제는 더 많을 것이다.
더군다나 내일 밤 제페쉬의 저택에 있을 연회에는 제페쉬의 경호 부대 외에도 각지에서 온 귀족들의 호위 병력까지 가세했기에 실제 마하임이 제압해야 할 병력은 2,000명에 육박했다.
똑똑똑
바로 그때 들려온 노크 소리. 지금 이 시각에 찾아올 사람이라면 단 한 명뿐이었다.
“누군가?”
“요한 님이 오셨습니다. 하실 말이 있다고 하시는데요.”
“들여보내.”
하륜의 목소리에 마하임은 짧게 대답했다. 왜 안 오나 싶었는데 드디어 올 것이 온 모양이다.
문이 열리자 요한의 모습이 보였다. 완전 무장한 그는 최전방에 투입되는 병사처럼 비장미까지 느껴졌다.
“무슨 일인가? 요한.”
마하임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요한을 향해 말했다. 그러나 그가 여기에 온 이유는 마하임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내일 저녁 마하임이 습격하려는 곳이 그의 양아버지 제페쉬의 저택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
마하임의 질문에 요한은 침묵했다. 그의 시선은 서재 한쪽 구석, 금테가 선명하게 아로새겨진 편지 봉투에 굳은 듯 멈춰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내일 있을 제페쉬 백작이 주선하는 연회의 초대장이었다.
“역시나 보내셨군요.”
“그러게. 초대장까지 왔으니 당연히 가 줘야겠지. 물론 보내지 않아도 갈 생각이었지만.”
마하임은 싸늘하게 말했다. 노예 매매는 아르케비니아 국법상 명백히 중범죄였다.
이 연회는 말이 연회이지, 그의 저택에서 열리는 노예 시장의 전야제 같은 것이었다.
이런 연회의 초대장을 영주에게 보냈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것을 넘어선 일종의 도발이나 다름없었다.
“정말 하실 겁니까?”
무겁게 입을 여는 요한. 부자지간이고 뭐고를 떠나서 마하임의 이 계획은 너무나 무모했다.
현재 마하임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500여 명. 이번 경우에는 보안이 생명이었기에 그중에서도 100명 정도가 최대였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나?”
“자살 행위입니다. 재고해 주십시오. 설령 성공한다고 쳐도 그 뒷감당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마하임의 계획이 매우 치밀하다는 것은 요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계획대로 100% 잘된다는 보장도 없었을뿐더러 조금의 실수로도 이웃 영지와의 분쟁으로 이어질 확률이 높았다.
마하임은 요한의 말에 답을 하는 대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오페라를 허리춤에 찼다.
요한은 무어라 말을 하려다 입을 닫았다. 마하임은 그런 요한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잠시 나가지. 너무 오래 앉아 있었던 모양이야.”
곧장 마하임은 서재 밖으로 나갔다. 묵묵히 마하임을 따르는 요한. 밖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줄기가 많이 약해져 있긴 했지만, 우기에 내리는 비는 무시할 수 없었다.
“참 시간이 빠르군. 벌써 여기에 온 것도 3달이 지났던가?”
복도를 지나 영빈관 정문 앞뜰에서 멈춰 선 마하임이 비가 쏟아져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 시간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돌이켜 보면 그 어떤 일도 쉬운 일은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얼마나 더 이런 일을 겪어야 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마하임은 지금 여기까지 왔다.
“오러를 사용해도 좋다. 때로는 검으로 대화를 나눠 보는 것도 좋겠지?”
마하임은 오페라를 뽑아 들며 말했다. 요한은 잠시 망설이다 그 역시 검을 뽑아 들었다.
마하임의 실력은 요한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이 성에서 자신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아니 마하임의 진정한 힘은 그 정도가 아닐 것이다.
정식 대련에 있어서는 항상 요한이 승리했었지만, 단 한 번도 일방적인 압승은 없었다. 그리고 마하임은 언제나 여유 있게 싸움을 이끌었다.
요한 자신이 실력으로 이긴 것이 아니라 마하임이 일부러 져 줬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마하임이 사용하는 기묘한 전투 기술은 요한으로서는 전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것들이었다.
하지만, 오러를 사용해도 된다고?
“저는 오러 유저입니다. 오러를 사용치 못하는 영주님께서 저를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요한의 검에서 새하얀 빛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동방의 옛 속담에 이런 말이 있지. 길고 짧은 것은 대 봐야 안다고.”
천천히 몸을 푸는 마하임. 구구절절한 설명보다 지금은 힘으로 이야기할 때였다.
요한 역시 이번만큼은 물러설 수 없다는 듯 비장한 표정이었다.
“불경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검을 고쳐 잡은 요한은 조용히 되뇌었다. 요한 그 역시 무(武)를 추구하는 기사였다.
마하임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또한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싶었다.
적어도 아르케비니아의 기사 학교에서는 자신과 싸워 이긴 사람은 없었다. 과연 마하임 저 알다가도 모를 영주라면 어떨까?
“선공은 제가 하겠습니다.”
검을 고쳐 쥔 요한의 검에서 오러의 기운이 더욱 강해졌다. 내리는 비는 요한의 검신에 닿기도 전에 증발해 버렸다.
요한 자신조차 꺾지 못한다면 이번 계획의 실패는 정해진 수준이었다. 겨우 섬길 만한 주군을 찾았는데 이런 식으로 잃기는 싫었다.
그렇다면 명분은 충분했다. 지금 이곳에서 팔이나 다리를 하나쯤 부러트려 놓으면 이번 계획은 중지될 것이다.
불충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곳에서 그를 잃을 순 없었다.
탓-
가벼운 발걸음. 중장 갑옷을 입은 요한이었지만 철컥이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넘실거리는 오러는 요한의 롱소드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오러는 모든 물질과 반발하는 성질을 지녔다. 즉, 오러는 모든 물질을 붕괴시키는 데 탁월하다는 것.
제대로 공격이 들어간다면 인간의 몸 정도는 간단히 부서져 버릴 터였다.
부웅-
요한의 검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마하임의 가슴을 향해 날아왔다.
그렇게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막으려면 언제라도 막을 수 있을 정도의 움직임.
마하임은 검을 막으려다 살짝 뒤로 물러섰다. 바로 그때 요한의 검이 순간 움찔하더니 변칙적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분명 처음 공격은 느린 횡 베기였지만, 찰나의 짧은 순간에 찌르기로 변했던 것이다.
“하합!”
마하임은 짧은 기합과 함께 요한의 검을 아슬아슬하게 쳐 냈다.
관성의 법칙을 벗어난 듯한 말도 안 되는 궤도의 공격이었지만, 미리 예측을 하고 있다면 못 막을 것도 없었다.
요한의 전투 방식은 지난 회귀를 통해 마하임의 머릿속에 확실히 박혀 있었던 까닭이었다.
“날카롭군.”
“역시 대단하십니다. 이 공격은 아르케비니아 왕실 기사단장님조차 막지 못했는데.”
“과찬은 금물. 전력으로 와라.”
“그리 말 안 하셔도, 그럴 겁니다!”
요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의 맹공이 시작되었다.
공격 자체는 느렸지만, 관성의 법칙에 어긋난 듯한 변칙적인 궤도의 검격은 마하임을 당혹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마하임에게는 오페라의 서포터가 있었다.
[첫 번째 공격은 페인트 모션입니다. 2초 후 하단 중앙 공격은 회피, 나머지 공격은 쳐 내시면 됩니다. 검의 궤도를 재표시합니다. 삑! 경고! 오러 농도가 올라갔습니다.]
아무리 요한이 변칙적인 공격을 해 온다고 하더라도 오페라는 단숨에 이를 간파하고 마하임에게 가장 완벽한 방어와 공격법을 제공해 주었다.
이것이 바로 오페라의 ‘전투 지원’ 모드의 저력이었다.
‘무겁군.’
검과 검이 부딪칠 때마다 오러의 기운이 마하임의 팔을 파고들었다.
오페라는 오러의 기운까지 어느 정도 중화시켜 주었지만, 완벽한 중화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러한 기능이 있는 것만으로도 오페라는 웬만한 성검이나 마검보다 뛰어난 검이었다.
“역시 그 검, 보통의 검이 아니군요.”
“나도 이 검에 대해선 잘 모른다. 하륜 녀석이 준 거라서.”
“하륜…. 전 그 작자 마음에 안 듭니다!”
챙! 파앙-!
요한의 검격이 더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마하임은 여전히 조금도 밀리지 않고 그의 검을 막은 뒤 빈틈이 보일 때마다 검격을 찔러 넣었다.
마하임의 황당하리만큼 강한 전투력에 요한은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터무니없는 주군의 계획을 막아야 했기에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좋습니다. 이제부턴 제대로 상대해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