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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군주-21화 (21/194)

21화

육중한 저택의 정문을 바라보며 마하임은 중얼거렸다. 아무리 시류의 힘이 있더라도 시아라의 무력에는 발끝에도 못 미쳤다.

그러나 설령 시아라만큼 강한 힘이 있을지라도 마하임은 그녀와 같은 방법을 쓸 생각은 없었다.

미래에서도 그 사건을 수습하는 데, 무려 수개월이 걸렸다. 이를 다시금 반복할 만큼 마하임은 어리석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영주님. 제페쉬 백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경비병들의 간단한 검문이 끝나자 마하임과 아나모네는 곧장 연회장으로 안내됐다.

초대장도 있었고 누가 뭐래도 그는 윈드시크릿의 영주였다. 이미 언질이 되어 있었는지 마하임은 바로 연회장으로 갈 수 있었다.

저택의 내부는 마하임의 기억 속의 그것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정문을 지나면 곧장 긴 통로로 이어지는데, 주위는 경비병들이 일정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이곳을 지나자 곧장 노예 거래가 이루어지는 대연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나 대단하군.”

마하임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천천히 훑었다. 높다란 천장은 그 비싸다는 ‘발광석’ 수십 개가 대낮처럼 밝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고 바닥은 우윳빛 대리석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산해진미가 가득 차려진 테이블 수십 개를 중심으로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곳을 메우고 있었다.

“어머, 설마 저건 다크엘프?”

“오오 정말 다크엘프다! 대체 어디서 온 귀족이길래 저리 귀한걸!”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마하임은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노예 거래를 위해 온 사람들인 만큼 다크엘프인 아나모네의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다크엘프는 종족 자체가 워낙 희귀하고 드높은 프라이드 때문에 생포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래서 노예 시장에서 다크엘프를 보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웠다. 그런 다크엘프가 떡하니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싫다, 정말로.”

아나모네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 달갑지 않았다. 더욱이 그들 곁에 멍한 얼굴로 서 있는 아인족을 볼 때마다 아나모네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이곳은 그야말로 아인족의 전시장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족 보행을 하는 인간형으로부터 캔타우르스족 같은 반인반수형 종족까지.

심지어는 하피와 같은 몬스터까지 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는 한결같이 생기란 찾아볼 수 없었다.

여기에 있는 아인족들은 ‘락슌’에 중독되어 자아를 상실해 인형이나 다를 바 없는 그야말로 ‘애완용’에 불과했다.

“오셨습니까? 영주님”

때마침 들려온 목소리에 마하임은 시선을 돌렸다. 마치 파도가 갈라지듯 사람들이 물러서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마하임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 선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이 저택의 주인 제페쉬 백작이었다.

“먼저 찾아뵙고 모셨어야 하는데, 송구합니다.”

마하임에게 다가온 제페쉬는 고개를 숙였다. 이번 생에서는 처음 만난 그였지만 마하임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얼굴이었다.

비쩍 마른 왜소한 체구이지만 키는 요한만큼이나 컸다. 나이는 50을 갓 넘겼지만, 그의 머리칼은 은발이 연상될 정도로 새하얗다. 그리고 얼굴은 가느다란 주름으로 가득해 60살이 넘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한 것이 없었다.

“이렇게 초대해 주신 것만 해도 감사합니다.”

마하임은 약간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전생의 인연이 어떻건 지금은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마하임은 곁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제페쉬 곁에는 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몇 있었는데 마하임의 눈에도 낯익은 얼굴이었다.

“하하하! 다크엘프라, 보기보단 안목이 있으시구려. 어린 영주라 신경 쓰지 않았는데 다시 봤소.”

호탕에게 웃으며 마하임의 등을 두드리는 그는 롤카의 에스탄테 자작이었다.

롤카의 전통적인 복장인 터번과 긴 황금빛으로 넘실거리는 망토를 걸친 그는 이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

그는 제페쉬의 고객 중 가장 많은 돈을 뿌리는 사람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아종족 수집에 열을 올렸는데, 그의 변태적인 취향은 귀족들 사이에서도 악명이 높았다.

“과찬이십니다.”

마하임은 고개를 숙이며 그의 얼굴을 다시금 확인했다. 단순히 외모만 보자면 에스탄테는 배만 툭 튀어나온 별 볼 일 없는 늙은이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는 조만간 롤카 왕국의 재상이 될 인물이었다. 사실 지금도 막강한 자금력으로 롤카를 좌지우지했기에 마하임을 대함에 있어도 거침이 없었다.

“남의 애장품에 손대는 건 예의가 아닌 줄 안다만, 그 다크엘프 나에게 팔지 않겠소? 내 그대가 부르는 대로 다 줄 테니 말만 하시오.”

어느 사이엔가 다가와 아나모네의 엉덩이를 만지작거리는 에스탄테.

평소의 아나모네라면 당장 검부터 뽑아 들었겠지만, 드레스를 입고 있는 터라 검도 없을뿐더러 애초에 지금 그녀의 포지션은 락슌에 중독된 ‘노예’였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에스단테 자작님 말씀처럼 남의 애장품에 손대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요.”

마하임은 옅은 미소를 띠며 에스단테를 향해 말했다. 그러나 입만 웃고 있을 뿐이지, 그의 눈동자는 살기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는 명백히 마하임의 적이었다. 지금도 그렇고 그가 알고 있는 미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롤카는 대 제국전 초반에는 마하임의 아르케비니아 왕국과 동맹국이었다. 그러나 전황이 불리해지자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그 덕분에 아르케비나아의 수도는 단 일주일 만에 함락되었고 윈드시크릿에서의 기나긴 농성전의 원인이 되었다.

‘죽여 버릴까?’

이곳에서 반드시 죽여야 할 인물로서 에스탄테는 제1순위였다. 물론 지금 당장 죽여 버리면 계획에 조금은 차질이 생길지도 모르겠지만, 이때 발생한 혼란을 이용한다는 시나리오도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에스탄테 자작과 마하임의 사이는 몇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았다. 손만 뻗어도 닿을 수 있는 거리.

마하임의 미숙한 발경이라 할지라도 저런 늙은이 한 명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마하임은 저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쯤 해 두시길.”

바로 그때 마하임의 앞을 가로막는 이가 있었다. 전신을 덮는 검은 망토에 복면으로 얼굴까지 완전히 가린 그는 마치 유령처럼 마하임과 에스탄테 자작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주인님의 무례, 사죄드립니다.”

그리고 마하임의 앞에서 공손히 허리를 숙이는 정체불명의 인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혀 존재감을 느낄 수 없었다. 이런 화려한 파티장에서 그의 옷차림은 단연 눈에 띌 텐데도 말이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저 목소리가 마하임에게 생소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누굴까? 어디선가 분명….’

체구는 크지 않았다. 마하임보다 약간 키는 컸지만, 목소리는 분명 남성의 것이었다.

그러나 당장 떠오르는 인물은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무척이나 익숙한 목소리란 것이다.

“이, 쓰레기 같은 놈이 내가 누군지 알아?! 감히 어디서!”

불같이 화를 내는 에스탄테 자작, 그러나 그는 이 이상의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주인님!”

“…….”

검은 두건의 한마디에 에스탄테 자작은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하고 입을 닫았다.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얼굴까지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역시 둘은 단순한 주종 관계가 아닌 듯했다. 마하임은 미래의 기억 속에서 저 검은 두건을 두른 인물에 대해 다시금 떠올려 보았지만, 궁금증만 더할 뿐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왜들 이러십니까? 모두 진정하시고 앞자리로 가시죠. 곧 ‘경매’가 시작됩니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느낀 제페쉬는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장사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니고 귀족들이 모이면 응당 이런 자존심 싸움이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다만 한 가지 예상치 못한 일은 마하임이 이런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흥, 꼴에 영주라고 자존심은. 가자!”

의외로 순순히 에스탄테는 물러났다. 그는 몸을 휙 돌리더니 연회장 안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검은 두건의 사람은 마하임을 한동안 노려보더니 이내 에스탄테 자작의 뒤를 따랐다. 그제야 제페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영주님의 기분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조금은 자중해 주시길. 이곳은 그런 곳입니다.”

이 말만을 남기고 제페쉬 역시 에스탄테의 뒤를 따라 연회장 중심으로 향했다.

그러나 마하임의 귀에는 제페쉬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의 무사로서의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저 검은 두건을 조심하라고.

* * *

우르르릉-

멀리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제페쉬의 저택 내부에서는 사치스러운 연회가 이어지고 있지만, 밖은 저 기분 나쁜 천둥소리를 제외한다면 적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더욱이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으니 망루를 지키는 경비병 입장으로는 최악의 일진이었다.

“하아- 이놈의 비는 언제나 그치려나.”

오랜 가뭄 끝에 내린 단비였지만, 경비병은 만사가 귀찮았다. 지난밤부터 비를 꼬박 맞고 이곳에 굳은 듯 서 있었던 터라 몸은 천근만근이었고, 거기다 겨울이 다가와서인지 바람까지 차갑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제 1시간 정도만 지나면 교대라는 것이다.

“흐흐흐- 교대만 해 봐라. 내 오늘 밤까지 달려 주마!”

제페쉬의 사병으로서 나름 잔뼈가 굵은 그인지라 절로 음흉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아마 지금쯤이면 이미 시작되었을지도 몰랐다.

오늘처럼 노예 시장이 열리는 날이면 일개 경비병들이라 할지라도 아종족 노예와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원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타국에서 온 귀족들이 가지고 놀다 폐인이 된 아인족 노예들을 경비병들에게 뒷처리를 맡기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시간 참 더럽게 안 가네.”

싸늘하게 식어 버린 손에 입김을 불며 경비병은 투덜거렸다.

지금 그가 서 있는 곳은 저택의 측면에 있는 망루였다. 저택의 정문 쪽은 볼 수 없었지만, 측면을 비롯한 후면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평소 같으면 이런 곳까지 경비를 서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보름 전에 일어난 노예 강탈 사건 덕분에 경비병이 2배나 늘었을 뿐만 아니라 경계 활동도 전보다 훨씬 강화됐다.

“이게 무슨 개고생이람, 엿 같은 도둑놈들.”

그 누구도 범인을 정확히 본 사람은 없었지만, 이런 짓을 벌일 만한 인물은 단 한 사람, 대도 세실 일리암스 뿐이었다.

이미 세실과 제페쉬는 아인족 노예로 인해 여러 차례 충돌한 적이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물론 이번 사건은 일으킨 당사자는 마하임이었지만 말이다.

풍덩-

때마침 들려온 물소리에 경비병은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해자에 가득찬 물이 긴 파문을 그리고 출렁거렸다. 하지만 그뿐이다. 주변은 빗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주변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아무리 초겨울이라고 할지라도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지금 이 정적은 지나치게 비정상적이었다.

“뭐지?”

바로 그때 경비병의 어깨에 뭔가 묵직한 덩어리가 떨어짐을 느꼈다.

경비병은 자신의 어깨에 떨어진 그 무언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끈적거리는 투명한 액체. 심지어는 미지근한 열기까지 느껴졌다.

무언가 불길한 예감에 경비병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 액체가 떨어진 망루 위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경비병은 보고 말았다. 자신을 향해 매서운 살기를 뿜어내고 있는 거대한 무언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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