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으…으?!”
으드드득-!
경비병의 비명은 미쳐 그의 성대를 벗어나기도 전에 가로막혔다. 아니 정확히 그의 성대 자체가 날카로운 무언가에 뜯겨 나가 버렸다.
너무나 순간적이라 고통조차 느낄 수 없었다.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 경비병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도마뱀과 인간을 뒤섞어 놓은 듯한 외양의 생명체, 흔히들 리자드맨이라 부르는 몬스터였다.
경비병이 서 있던 곳은 제페쉬의 저택 외벽 위, 지상으로부터 2m 이상 떨어져 있는 곳이었지만 리자드맨에게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들의 손에는 아주 미세한 빨판 같은 것이 있어 비로 인해 물을 가득 머금은 저택의 외벽이라도 평지만큼이나 손쉽게 오를 수 있었다.
“크르르르, 머, 먹진 않을 테니 안심하고 죽어라! 크릉”
경비병의 목을 단숨에 물어뜯은 리자맨은 흥분을 가라앉히며 중얼거렸다.
인간을 최고의 별미로 치는 리자드맨인지라 눈앞의 사냥감이 무척이나 아까웠지만, 함부로 손댈 순 없었다. 그들의 두목이자 족장인 세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첨벙-
이미 숨이 끊어진 경비병을 망루 밖으로 던져 버리는 리자드맨. 경비병의 시신은 망루 아래의 해자로 곤두박질쳤다.
해자를 채우고 있는 검푸른 물은 경비병의 피로 붉게 물들어 갔다.
“케에에에엑!”
리자드맨은 낮고, 또한 길게 포효했다. 그러자 해자를 채우고 있던 물속에서 소리 없이 숨어 있던 다른 리자드맨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미 경계를 서던 경비병들은 모두 제거되었기에 이젠 숨을 필요도 없었다.
미끄러지듯 물 밖으로 기어 나온 리자드맨들은 저택의 정문으로 이어진 다리 위로 모여들었다.
그 숫자는 무려 30마리. 단순 계산으로도 200명 이상의 병사들과도 상대할 수 있는 전력이었다.
“이거 너무 쉽잖아?”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의 두목인 세실 일리암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말도 안 되는 계획이라고 마하임을 몰아세운 세실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로 첫 단추는 너무나 싱겁게 끼워졌다.
물론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케에에엑! 우리 인간 안 먹었다.”
“크르릉 두목 약속은 지켜야 한다! 케엑”
“나참. 알았으니까, 조용히 해!”
피 맛을 본 리자드맨들은 흥분해서 떠들어 댔다. 숙련된 용병들조차도 두려워하는 리자드맨이었으나 세실 그녀 앞에서는 애완용 도마뱀이나 다름없었다.
일반적으로 리자드맨들은 지능이 낮아 길들이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세실의 리자드맨은 그 일반적인 리자드맨이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제국의 군수창고를 털던 세실은 그곳에서 실험용으로 보관 중이던 새끼 리자드맨 무리를 발견했던 것이다.
제국이 무슨 짓을 이 리자드맨들에게 한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녀석들은 공용어까지 사용할 정도로 뛰어난 지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세실은 이 녀석들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처음 봤을 때는 자신의 허리에도 못 미치던 작은 녀석들이 이제는 2m가 넘는 거구의 리자드맨으로 변해 있었다.
“자, 남은 것은 이제 저 문인데 말이야.”
세실은 느긋한 걸음걸이로 저택의 정문을 향해 다가갔다. 한눈에 봐도 문은 대단히 견고해 보였다. 어중간한 정령술로는 흠조차 낼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문 바로 앞까지 다가간 세실은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리자드맨들의 시선이 순간 그녀에게로 집중됐다.
세실이 어떻게 저 문을 열지 자못 궁금한 표정이었다. 세실은 잠시 숨을 가다듬은 후에 큰소리로 외쳤다.
“열려랏, 참깨!”
“…….”
그리고 이어진 침묵. 리자드맨들은 커다란 두 눈을 껌벅이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다.
“크르르릉 참깨?”
바로 그때였다. 꼼짝도 하지 않던 문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놀란 리자드맨들은 뒤로 물러났지만, 세실은 알 수 없는 미소를 흘리며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혹시나 열어 주지 않을까 해서 내심 걱정했는데 말이지.”
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다름 아닌 요한이었다. 그를 본 세실은 활짝 웃으며 그를 반겼지만, 요한의 얼굴은 어둡기만 했다.
“다른 암구호도 많을 텐데, 하필 참깨입니까?”
“뭐 어때? 언젠가 꼭 한번 해 보고 싶었거든.”
세실은 이렇게 말하며 요한의 어깨에 찰싹 달라붙었다. 요한은 마치 징그러운 뱀이라도 본 것처럼 그녀를 피하려고 했지만 세실은 그런 요한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무, 무슨 짓입니까?! 이런 중요한 때에.”
“음, 헌팅 중. 마하임은 너무 어려서 싫고, 여기 경비대장님이라면 딱 내 취향이라서 말이지.”
“떨어지십시오!”
정색을 하며 소리치는 요한. 그의 목소리는 살기까지 담겨 있었다.
“케에엑! 감히 두목에게 무슨 짓을!”
“죽인다, 인간! 케에에에!”
“그만!”
요한의 살기에 흥분한 리자드맨들은 당장이라도 그를 찢어 버릴 듯한 기세였다. 그러나 세실의 한마디에 이내 주위는 조용해졌다.
“장난이 좀 지나쳤나? 사과하지.”
세실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한 발자국 물러선다. 요한은 잠시 머뭇거리다 무겁게 입을 연다.
“전 당신을 믿지 않습니다.”
“그건 피차일반이야. 난 도둑, 넌 기사. 이보다 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또 어딨겠어?”
마하임의 계획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협력하고 있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에게 칼을 겨누었던 적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 서로 신뢰하기가 쉬울 리 없었다. 요한은 그녀를 힐끔 쳐다보고서는 그대로 성문 안을 향해 걸어갔다.
세실은 그런 요한을 바라보며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다 하더라도 너랑 나랑은 닮은꼴이야. 명분이니 뭐니 해도 넌 아버지를 배신하려는 거고, 그리고 난…. 뭐 이것도 운명이려나.’
* * *
음악이 흘렀다. 경쾌하면서도 밝은 음악.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마하임은 춤을 추고 있었다.
그의 파트너는 철도 들기 전 어른의 사정으로 약혼한 시아라.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이름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마하임이 그녀를 처음 만난 그날, 첫눈에 시아라에게 반하고 말았다. 비록 그녀는 마하임에게 차갑다 못해 무시하기 일쑤였지만, 시아라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마하임은 즐거웠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그녀는 마하임의 스승이었고 때론 연인이었고 또한 친구였다.
그 처절했던 제국과의 전면전 와중에서 그녀가 없었더라면 오늘의 마하임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시공마저 다른, 심지어는 적진 한복판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에서조차 마하임은 옛 기억에 취해 있었다.
“루?”
마하임의 움직임이 갑자기 둔해지자 아나모네가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그때야 마하임은 현실에 돌아올 수 있었다.
지금 이곳에는 한참 무도회가 진행 중이었다. 악단의 음악에 맞춰 춤추는 선남선녀들, 노예 시장이라고는 하지만 표면적으로 이곳은 귀족들의 사교 모임이었기에 무도회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미안,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 말이지.”
굳이 말하자면 미래의 일이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마하임은 비록 짧은 시간이나마 그때 그 기분으로 돌아가 무도회를 만끽하고 있었다.
경쾌한 바이올린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는 둘. 주변에 병풍처럼 선 귀족들은 둘의 춤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부러움과 질투의 시선, 무엇보다도 아나모네의 존재는 이곳에서 단연 빛났다.
이곳에 온 대부분의 사람들, 심지어는 제페쉬조차도 다크엘프의 실물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아인족들은 락슌에 중독된 상태여서 주인의 단순한 명령조차 실행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당연히 춤과 같은 난이도가 높은 행동을 소화해 내는 아인족은 무척이나 드물었다.
그러나 아나모네는 달랐다. 애초에 그녀는 락슌에 중독된 것도 아니었고 다크엘프라는 일종의 프리미엄에다 외모마저 출중했으니 눈에 띄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귀족들의 궁중무도 같은 것을 배운 적이 없었기에 춤은 서툴렀지만, 마하임이 적절히 리드하자 그럭저럭 모양새는 나왔다.
“혹시 내가 뭔가 잘못했나?”
“넌 잘못한 것 없다. 문제가 있다면 나에게 있겠지.”
이곳에서 제일 잘나간다는 에스탄테 자작조차도 다크엘프를 가지진 못했다.
그런데 이름조차 생소한 몰락한 왕족인 마하임이 ‘다크엘프’의 소유자라는 것이 그들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몇몇 귀족들이 마하임에게 아나모네의 입수 경로를 묻기도 했지만, 마하임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자 귀족들은 노골적으로 마하임을 적대시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아나모네의 엉덩이나 가슴을 은근슬쩍 만지는 등의 성희롱으로 나타났다.
“조금만 참아. 이제 곧이다.”
마하임은 아나모네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살짝 얼굴을 붉히는 아나모네. 마하임의 예민해진 귀에는 그녀의 심장 소리마저 흐릿하게 들려왔다.
잠시 후 음악이 부드러운 왈츠풍으로 바뀌고 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춤을 추던 귀족들의 웅성거림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이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무도회가 끝남을 의미했다.
그리고 오늘의 마지막 행사인 노예 경매가 곧 시작될 것이다.
“신사 숙녀 여러분!”
음악이 멈추자 연회장 전면에 꾸며진 단상 위로 제페쉬 백작이 나타났다.
그는 익숙한 동작으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귀족들은 저마다 환호했고 제페쉬는 흡족한 얼굴로 모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멀리 타국에서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찾아오신 여러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오늘은 특별한 ‘이벤트’도 준비되어 있으니 마지막까지 즐겨 주셨으면 합니다. 자, 그럼 첫 번째 매물입니다!”
제페쉬가 옆으로 물러서자 ‘매물’이 화려하게 꾸며진 무대 위에 나타났다.
검은 두건을 쓴 나신의 남성에게 이끌려 나온 아인족은 아직 채 여물지도 않은 어린 묘인족이었다.
묘인족은 인간과 고양이의 중간 정도의 외모라 ‘엘프’만큼 수요가 많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특유의 귀여움과 이질적인 외모 덕분에 수요는 언제나 있었다.
“그럼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제페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거래를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묘인족 자체는 노예 시장에서 흔했지만 지금 저 묘인족은 생각보다 훨씬 어렸다.
인간의 나이로 본다면 20살 남짓. 대부분의 어린 묘인족은 저항력이 약해 ‘락슌’을 견딜 수 없어 조교 과정에서 대다수 사망한다.
그래서 노예 시장에서 어린 묘인족을 찾기란 엘프만큼이나 어려웠다.
“네, 400골드 나왔습니다. 다른 분 없습니까?
“500!”
서로 다투듯 가격은 올라가기 시작했다.
가격은 이미 평민으로서는 꿈도 꿀 수 없을 정도로 치솟았다. 그러나 단상에 위의 묘인족은 그저 공허한 눈으로 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검은 두건의 남성이 신호를 보내자 묘인족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무런 감정도 의지도 느껴지지 않는 기계적인 움직임. 락슌에 중독된 상태로 조교를 받은 결과였다.
이를 본 귀족들은 더욱더 흥분해서 가격을 높인다.
“루, 지켜만 볼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