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대군주-23화 (23/194)

23화

경매장 구석에서 이를 지켜보던 아나모네는 무겁게 입을 뗐다.

아나모네는 노예 거래를 직접 하지는 않았지만, 수송에는 여러 차례 참여한 경험이 있었다.

당시에는 아무 생각 없이 주어진 일만 했던지라 노예들의 처지 같은 것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직접 눈앞에서 아인족 노예의 실상을 알게 되니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직 때가 아니야. 지금은 기다리자.”

마하임이라고 구해 주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저 묘인족은 락슌에 중독된 상태.

구한다고 하더라도 치료할 길은 없었다. 그리고 이 경매는 결코 오래갈 수 없다는 것을 마하임은 알고 있었다.

“1,000골드!”

이 경매의 종지부를 찍은 사람은 역시나 에스탄테 자작이었다. 그가 이런 좋은 매물을 놓칠 리가 없었다.

에스탄테가 무려 1,000골드라는 거금을 제시하자 다른 귀족들은 입맛만 다실 뿐이었다.

“최종 낙찰자는 에스탄테 자작님이십니다. 축하드립니다.”

제페쉬는 날아갈 것 같은 기쁨에 표정 관리에 여념이 없다. 기껏해야 2, 300골드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1,000골드라니. 지금 이 순간이 꿈이 아닐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이후 이어진 경매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 연출됐다.

유찰이 속출했을 뿐만 아니라 팔리는 아인족들 역시 본전도 못 찾을 정도로 헐값에 팔렸다.

문제는 제대로 된 매물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나모네가 수송했던 바로 그 아인족 노예들. 원래라면 오늘 판매되어야 할 최고급 매물이었지만 지난번 마하임의 활약 덕분에 모두 약탈당하고 만 것이다.

모든 장사가 그렇듯 미끼용 매물이 있어야 조금 하자가 있는 것들도 팔리기 마련인데, 그 미끼인 매물 전부를 분실해 버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집어치워. 뭐 이딴 경매가 있어!?”

“정말 실망이네, 제페쉬. 자네 겨우 이 정도였나?”

“나갑시다. 두 번 다시 오나 봐라. 퉤!”

“진정하시고, 아직 경매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허겁지겁 주변을 수습하는 제페쉬. 이미 예상한 일이었지만 실제 귀족들의 반응은 훨씬 더 나빴다.

심지어는 먹던 음식물과 쓰레기까지 날아왔으니 제페쉬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직 낙담하기에는 일렀다. 아직 그에게는 사용하지 않은 비장의 카드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오늘을 위해 이 제페쉬가 특별히 준비했습니다! 보시죠?!”

제페쉬의 외침과 귀에 거슬리는 쇳소리와 함께 무대 중앙 바닥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지면 아래서 커다란 무언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어떻게 저것이!’

처음 그것을 본 마하임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뭔가 잘못되었음이 틀림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미래와는 완전히 다른 전개. 아니 애초에 저 물건이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제국의 최종 병기! 마도 공학의 결정체, ‘마장기’를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제페쉬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지만, 귀족들은 수많은 질문이 쏟아 냈다.

여기에 모인 대다수 귀족들은 마장기를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하지만 그 소문만큼은 귀에 따갑도록 들어 왔다.

아직 제국이 본격적인 침략을 개시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제국 주변의 소국들은 전부 제국의 손아귀에 떨어진 지 오래였다.

그때마다 들려온 제국의 신병기 ‘마장기’에 대한 소문은 공포 그 자체였다.

“궁금한 것이 많을 겁니다. 백번 물어보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나은 법. 자, 일단 직접 보시지요.”

제페쉬가 마장기에 다가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마장기의 흉부가 위쪽으로 열리면서 조종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동안 소문으로만 듣던 마장기의 실체를 목격한 귀족들은 숨소리까지 죽이며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장기의 기본적인 형태는 중장갑옷의 연장선이었다. 고속 이동을 전제로 한 바퀴가 달린 것들도 있었지만 제페쉬의 마장기는 갑옷 형태의 마장기였다.

제페쉬는 익숙한 동작으로 마장기의 조종석에게 앉았다. 그러자 흉부가 닫히며 기묘한 소리와 함께 마장기의 각 부위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SYSTEM ONLINE. POWERD SUIT - No.F121 To start.]

기묘한 고대어의 울림과 함께 마장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장기치고는 적은 편에 속했지만 그래도 키가 4m가 넘는 거체였다.

몸을 일으킨 마장기는 그 특유의 진동음을 뿜어내며 그 위용을 과시했다.

기이이이잉- 쿠궁.

희미한 형광색 빛을 흩뿌리며 마장기는 첫걸음을 뗐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주위를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커다란 목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이 마장기는 기본적으로 탑승자의 목소리를 증폭시켜 주는 기능도 있습니다.”

마장기에 의해 증폭된 제페쉬의 목소리를 들은 귀족들 몇몇은 깜짝 놀라 주저앉기까지 했다. 이를 지켜보던 제페쉬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돌았다.

‘어째서 저것이 여기에 있는 거지?’

굳은 듯 마장기를 노려보고 있는 마하임. 자신이 알던 미래와는 판이하게 다른 현실에 마하임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상체를 일으켜 직립한 마장기는 순간 비틀거렸지만 이내 자세를 바로잡았다.

4m가 넘는 거체인지라 좀 둔해 보이기는 했지만, 일어나 자세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그 위압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제페쉬는 이를 즐기기라도 하듯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마장기는 탑승자의 근력과 방호력을 올려 줍니다. 석궁 따위로는 흠집도 나지 않죠. 거기다 마법과, 정령술 같은 이능의 힘도 효과적으로 방어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은 바로 마장기의 공격력이지요.”

제페쉬는 미리 준비해 놓은 중장갑옷 쪽으로 마장기를 움직였다. 중장갑옷은 상급 기사 이상이 아니면 구경도 할 수 없는 고가의 방어구였다.

그만큼 방어력도 뛰어나서 중장갑옷의 수가 곧 그 나라의 군사력을 판가름하는 지표로 활용되기도 했다.

“이것이 마장기의 힘입니다!”

기이이잉- 콰지직-! 쾅!

마장기의 거대한 팔이 움직일 때마다 중장갑옷은 마치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투구는 첫 일격에 떨어져 나갔고 두꺼운 철갑으로 둘러싸인 흉갑은 마장기의 힘에 짓눌려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렸다.

‘내가 알던 미래가 아냐!’

마하임을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은 확실했다. 시기적으로 분명 앞서긴 했지만, 지금 저곳에 원래 등장해야 할 것은 기껏해야 ‘싸이클롭스’ 정도의 몬스터여야만 했다.

그런데 뜬금없이 마장기라니, 이렇게 되면 계획을 근본적으로 수정해야만 했다.

‘당황하지 말자. 변수는 이미 예상하지 않았던가?’

마하임은 재빨리 생각을 정리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지금 저 마장기와의 정면 승부는 바보짓이었다.

그 미래에서도 마장기와 승부할 수 있었던 자는 시아라와 요한, 이 둘뿐이었다.

그러나 시아라는 아직 만나지조차 못했고 요한 역시 갈 길이 멀었다. 마하임 자신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자 그럼, 경매를….”

“1,000골드 !”

“3,000골드!”

몸이 달아오른 귀족들의 외침은 거침이 없었다. 제페쉬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도 가격은 순식간에 3,000골드를 넘어섰다.

마장기의 가치는 아인족 노예와 비교할 수가 없다. 비단 제국뿐만 아니라 이웃 영지와의 영지전에서도 마장기는 충분히 유용했다.

무력은 곧 돈이 된다. 그것은 변치 않은 진리였다.

“십만 골드!”

바로 그때 들려온 누군가의 외침에 연회장은 순간 조용해졌다. 귀족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일만 골드도 아닌 십만 골드라니,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옮겨졌다. 그곳에는 아니나 다를까 에스탄테 자작이 거만한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었다.

“에스탄테 자작, 지금 장난하는 거요? 십만 골드?! 돈부터 보이시오.”

“그래, 맞아요! 우리 트리비아 공국의 한 해 예산 전부를 합쳐도 십만 골드가 못 되는데!”

화가 난 귀족들은 거세게 에스탄테 백작에게 항의했다. 겉으로 표현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이곳에서 에스탄테 자작에게 좋은 감정을 지닌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쓸 만한 노예가 있을 때마다 압도적인 자금력을 내세워 경매장에서 군림했으니, 어떤 귀족들은 에스탄테가 경매장에 나타나면 그냥 돌아가 버리는 자도 있었다.

“저기 죄송하지만, 십만 골드 확인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항의가 잦아들 생각을 하지 않자 제페쉬는 조심스럽게 에스탄테에게 말했다.

제아무리 에스탄테라도 십만 골드는 상식을 벗어나는 금액이었다. 이쯤 되면 에스탄테가 VIP고객이라 할지라도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크큭, 하하하하!”

제페쉬의 질문에 에스탄테는 갑자기 광소를 터트렸다. 그러고는 마장기가 있는 무대 위로 에스탄테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장기와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멈춰 섰다.

“농담이요, 농담. 저따위 하급 마장기에 십만 골드라니 말도 안 되지, 암.”

“무, 무슨 막말입니까? 에스탄테 자작!”

에스탄테의 말에 발끈한 제페쉬는 외쳤다. 그러나 에스탄테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자신의 말을 이었다.

“막말? 제페쉬 백작은 사기꾼으로 전직하셔도 되겠소. 저거 기동 가능 시간이 하루에 고작 10분이란 사실은 왜 말하지 않는 거요?”

에스탄테의 말에 제페쉬는 변명할 말이 없었다. 전 재산을 다 끌어모아 제국의 눈을 피해 겨우 손에 넣은 마장기였지만, 이 마장기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기동 한계라는 것인데, 무슨 이유에서인가 이 마장기는 10분 이상 연속 기동할 수가 없었다.

10분 정도 움직이면 마장기는 작동을 멈추었고 다시 사용하려면 24시간, 즉 하루가 지나야 다시 사용할 수 있었다.

“어, 어떻게 그것을?!”

“어리석은 사람. 정말 제국에서 네놈이 마장기를 입수한 걸 모르리라 생각했나? 제국을 우습게 보는 것도 유분수지.”

에스탄테 자작은 혀를 차며 말했다. 제페쉬는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깨물었다.

“전부 다 계산된, 다시 말해 함정이란 거지. 제국에 반기를 든 어리석은 귀족들을 척결할 함정. 멋지지 않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제도에 노예를 납품하러 갔다 우연히 만난 브로커의 소개로 구한 마장기.

사실 그렇게 쉽게 제국 최고 기밀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마장기를 얻는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황제의 특명이라 뭔가 대단한 것이 있는 줄 알았는데 고작 저따위 마장기라니. 실망했소이다.”

제페쉬의 귀에는 이미 에스탄테의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제국이 눈치를 챘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충격이었다.

그것은 여기에 모인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부터 제국의 개가 된 거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