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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군주-25화 (25/194)

25화

시문이 자의로 제국 편에 섰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의 최후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시아라를 흑신선의 손아귀에서 탈출시키고 살해당했다고 시아라 본인에게서 전해 들은 기억이 있었다.

만약 사로잡혔다 하더라도 그의 강직함을 고려했을 땐 차라리 죽음을 택했으리라.

그 미래에서도 마법과 약물로 제국은 수많은 반 제국 세력을 아군으로 둔갑시켰다.

아인족 노예를 양산시킨 ‘락슌’ 역시 근원을 따지자면 제국의 작품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 현 상황을 모두 설명할 수 없었지만, 이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막아라! 귀빈들을 보호해!”

“무, 무립니다! 저건 괴물…! 크아악!!”

병사들은 필사적으로 시문을 공격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의 호신강기는 물리 계열의 거의 모든 공격을 막아 냈다.

설령 오러의 힘으로 겨우 호신강기를 뚫어 낸다고 하더라도 그 뒤를 기다리는 것은 시문의 선기발경이었다.

퍼억-!

사방으로 튀는 살과 피. 선기발경에 직격한 몸은 갑옷의 유무를 떠나 산산조각이 났다.

제페쉬의 마장기조차 가볍게 날려 보낸 선기발경이다. 아무리 중장갑옷을 입었다 하더라도 인체에 직격하면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광경이 펼쳐졌다.

그럼에도 병사들은 용감하게 시문을 공격했지만, 그들이 전멸하는 데 걸린 시간은 10분을 넘기지 않았다.

“비켜! 내가 먼저야!”

“기다려 주십시오. 마장기 때문에 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닥쳐라! 어디 감히 귀족 앞에서!”

이 연회장의 유일한 출구인 후문 역시 상황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제페쉬의 마장기가 후문을 완전히 가로막은 것이다.

마장기의 무게는 어림잡아도 3톤은 넘었기에 지금 여기에 모여 있는 사람으로서는 이것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무의미한 저항이다.”

사방이 피와 살로 더럽혀져 있었지만, 시문의 몸에는 핏자국 하나 없었다.

시문은 곧장 몸을 허공으로 날렸다. 마치 깃털처럼 가벼운 움직임. 그리고 시문은 문자 그대로 허공에 멈춰 섰다.

‘허공답보(許空踏步)!?’

마하임은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허공에 멈춰 선 시문은 마치 지상을 걷는 것처럼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압도적인 내공으로 중력마저 거스르는 축지의 상위 기술.

“아악! 누가 저 괴물 좀 막아 보란 말이야!”

그가 허공을 걸어오는 것을 본 귀족들은 공포에 질려 더욱 발악했다. 하지만 후문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페쉬의 마장기는 완전히 침묵 상태였고 안에 타고 있는 제페쉬의 생존도 불투명했다.

시문은 귀족들의 바로 머리 위까지 걸어왔다. 귀족들은 다리가 굳어 도망도 치지 못하고 그저 시문을 바라볼 뿐이었다.

“살려 주시게! 살려만 주면 뭐든지 하겠네….”

“그냥 못 본 척만 해 줘도 돼! 영지! 그래, 내 영지 절반, 아니 전부라도 주겠어!”

귀족들은 눈물 콧물을 쏟으며 시문에게 애원했지만, 그는 무심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바로 그때 허공에서 지상으로 훌쩍 뛰어내린 시문은 귀족들 가운데 섰다.

“하찮은 그대들의 진기지만 받아 가도록 하겠소”

시문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귀족 중 하나의 얼굴로 향해 손을 뻗었다. 귀족은 놀라 뒤로 피하려 했지만, 그의 손길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 귀족의 마지막이었다.

시문의 손이 닿은 부분부터 귀족은 급격하게 말라가기 시작했다. 덩치만 해도 시문의 두 배, 턱살이 어깨에 닿을 정도로 살이 찐 거구였지만 순식간에 뼈와 가죽만 남은 미이라로 변했다.

‘흡정대법(吸精大法)!’

마하임의 얼굴이 다시 한번 일그러졌다. 저 기술은 선술이 아니다.

시현류 유도 암살술! 다시 말하자면 흑신선들이 쓰는 사술! 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역시 순도가 낮군….”

시문은 거침없이 귀족들을 농락했다. 자비 따위는 없었다. 특별한 무장도, 그렇다고 무예도 익히지 않은 귀족들은 시문의 손쉬운 사냥감이었다.

몇몇은 도망을 치려고 발버둥을 쳐 보았지만, 시문이 이를 놓칠 리가 없었다. 좀 멀리 떨어져 있다 싶으면 권기를 날려 쓰러트린 뒤 어김없이 흡정대법을 사용했다.

저항은 무의미했다. 그는 진정한 전장의 사신이었다.

“사, 살려….”

마지막 귀족이 그의 손아귀에서 버둥거리다 미라로 변했다. 연회장에 남은 사람이라고는 에스탄테와, 처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그 자리에 굳은 듯 서 있는 아나모네와 마하임뿐이었다.

“호오. 마하임라고 했던가? 그거 강단은 있구려.”

에스탄테는 진심으로 감탄한 듯 둘을 바라보고 말했다. 시문은 손에 들려 있는 미라를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고는 에스탄테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 다크엘프는 살려 두도록. 죽이기 전에 맛은 봐야 하지 않겠느냐?”

입맛을 다시는 에스탄테. 지금 이 상황에서도 그의 변태적 취향은 여전했다.

시문은 잠시 에스탄테를 노려보다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마하임이 서 있는 곳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물러서라, 루.”

아나모네는 자신의 그림자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2차원 공간에서 물리 공간으로 실체화하는 그녀의 검. 다크엘프의 그림자 은신술의 응용이었다.

그러나 검은 뽑아 들었지만, 공격할 엄두는 낼 수 없었다.

시문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살기.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시문이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몇 번이나 아나모네는 시문에게 말을 걸어 보았지만, 그는 눈앞의 적을 학살할 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 옛날 자신을 구해 주고 무예를 가르쳐 주었던 인자한 스승, 시문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 그의 앞에 서 있는 저자는 전장의 사신 그 자체였다.

“루, 도망쳐라. 저건 상대해선 안 된다.”

약간은 떨리는 목소리. 겉으로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지만, 아나모네는 전율하고 있었다. 시문의 강함은 이미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넘어서고 있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저 힘 앞에 아나모네는 무력감마저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번에는…. 이번만큼은!’

흑신선에게 멸망당한 고향 마을의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저 무력하게 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 억울함, 그 분노가 아나모네를 극도로 고양시켰다.

슈아아악-

솟아오르는 선명한 검기. 선명도를 볼 때 검강(劍罡)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의 기운이다.

그러나 저 시문에게 얼마나 통할지는 미지수였다. 그러나 싸울 수밖에 없었다. 싸워야만 했다.

진정으로 섬기고 싶은, 진정으로 섬길 만한 ‘루’를 이제 겨우 만났는데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아나모네는 이를 악물었다.

“마음은 고맙지만, 이건 나의 싸움이다.”

퍽-

마하임은 자신의 손으로 아나모네의 뒷목을 날카롭게 끊어 쳤다. 힘없이 무너지는 아나모네.

멀어지는 의식 사이로 아나모네는 ‘왜?’ 하고 의문을 떠올렸지만 이내 모든 것은 어두워졌다.

마하임은 의식을 잃은 아나모네를 받아 들어 연회장 한쪽 구석에 눕혔다.

‘이런 곳에서 아나모네를 잃을 순 없지.’

아무리 검기를 사용할 수 있는 아나모네라도 시문을 이길 수 있는 확률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무엇보다도 아나모네는 시문의 선술을 방어할 만한 기술이 없었다.

그녀는 정식으로 선술을 배운 것도 아니고 오직 검기에 특화된 기술밖에 사용치 못했다.

설령 검강으로 시문과 비등하게 싸웠다 하더라도 선기발경 한 방이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적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하지만 마하임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 악몽과 같은 미래와 비교한다면 지금의 상황은 크게 나쁘다고도 할 수 없었다.

마하임은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나노머신 시류의 활성화시켰다.

다른 힘이라면 몰라도 이 힘이라면, 시현류와 상대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마하임의 싸움은 시작되었다.

* * *

같은 시각, 제페쉬 백작의 저택 소연회장.

이곳은 제페쉬 백작의 사병을 비롯하여 연회에 참석한 귀족들과 함께 온 경호병들이 대기하고 있는 구역이었다.

저택 안으로 진입한 요한과 세실, 그리고 그녀의 리자드맨들은 곧장 이곳으로 향했다.

저택의 구조상 노예 거래가 이루어지는 대연회장으로 가려면 이곳을 반드시 거쳐 가야 했다.

이미 요한이 길목의 경비병들을 정리해 두었기에 그곳까지 가는 것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이런, 씹어 먹을!”

소연회장에 도착한 세실은 저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소연회장 안에 펼쳐진 광경.

그곳에서는 광기의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아인족 노예들은 병사들의 장난감이 되어 인형처럼 허우적거렸다.

락슌에 중독된 아인족들은 반항은 고사하고 몸조차 제대로 못 가누고 있었다.

오랜 학대와 락슌으로 인한 금단 증상으로 아인족들의 몰골은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였다.

“…….”

요한은 주먹을 불끈 쥔 채 눈앞의 광경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소연회장 구석에는 아인족들의 싸늘하게 식어 버린 시체가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마치 먹이를 찾는 언데드처럼 흐느적거리는 병사들. 그들 역시 그다지 제정신은 아니었다.

“락슌…인가?”

요한도 락슌의 힘은 익히 알고 있었다. 락슌은 세뇌를 위해 쓰이기도 하지만 소량 사용 시, 그 어떤 마약보다 강한 쾌락을 선사했다.

워낙 값비싼 약이라 평소라면 구할 수 없었지만, 오늘처럼 노예 시장이 열릴 때면 또 달랐다.

귀족들과 함께 온 그들의 사병들은 락슌을 얼마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은 락슌을 일종의 마약처럼 사용함으로써 지금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잘 봐 둬, 요한. 네 아버지가 하는 일이 바로 저런 거야.”

세실은 애써 살기를 죽이며 말했다. 요한은 그저 고개를 아래로 떨어트릴 뿐이었다.

요한이라고 그의 아버지 제페쉬를 설득해 보려고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노예 거래만큼은 결사반대했지만, 제페쉬는 요한의 말을 듣지 않았다. 최근에는 얼굴을 마주 보는 것조차 피했다.

그 이유는 요한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수도 아르케비니아에서 쫓겨나다시피 온 곳이 바로 이곳 윈드시크릿이었다.

요한 자신도 이 사건으로 기사 학교에서 자퇴해야만 했다. 그리고 하나뿐인 여동생은 왕실의 궁녀로 끌려가 생존조차 알 수 없다.

아마도 그 무렵부터일 것이다. 긍지 높은 귀족이었던 제페쉬가 복수, 오직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진 속물이 된 것이.

“자, 이제 어떻게 할 거지? 우리 경비대장님.”

세실은 자신의 레이피어를 뽑아 들며 요한에게 말했다.

요한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지금까지는 봐도 못 본 척 무시해 왔지만, 더는 자신을 속이기 싫었다.

요한은 두말없이 자신의 허리춤에 차고 있던 바스타드 소드를 천천히 뽑아 들었다.

“저는…. 아버지와는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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