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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군주-26화 (26/194)

26화

요한 역시 그 누구보다 가문의 재건을 원했다. 그리고 헤어진 여동생 역시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저건 답이 될 수 없었다. 굳이 기사도를 논하지 않더라도, 저러한 노예 거래는 반인륜적이며 용서받을 수 없는 중범죄였다.

“영주님의 명을 시행하겠습니다.”

투구를 고쳐 쓴 요한은 검에 오라를 일으켰다. 시릴 듯이 차가운 오라가 그의 검에서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그를 본 세실은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좋아, 좋아-! 역시 경비대장님이셔. 좋아. 우리도 가자, 애들아! 단 한 명도 남기지 말고 싹 쓸어버려!”

“크르르릉! 머, 먹어도 되나? 크킁.”

“죽을래?”

“케켁! 노, 농담이다.”

“돌격!”

요한을 선두로 세실의 리자드맨들은 소연회장으로 난입했다.

이들의 갑작스러운 등장에도 연회장의 병사들은 멍한 얼굴로 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슈캉- 퍼퍼퍽!

요한의 오라로 번뜩이는 검이 락슌에 취해 있던 두 명의 병사들을 단숨에 찢어발겼다.

병사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되어 바닥을 굴렀다.

“저, 적이다!”

병사들의 외침이 사방에서 울려 왔다. 뒤늦게 무장을 갖추는 이들도 있었지만, 이들 대부분은 ‘락슌’에 취한 상태. 제대로 싸움이 될 리 없었다. 그런 이들을 요한의 오라소드가 유린했다.

“이거 뭐, 우리가 끼어들 것도 없네.”

뒤에서 이를 지켜보던 세실은 혀를 내둘렀다. 새하얀 중장갑옷으로 완전무장한 요한은 일말의 자비도 없이 병사들을 살육했다. 그것은 마치 사나운 폭풍과 같았다.

요한의 공격 범위에 있는 병사들은 문자 그대로 산산이 찢겼다.

오라가 만들어 내는 특유의 물질 붕괴 현상이 발련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갑옷이든 신체든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소멸로 이끌었다.

“케에엑 질 수 없다! 놓치지 마라!”

살벌하기 그지없는 요한의 무위에 주눅이 들어 있던 리자드맨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싸움이라면 먹고 자는 것 다음으로 좋아하는 그들인지라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다. 더욱이 인간을 학살할 기회는 흔치 않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사냥을 하고서도 먹을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이미 혈향에 취해 버린 그들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그리고 펼쳐진 난전. 병사들과 리자드맨은 뒤엉켜서 그야말로 진흙탕 싸움이 시작됐다.

“그, 그만둬!”

“케르르르, 죽어라 인간!”

“크아아아아갹-!”

리자드맨과 병사들의 비명이 뒤엉켰다. 그러나 이 싸움은 시작되기 전부터 승패가 결정된 일방적인 학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오라를 다룰 수 있는 기사급 지휘관은 대부분 대연회장에서 그들의 주인을 경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이곳에는 별 볼 일 없는 잡졸병들뿐. 하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제길! 뭐 이리 많아?!”

자신의 레이피어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세실은 소리쳤다.

가장 큰 문제는 적의 수였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었다. 구석구석 튀어나오는 병사들, 얼핏 봐도 200은 넘어 보였다.

거기다 대다수가 중장갑옷으로 무장한 정예병이었다. 처음에는 급습 때문에 우왕좌왕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린 병사들이 반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문제는 그뿐 아니었다. 이들이 먹은 ‘락슌’의 영향으로 치명상이 아니면 잘 죽지도 않았다.

당장 팔만 하나 잘려도 쇼크로 사망에 이르는 것이 인간이었다. 그러나 락슌은 인간의 공포심과 통각을 마비시켰기에 좀비나 다름없는 맷집을 자랑했다.

“쿠에에엑 이, 인간들 이상하다. 크르르르.”

“닥치고 밀어붙여!”

끈질기게 공격해 오는 병사들에 질린 리자드맨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서자 세실이 선두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소환한 것은 바람!

“분노한 바람의 울부짖음, 나 그대의 숨결에 영혼을 건다! 나와랏! 실프-라!”

세실의 외침과 동시에 맹렬한 돌풍이 소연회장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바람의 중급 정령 ‘실프-라’가 물질계에 소환됐다.

하급 정령은 일반인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중급부터는 달랐다. 더욱이 정령 빙의가 아닌 광역 소환으로 물질계에 나타난 바람의 중급 정령은 분명한 형상을 지니고 있었다.

키이이이이-!

그것은 마치 거대한 맹금류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 크기는 리자드맨보다 컸다. 푸르고 투명하게 빛나는 그것은 높다면 높고 낮다면 낮은 소연회장의 천정을 선회하며 날카롭게 포효했다.

그리고 락슌에 취해 좀비처럼 몰려다니는 병사들을 향해 내리꽂혔다.

휘이이익- 크아아악!!

아악- 괴, 괴물이다!

아무리 락슌으로 인해 공포심이 사라졌다 하더라도 살의 가득한 정령계의 야수가 날뛰자 병사들은 도망치기 바빴다.

그리고 그 뒤를 리자드맨들이 바짝 쫓으며 거침없이 병사들을 학살했다. 저 실프-라가 세실의 작품이라는 것을 아는 리자드맨들인지라 망설임 같은 것은 없었다.

병사들의 수는 착실하게 줄어 갔다. 나름 방어진을 갖추고 조직적으로 대응하는 병사들도 있었지만 실프-라의 출현으로 진은 단숨에 와해되고 말았다.

거기에 오라를 흩뿌리며 전장을 주름잡는 요한의 활약은 리자드맨을 주눅이 들게 할 정도로 살벌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녀석들의 숫자였다. 요한과 세실, 리자드맨 모두 합쳐 봐야 40명도 되지 않았다.

반면 수가 많이 줄었다고 하더라도 병사들의 아직 100명 이상 남았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쿠쿵-!

바로 그때 들려온 소리, 그리고 뒤이어 땅까지 흔들거렸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 소리가 들려온 것은 마하임이 있는 대연회장 쪽이었다.

“뭐야? 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세실이었다. 뭔가 섬뜩한 기운이 대연회장을 중심으로 매섭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흡사 분노의 정령의 기운과 비슷했지만, 그와는 다른 묘한 이질감. 세실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요한 역시 얼굴이 따끔거릴 정도로 강한 기운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저 대연회장에서 뭔가 이변이 벌어지고 있었다. 문이 닫혀 있어서 내부의 상황을 알 수는 없었지만, 불길한 예감에 요한은 조급함부터 앞섰다.

그러나 대연회장으로 가는 길목에는 아직 수많은 적이 가로막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오늘 종일 싸워도 대연회장까지 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하학- 하아- 모두 비켜 주십시오!”

숨을 몰아쉬는 요한. 과도한 오라 사용으로 체력 소모가 상당했다. 그러나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여기서 승부를 내야만 했다.

요한의 검에서 오라가 폭발하듯 솟아올랐다. 그것은 마스터 소드급만 사용할 수 있다는 오라 익스플로전의 전조.

요한은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화아아앗-!

찬란한 섬광과 함께 고밀도로 압축된 오라의 덩어리가 병사들 사이로 떨어졌다.

그 크기와 위력은 마하임과 대련할 때 사용한 오라 익스플로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오라 익스플로전은 마치 살아 있는 양 꿈틀대며 굶주린 맹수처럼 병사들을 집어삼켰다.

“이거, 영주보다 더 괴물 아냐?”

세실은 오라 익스플로전의 위력에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살아 있는 병사든 죽은 병사든, 오라 익스프로젼의 사정거리 안에 있던 것은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고 깨끗하게 사라져 버린 것이다.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영주님께로!”

요한은 숨조차 갈무리하지 않고 대연회장 쪽으로 달렸다. 오라 익스플로전으로 활로를 뚫었을 뿐, 아직 적은 사방에 포진하고 있었다.

요한이 선두에 나서자 세실과 리자드맨이 곧바로 가세했다. 곧장 대연회장 쪽으로 향하는 그들.

이쯤 했으면 병사들의 사기도 떨어질 만도 한데, 불 속으로 뛰어드는 나방처럼 병사들은 끊임없이 요한 일행을 괴롭혔다.

게다가 대연회장으로 다가갈수록 불길한 기운은 강해졌다. 대체 대연회장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요한은 상념을 떨쳐 버리려는 듯 자신의 바스타드 소드에 다시금 오라를 일으켰다.

걱정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우선은 이 관문을 넘어서야만 했다. 요한은 이를 악물었다.

* * *

“하하하”

마하임의 허탈한 웃음이 대연회장을 울렸다.

역시 시문은 강했다. 대결을 시작한 지 고작 3분 만에 마하임은 제대로 서 있기조차 어려울 정도의 타격을 입었다. 그것도 단 일격에 말이다.

[경고. 2번 3번 갈비뼈 골절. 내출혈 발생. 즉시 전장을 이탈할 것을 권고합니다.]

오페라의 비명과 같은 알림이 연속으로 머릿속을 울려왔다. 하지만 마하임을 물러설 수 없었다.

“오오, 사신의 일격을 견디다니! 정말 대단하시오.”

에스탄테 자작은 진심으로 놀란 듯 마하임을 칭찬했다. 하지만 마하임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몸을 일으켰다.

휘청거리는 마하임, 귀에선 끊임없이 이명이 들려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단 일격이었지만 아무래도 상당한 타격을 입은 듯했다.

그의 첫 공격은 어렵지 않게 피했다. 권풍이라 불리는 무형의 기운이 사방에서 폭풍처럼 몰아닥쳤지만, 마하임 역시 선술에 대해 어느 정도는 견식이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축지로 단숨에 거리를 좁힌 시문의 선기발경만큼은 피할 수 없었다.

“쿨럭쿨럭, 젠장!”

거칠게 기침을 하는 마하임. 입가에 선명한 핏자국이 보였다. 치명적이진 않지만 상당한 내상을 입은 것은 틀림없었다.

발경에 직접 당한 것도 아니었다. 갑작스럽기는 했지만, 충분히 예상한 공격이었다.

그야말로 간발의 차이로 마하임은 선기발경의 힘이 담긴 그의 정권을 피했다.

그러나 그의 선기발경은 생각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마하임이 몸을 비틀어 발경을 피하자 그의 발경은 그대로 마하임의 등 뒤 연회장의 기둥을 강타했고 그 직후 기둥은 문자 그대로 폭발했다.

‘방심하다니!’

기둥의 파편을 뒤집어쓴 마하임의 몸은 피투성이로 변했다. 몸을 움츠려 방어하지 않았다면 이 파편에 맞아 죽었을지도 몰랐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마하임은 시문을 바라보았다.

그냥 서 있을 뿐인데도 빈틈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다고 안심할 수도 없다.

그의 축지는 블링크(단거리 순간이동 마법)를 능가한다. 작은 움직임 하나라도 놓치면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나의 공격을 피하다니…. 일단, 칭찬은 해 주지.”

시문은 여전히 굳은 얼굴이었지만 목소리만큼은 놀라움이 담겨 있었다. 마하임은 그런 그를 다시금 노려봤다.

생각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시문은 마하임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시문과 정식 대면은 앞으로 3, 4년 뒤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의 상황은 충격 그 자체였다. 천하무적이라는 명성의 그 시문이 제국의 편에 서다니, 마하임에게 있어선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한 가지만 묻지. 혹시 ‘마하임’란 이름 들어 봤나?”

“그런 이름 모릅니다.”

그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딱 잘라 말했다.

마하임의 미래에 대한 기억은 지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시문과는 아무런 관계없다는 것이 다시 한번 확인됐다.

물론 그가 세뇌되었을 확률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지금 이 세계에서 그와 마하임은 문자 그대로 남남.

그가 세뇌되었건 스스로 제국 편에 섰건 마하임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이야기다.

‘제길, 젠장할!’

마하임은 주먹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힘껏 움켜쥐었다.

생각해 보면 자신이 체험한 그 미래가 그대로 재현된다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완전히 미래를 뒤튼 큰 사건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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