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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군주-27화 (27/194)

27화

‘포기는 이르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마하임은 몸을 가다듬었다.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았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미래는 승자가 만드는 것. 지나간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이라면 바꿀 수 있었다.

“와라, 제국의 사냥개여. 끝을 보자!”

“…….”

마하임의 도발에도 시문은 아무런 감흥도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시문은 사라졌다.

[경고! 적 공격 경로 확인 불가! 급속 접근!]

오페라의 경고가 다시금 울려 퍼졌다. 말할 것도 없이 시문은 또다시 축지를 사용한 것 같았다.

보고 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본능적인 감각만을 의지해서 그의 공격 패턴을 읽어야만 했다. 그렇다면 그가 노릴 만한 곳은….

‘머리!’

마하임은 뒤로 물러나며 머리를 숙였다. 그 직후 시문의 내공이 가득 실린 찌르기가 마하임의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시문의 공격 패턴은 그의 딸, 시아라와 매우 흡사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마하임은 이 일격에 죽음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게다가 지금 그의 움직임은 정상이 아니었다.

강력한 기술을 남발하고 있지만, 기술 하나하나가 너무 정직했다. 다음 공격이 무엇인지 뻔히 보이는데 당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기회는 반드시 온다.’

여전히 그에게 빈틈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지금 이대로라면 승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그러나 시문은 아직 마하임이 시현류의 기술을 알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가 노리는 것은 이 작은 차이가 만들어 낼 빈틈, 그 한순간이었다.

“에잇, 뭐 하는 거냐! 빨리 죽여 버려!”

멀리서 둘의 대치를 지켜보던 에스탄테가 소리쳤다. 그는 당장이라도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아나모네를 범하고 싶었지만, 마하임과 시문이 뿜어내는 흉흉한 기세에 눌려 연회장 구석에 숨어 역정을 낼 뿐이다.

“…명령을 수행한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시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하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제 마무리 지어야겠다.”

손을 치켜드는 시문. 그 목소리는 처음과 다름없었지만,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강렬하다 못해 마하임의 뼛속까지 울릴 정도다.

그러나 마하임은 꿈쩍도 하지 않고 그 모든 것들을 정면으로 받아 냈다.

마하임의 예상이 맞다면 그다음 올 것은 분명 권풍.

‘지금이다!’

이 정도 기운이라면 일반적인 권풍은 아니다. 소위 ‘권풍난격’이라 불리는 광범위 공격 기술이 틀림없었다.

큰 기술에는 반드시 리스크가 따르는 법. 시현류라고 다를 것이 없다.

특히 저 권풍난격은 시전에서 발동 직전까지 꼼짝도 못 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기회는 단 한 번. 마하임은 땅을 박찼다.

‘축지!’

원칙적으로는 내공 없이는 축지를 사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흉내는 가능했다.

축지는 일종의 ‘보법’. 내공이 없어도 보법을 흉내 낼 수 있으면 비슷한 효과는 낼 수 있었다. 물론 기존의 축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조악한 것이었지만, 마하임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파팟!

축지가 발동하자 마하임은 마치 땅 위를 날듯 시문과의 거리를 단숨에 좁혔다. 이를 본 시문은 처음으로 안색이 바뀌었다.

‘선기발경!’

혼신의 힘을 다해 주먹을 내지르는 마하임. 시현류의 기술은 시문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마하임은 그 미래에서 부족하게나마 시현류의 기술을 익히고 있었다.

비록 열화된 카피에 불과한 마하임의 선기발경이었지만, 제대로 맞출 수만 있다면 치명상을 입히기 충분했다.

터텅-!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마하임의 발경이 시문의 배를 강타했다.

뒤로 주욱 밀려가는 시문. 그러나 약간 비틀거렸을 뿐, 이내 자세를 바로 잡았다.

‘실패인가?!’

분명 발경은 제대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는 전혀 타격을 입은 것 같지 않았다.

발경의 위력이 약했을까?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호신강기를 사용할 수 있다면 금강불괴(金剛不壞)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금강불괴는 거의 모든 물리 공격을 무효화시키는 기술. 마하임의 허술한 발경이 이를 뚫어 낼 리 만무했다.

“그 기술… 설마 흉내 낸 건가?”

시문의 표정이 다시 한번 변했다. 시현류는 일족 비전의 무예, 특히 선기발경과 축지 같은 기술은 직계 전승자가 아니면 배울 수 없었다.

그런 기술을 연이어 사용했으니 이러한 반응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뭐, 아무래도 좋다. 넌 여기서 죽을 테니.”

시문의 기감이 갑자기 사라졌다. 뒷짐을 지고 천천히 마하임에게 다가오는 시문.

그가 뿜어내는 살기는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마하임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이제 평범한 공격은 시문에게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

성큼성큼 다가온 시문은 마하임의 바로 앞에 섰다. 마하임 역시 더는 물러서지 않고 그와 대치했다.

여기서 기선까지 제압당하면 절대 이길 수 없다. 팽팽한 긴장감, 둘은 상대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부웅-

선공을 날린 건 시문이었다. 날카로운 발차기, 발차기는 위력이 강한 만큼 예측이 쉬웠지만 시문의 공격은 예측은 고사하고 바로 눈앞까지 발이 다가왔을 때야 겨우 확인했다.

비록 선기발경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의 공격 하나하나에는 내공이 담겨 있었다.

정면으로 막으면 그야말로 자살 행위, 마하임은 몸을 비틀어 아슬아슬하게 그의 발차기를 옆으로 흘렸다.

“크윽-!”

역시 완벽하게 피할 수는 없었다. 어깨에 살짝 스쳤을 뿐인데도 팔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은 고통이 엄습했다.

이를 악물고 참는 마하임. 여기서 고통에 머뭇거린다면 다음 공격을 대비할 수 없었다.

[신체 데미지 증가. 어깨 인대 파열이 확인되었습니다. 즉각 전장에서 이탈할 것을 추천합니다.]

‘망할-!’

오페라의 경고가 마하임의 머릿속에 연이어 울려 퍼졌다.

마하임도 할 수만 있다면 오페라의 경고를 따르고 싶었다. 그러나 시문의 매서운 공격에 마하임은 도망치지도, 공격할 수도 없을 정도로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그저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듯한 시문의 공격이었지만, 그 위력은 발석차에서 날아온 돌덩이에 두들겨 맞는 듯한 기분이다.

공격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한 방이라도 허용한다면 그대로 전투 불능, 아니 즉사할지도 몰랐다.

“제법이다만, 이것도 한번 막아 봐라.”

공격의 흐름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날카로운 발차기 대신 주먹 찌르기 공격이 들어왔다. 저건 말할 필요도 없이 선기발경이었다.

지금 상황에선 스치는 것만으로도 치명상에 이를 수 있었다. 마하임은 재빨리 축지로 시문과의 거리를 벌렸다.

“기다렸다.”

시문은 순간 주먹을 갈무리하고 땅을 박찼다.

‘허초!?’

마하임이 이를 깨달았을 땐 이미 시문이 축지를 사용한 뒤였다. 축지는 뛰어난 이동 기술이었지만 연속해서 사용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마하임이 사용하는 축지의 범위는 고작 30m 남짓이었다.

정확한 타이밍만 안다면 시문이 마하임을 따라잡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다.

“그만 끝내지.”

마하임이 멈춰 서기가 무섭게 시문은 정확히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는 가차 없이 선기발경을 날렸다.

“…….”

갑작스러운 정적. 시문은 주먹을 뻗은 채로 굳은 듯이 서 있었다. 그의 발경은 마하임의 가슴에 정확히 적중했다.

마장기마저 일격에 제압한 시문의 발경이었다. 이 정도의 위력이라면 갑옷을 유무와 상관없이 마하임의 상체는 통째로 날아가 버려야 옳았다.

시문도 그러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마하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뒤로 훌쩍 뛰어 그와의 거리를 벌렸을 뿐이다.

“뭐지…?”

시문은 자신의 손을 거둬들이며 말했다.

단순히 타격을 주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이 느낌은 마치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주먹을 휘두른 것 같았다.

“글세, 뭘까?”

마하임의 말에는 거짓이 없었다. 그 역시도 이 기술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는 없었다. 일단 ‘경기공’이라고 이름은 붙였지만, 이것이 경기공일 리 없다.

경기공이란 내공을 극도로 억제하여 물리 세계에서 자신을 지우는 것을 극의로 한다. 그러나 마하임에게는 내공이란 것 자체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자신의 저주 받은 몸뚱아리를 이용한 것이었다.

마하임의 몸속에는 그조차 알지 못하는, 마나 심지어는 생명력 그 자체까지 빨아들이는 미지의 ‘무언가’가 있었다.

마하임은 그 무언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겨 버렸던 것이다.

그 결과 마하임은 ‘경기공’과 비슷한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고작 몇 분밖에 사용할 수 없지만... 충분하다!’

“꽤나 흥미로운 걸 보여 주는군. 좋다. 지금 부터는 전력으로 상대해 주마”

시문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얼굴에는 흐릿한 미소까지 보였다. 불길한 예감. 그리고 그 불길한 예감은 곧 현실이 되었다.

챙!

마하임은 본능적으로 오페라를 치켜들어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행동이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오페라는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하늘로 튕겨져 올라 바닥에 박혔다.

“거슬리는군. 그 검.”

“큭!”

“이제 죽어라.”

마하임이 인식할 수조차 없는 짧은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의 몸은 허공으로 거짓말처럼 내던져졌다.

무슨 기술인지 파악할 시간조차 없다. 그런 마하임의 앞에 시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어할 여유는 주지 않겠다.”

퉁-!

이번에도 마하임은 시문의 공격을 보지도 못했다. 마하임은 둔탁한 소리와 함께 땅에 처박혔다. 이번 역시 고통은 없었다.

반쯤 도박으로 사용해 본 것이었지만 ‘경기공’은 그의 기술들을 완벽히 무효화시켰다.

곧장 몸을 일으키려는 마하임. 하지만 이내 다시 무릎을 꿇고 말았다.

‘크윽’

분명 시문의 공격을 막아 내는 것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마하임의 이 경기공은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그 ‘무언가’에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체력뿐만 아니라 생력 그 자체까지도 급속히 감소했던 것이다.

그 증거로 마하임의 눈과 코, 귀 할 것 없이 붉은 피를 흘러내리고 있었다.

급속도로 희미해지는 의식. 마하임은 이를 악물고 버텼지만 쓰러지지 않는 것이 고작이었다.

“쿨럭, 쿨럭.”

마하임은 붉은 피를 울컥 토해 냈다. 마하임은 유사 경기공을 이용하여 시문의 공격을 막아 내긴 했지만, 이것의 반발로 인해 온몸이 터질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마하임의 텅 빈 단전에서부터 시작된 통증은 이내 혈도를 타고 온몸을 관통했다.

“크아악-!”

고통에 몸부림치는 마하임. 그런 마하임을 무심히 내려다보는 시문.

애초에 마하임은 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지금까지 버틴 것도 사실 기적에 가까웠다. 시문은 다시금 손을 치켜들었다.

츄아아악-!

시문이 손을 휘두르자 매서운 권풍이 마하임의 몸을 종이처럼 허공으로 날려 버렸다.

더는 저항할 힘도 의지도 남아 있지 않은 마하임. 그는 극심한 허탈감과 무력감에 몸을 맡길 뿐이다.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던가?’

온몸이 부서질 것만 같은 고통에도 어째선지 의식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자신의 몸이었지만 타인의 것인 양 현실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지난 수개월 동안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이번에는, 이번만큼은 절망의 수렁에서 벗어나리라 미친 듯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그러나 세상에는 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분명 있었다.

‘운명이란 바꿀 수 없기에 운명인 것을…. 용서해 줘, 시아라. 나는 여기까지인 것 같아.’

이번 생에서는 자신의 약혼녀, 시아라조차 만나지 못했다. 어떻게 일이 이렇게까지 틀어져 버렸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마하임은 그저 쉬고 싶을 뿐, 그렇게 모든 것은 끝나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였다.

Operating condition of 'Mento system' has been satisfied.

[시스템 기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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