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끝없이 펼쳐진 어둠의 공간 가운데 나타난 새하얀 글씨들.
난생처음 보는 글귀였지만 어째선지 마하임은 이것이 뜻하는 바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시작되었다.
confirmed VIP ID
[VIP 사용자 ID 확인.]
Operater's Excessive bleeding and dropping heart beat rate are observed.
[사용자 심박 저하 및 과다 출혈이 파악되었습니다.]
Confirmed as the first class state of emergency.
[1급 비상사태로 인식.]
Asking for urgent back up.
[긴급 지원을 개시합니다.]
쏟아지는 정보와 지식의 대향연.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엄청난 양의 정보가 마하임의 의식 안으로 범람한다.
그리고 그것은 죽어 가던 마하임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 이것은?!’
그의 단절된 뉴런이 폭발하듯 호르몬을 쏟아 냈다. 싸늘하게 식어 가던 그의 동맥에 새로운 피가 흘렀다.
멈춘 것이나 다름없던 마하임의 심장이 다시금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하임은 눈을 떴다.
[긴급 소생 시스템 실행 완료. 언어 동기화 완료. 대륙 공용어로 재설정.]
눈앞에 펼쳐진 세계는 이전과 전혀 달랐다. 이전에는 알지 못한 수많은 지식과 정보들이 실시간으로 마하임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것은 지금 이곳의 사소한 정보도 놓치지 않았다. 주변의 온도, 생체 반응 수치, 각종 위험 요소들은 직관적으로 표현했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나타나자 마하임은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마하임의 의사를 완전히 무시한 채 순간순간 나타났고 또한 변해 갔다.
“놀랍군. 그런 몸으로 다시 일어서다니.”
시문의 놀란 얼굴이 마하임의 눈에 들어왔다. 피투성이의 얼굴, 몸 역시 성한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그런데도 마하임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몸을 일으켰다.
[경고, 적대 성향의 생명체 감지. 긴급 회피 요망]
시류의 경고가 끝나기가 무섭게 시문은 축지를 사용해 그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축지를 사용한 시문은 웬만한 동체 시력으로는 잔상조차 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 마하임의 눈에 보이는 시문의 움직임은 느리다 못해 정지한 것만 같았다.
마하임은 그저 몇 걸음을 옮기는 것만으로 간단히 시문의 공격을 피해 냈다.
[적 성향 선술 계열. 자력 배제는 불가능하다 사료됨. 500M 이내 지원 가능 유닛의 유무를 탐색합니다.]
시문은 멈추지 않고 다음 공격을 이어 갔다. 공격 속도는 전보다 두 배는 빠른 것 같았다.
그러나 마하임이 보기에는 여전히 느리게만 보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그가 느려진 것만큼이나 마하임 자신도 느려진 것이다.
[파워드 슈트 F-121 발견. 파손도 30%, 기동 가능한 것으로 파악됨. 해킹 완료. 전투 지원 개시]
마하임에게 마지막 일격을 날리려던 시문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쿠쿵-!
묵직한 충격음과 함께 거대한 무언가가 마하임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제페쉬의 마장기였다.
시문이 멀어지자 마장기의 중앙에 있는 해치가 열리며 조종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종석 안에는 피투성이가 된 채 의식을 잃고 있는 제페쉬의 모습이 보였다.
얼핏 보면 죽은 것 같지만, 약하게나마 숨을 쉬고 있었다. 아마도 마장기의 두꺼운 장갑 덕분에 즉사는 면한 것 같다.
마하임은 마치 홀린 것처럼 제페쉬를 마장기의 조종석에서 끌어내린 후 그 자리에 올라탔다.
[탑승 확인. 동력 추가 확보를 위해 메인 엔진을 임계 운전 폭주시킵니다. ‘비스트’ 모드로 이행. 전력으로 적을 배제합니다.]
해치가 닫히자 마장기에서 흐릿하게 흘러나오는 빛이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마치 경련이라도 하듯이 마장기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기이이이이잉-!
마장기에 흘러나오는 괴성. 그것은 기계에서 나올 법한 소리가 아니었다.
마장기는 그대로 자세를 낮추더니 마치 쏘아진 화살처럼 시문을 향해 돌진했다.
쿵쿵쿵-!
무게 3톤짜리 마장기의 질주는 그 자체만으로도 위협적이었다. 게다가 제페쉬가 조종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마장기는 빠르고, 또한 민첩했다.
부웅-
순식간에 시문과의 거리를 좁힌 마장기는 거침없이 주먹을 뻗었다. 갑작스러운 마장기의 공격에 시문은 양손을 교차시켜 마장기의 공격을 막았다.
파깡!
그러나 이번 공격은 제페쉬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마장기의 질량과 운동 에너지가 합쳐지자 천근추와 금강불괴를 무시하고 시문은 보기 좋게 허공으로 튕겨졌다.
[목표포착. 포스캐논 압축률 최대. 발사-!]
튕겨진 시문을 향해 마장기의 커다란 팔이 움직였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눈부신 섬광이 터지듯 뿜어져 나왔다.
단순 수치로만 따져도 제페쉬가 사용한 포스캐논의 3배 이상 강력한 플라즈마의 빛줄기.
그것은 시문을 단숨에 삼킨 뒤 연회장의 외벽을 증발시키며 저택 밖으로 솟구쳐 올랐다.
휘이잉-
포스캐논에 의해 휑하게 뚫린 구멍을 통해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구멍의 크기는 마장기조차 자유롭게 오갈 수 있을 정도로 컸다.
빛이 사라지자 주변이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가장 먼저 마하임의 시선을 붙잡은 것은 마장기의 치켜든 팔 위에 굳은 듯 멈춰 서 있는 시문이었다.
“소용없다. 나의 ‘경기공’ 앞에서는 그 어떠한 공격도 무용지물.”
대연회장의 외벽마저 간단히 뚫어 버린 포스캐논이었지만 시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시현류 궁극의 기술이라고 일컬어지는 ‘경기공’을 포스캐논이 뚫지 못한 것이다.
마하임의 불완전한 ‘경기공’하고는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마장기는 이에 개의치 않고 시문을 뿌리치려 했다. 시문은 마장기의 공격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를 가볍게 피하고서는 마장기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투깡-
시문의 발경이 마장기의 해치를 강타했다. 해치는 허무할 정도로 간단히 뜯겨져 나가고 조종석에 탑승하고 있던 마하임의 모습이 드러났다.
마하임과 시문과의 거리는 손만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마하임은 더는 저항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마하임을 지탱하던 나노머신 시류의 힘도, 그리고 마장기도 이미 한계를 넘어선 지 오래였다.
눈을 감는 마하임. 시문의 발경이라면 고통조차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이런 죽음도 나쁘지 않으리라. 마하임은 그렇게 생각했다.
“거기까지입니다. 시문 님.”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시문은 고개를 돌렸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은 에스탄테 자작이 숨어 있는 방향이었다. 하지만 이 목소리는 에스탄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누, 누구냐!”
에스탄테는 자신의 뒤편에서 갑자기 들려온 이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돌아섰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제 손은 더럽히지 않으려 했는데, 어쩔 수 없군요. 어쨌건, 이제 퇴장할 시간입니다. 에스탄테 자작님.”
또다시 들려온 목소리. 여전히 소리가 들려온 곳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에스탄테.
바로 그때였다. 그의 어깨 부근에서 은빛으로 반짝이는 가느다란 실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컥!”
단발마의 비명과 함께 에스탄테의 머리는 거짓말처럼 깔끔하게 절단되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절단면이 어찌나 깨끗한지 한동안 피조차 흘러나오지 않는다. 너무나 간단히, 그리고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현실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몇 초 후, 에스탄테의 잘린 목에서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단분자 와이어는 이래서 싫습니다.”
목이 떨어져 나간 에스탄테의 몸뚱이는 비틀거리다 옆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그의 바로 등 뒤에서 투명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에스탄테의 피를 뒤집어쓴 그것은 마치 유령처럼 허공에서 일렁이더니 이내 사람의 형태로 변해 갔다.
“더는 숨어 있을 필요가 없으니 상관없겠죠.”
투박한 잿빛 가면에 온몸을 감싸는 검은 망토를 입은 그는 다름 아닌 하륜이었다.
“타이밍이 살짝 늦었지만, 큰 오차는 없는 듯하군요.”
하륜은 예의 광학미체로 모습을 숨기고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기회를 엿보다 에스탄테 자작의 암살했던 것이다.
“황제의 ‘사냥개’ 씨도 이쯤에서 물러나시죠? 아마도 에스탄테가 죽으면 귀환하게 되어 있을 텐데요?”
하륜은 자신의 턱을 만지작거리면서 시문을 향해 말했다. 시문은 그 자리에 굳은 듯 서서 하륜과 에스탄테를 노려볼 뿐이다. 그리고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경호 대상, 사망 확인. 전장에서 철수하겠다.”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린 시문은 뒤도 보지 않고 마하임으로부터 떨어졌다.
그리고 마장기의 포스캐논이 뚫어 놓은 커다란 구멍을 통해 밖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자, 잠깐!’
멀어져 가는 시문을 향해 마하임은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입 안에서만 맴돌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시문이 사라지자 하륜은 마하임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마하임의 목에 맥을 짚어 보더니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명에는 지장 없을 겁니다. 어찌 되었건 흥미롭군요. 마장기에다가 황제의 직속 사냥개라.”
하륜은 자신의 몸에 묻은 피를 털어 버리고는 다시 광학미체를 작동시켰다. 마치 주변 배경에 녹아드는 것처럼 투명하게 변하는 하륜.
“아무래도 제국 쪽 상황을 알아봐야겠군요. 최악의 경우는 피해야 하니까요.”
하륜의 중얼거림이 사라짐과 동시에 그의 자취도 완전히 사라졌다.
곧이어 피로 물든 대연회장에 적막이 찾아왔다. 마하임은 마장기 안에서 멍하니 대연회장의 천정을 바라봤다.
온몸은 산산이 부서질 것만 같은 고통 속에 손가락 하나 움직여지지 않았다.
“영주님, 어디 계십니까? 영주님!”
멀리 대연회장의 정문 쪽에서 요한의 것으로 생각되는 목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이제야 포위망을 뚫고 대연회장으로 진입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마하임이 기억하는 그 날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 * *
시오니아 제국령 동남쪽, 루인산맥을 끼고 자리 잡고 있는 에나르 왕국은 무려 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나라였다.
에나르 왕국은 국토도, 인구수도 작았지만, 철광석을 비롯한 풍부한 지하자원을 바탕으로 인근 나라들의 부러움을 살 정도로 부국강병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 천년의 역사도 오늘로서 막을 내리려 하고 있다. 시오니아 제국이 본격적인 침략 전쟁을 개시하자, 제1의 목표로 에나르 왕국이 지목되었던 것이다.
제국은 10만 대군을 동원해 에나르 왕국의 국경을 3일 만에 돌파하고 에나르 왕국의 수도 할슈타인 성을 포위했다.
그것이 바로 하루 전 일이었다.
“황제 폐하, 에나르 왕국의 사자가 항복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잿빛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할슈타인 성을 바라보던 황제의 마장기, ‘블랙아크’는 천천히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몸체를 움직였다.
블랙아크라는 이름에 걸맞은 칠흑처럼 검은 이 마장기는 제페쉬의 마장기보다 두 배는 커 보였다.
움직임을 멈춘 마장기는 자신의 발치에 납작 엎드려 있는 군청색 제국군 제식 갑옷을 입고 있는 병사를 바라보았다.
“사신의 목을 베어 보내라. 제국에 대항한 자,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음을 대륙 모두에게 본보기로 삼겠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기괴한 목소리가 마장기로부터 흘러나왔다.
간단한 음성 변조 기술이었지만 이를 모르는 병사들에게는 황제의 이 목소리마저도 두려움의 대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