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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군주-29화 (29/194)

29화

제국의 그 누구도 황제의 진짜 목소리를 들은 사람은 없다. 심지어는 황제의 모습을 직접 대면한 사람조차 없었다.

황제는 자신의 침소에 들어가기 전까지 항상 마장기를 타고 있었고 심지어는 공무를 볼 때마저 마장기를 타고 있었다.

“하오나, 할슈타인 성은 난공불락의 요쇄, 아군의 피해가….”

투캉-!

귀에 거슬리는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병사는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했다. 황제의 거창 ‘게이볼그(Gáe Bolg)’가 그의 머리뿐 아니라 상체까지 일격에 박살내 버렸던 것이다.

검붉은 피와 살의 파편, 그리고 갑옷의 조각들이 폭발하듯이 주위로 흩어졌다. 자신의 몸통보다 더 큰, 대 마장기용 창에 관통당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로랜스 장군에게 전하라. 내일 오전까지 함락시키지 못하면 목을 내놔야 할 거라고.”

“황공하옵니다. 황제 폐하.”

겁에 질린 병사들을 뒤로한 채 황제는 시선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대륙 북부의 겨울은 빨리 찾아왔다. 이미 하늘은 검은 구름으로 가득했다. 기어코 눈송이가 하나둘 날리기 시작했다.

황제는 곧장 자신의 막사로 걸어갔다. 막사는 마장기의 격납고를 겸했기 때문에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쉽게 볼 수 있었다.

황제의 마장기가 나타나자 근처를 지나가던 병사들은 일제히 바닥에 엎드렸다.

3년 전, 선대 황제의 압도적인 지지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그는 단 1년 만에 자신의 정적을 제거한 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있던 제국의 힘은 황제의 권위 앞에 하나로 모아졌고, 대륙 최고의 나라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되었다.

“충-!”

황제의 마장기가 막사 앞에 도착하자 근위병들이 예를 갖췄다. 그 직후 막사의 출구가 소리 없이 열렸다.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도록.”

“네. 황제 폐하.”

마장기가 육중한 땅울림을 남기고 막사 안으로 들어가자 출구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조용히 닫혔다.

마장기가 막사 안으로 들어오자 기다렸다는 듯 막사의 중앙 천장에 달려 있던 발광석이 새하얀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거기 있느냐?”

황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다름 아닌 시문. 시문은 마치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황제의 마장기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임무는?”

“변수로 인해 실패했다.”

“호오?”

황제는 마장기의 손을 뻗어 그를 손아귀에 쥐었다. 여기저기 찢겨진 그의 옷은 먼지로 엉망이었고 얼굴 역시 상당히 지쳐 보였다.

“변수라, 시문이 그렇게 말했다면 보통 변수는 아닐 터.”

“하륜에게 경호 대상이 암살당했다.”

“아아, 그 골칫덩이가 거기 있었나 보네. 하지만 널 그 정도로 상처 입힐 만한 능력은 그놈한텐 없을 텐데?”

“나와 같은 무공을 사용하는 자를 봤다. 그자는 아르케비니아의 왕자였다.”

하륜의 말을 들은 황제는 침묵했다. 그리고 무어라 답을 하는 대신 황제는 시문을 자신의 커다란 침대 위로 내려놓았다.

황제의 손아귀에서 풀려난 시문은 비틀거리며 침대 위로 무릎을 꿇었다.

“죽였나?”

황제의 말에 시문은 고개를 저었다. 황제는 잠시 멈춘 뒤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그 프로젝트가 진행 중인가 보군.”

“뭘 알고 있지? 황제.”

“글쎄? 나도 잘 몰라. 어쨌거나 네가 말한 그 왕자, 한번 만나 보고 싶군.”

황제는 이렇게 말하고선 자신의 마장기를 침대 근처에 멈춰 세웠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프레임의 침대는 그 자체가 예술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호화스럽기 그지없었다.

특히 침대의 매트릭스는 부드럽고 투명한 재질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 안은 은빛으로 빛나는 액체로 가득 차 있었다.

“처음 네가 짐의 침소로 쳐들어왔을 땐 참으로 흥미로웠지.”

푸쉬-

압축된 공기가 빠지는 소리와 함께 마장기의 해치가 열렸다.

해치 안에서 흘러나오는 옅은 붉은빛. 황제는 천천히 조종석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절대무적. 일기당천. 시현류의 당주께서, 그것도 혈혈단신으로 나를 암살하러 왔다니. 영광이라면 영광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검정색 슈트를 입은 황제. 머리 역시 같은 색 복면을 쓰고 있어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시문은 침대에서 힘겹게 몸을 돌려 황제가 서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눈에 들어온 황제의 모습. 그 모습은 ‘황제’라 불리기에는 너무 왜소했다.

키는 시문보다 작았고 심지어는 남자조차 아니었다.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황제의 슈트는 그가 여성,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 채 여물지도 않은 소녀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해 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뭔가? 황제.”

“그렇게 화내지 마, 시문. 하륜이나 그딴 소국의 왕자 따위는 아무래도 좋으니까.”

아직도 시문은 자신이 왜 황제에게 패배했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시현류의 그 어떠한 기술도 황제에게는, 아니 정확히는 황제의 마장기 ‘블랙아크’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경기공을 이용한 방어조차도 ‘블랙아크’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시문의 선기발경은 블랙아크의 반투명한 ‘실드’에 막혀 허무하게 무력화되었고, 경기공은 종잇장 뚫리듯 간단히 공격을 허용했다.

그의 암살 시도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시문, 아직도 날 죽이고 싶나?”

“날 바보 취급하는 거냐. 진실을 안 이상, 난 널 지킬 수밖에 없다.”

시문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런 시문을, 황제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황제는 원래 시문에게 ‘진실’을 말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그런 권한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에 와선 아무래도 좋았다.

“권한 따위는 이제 아무런 의미도 없지. 어차피 남은 ‘서버’는 이곳뿐이니까.”

황제는 알고 있었다. 이 세계는 그저 환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환상도 이제 얼마 가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잔혹한 현실이었고, 모든 것을 내던져서라도 바꾸고 싶은 진실이었다.

그렇기에 황제는 마지막 주사위를 던졌다. 이 가혹한 세계의 미래를 바꾸기 위해.

* * *

하염없이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밤이었다. 그것은 아득히 먼 미래이자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되어 버린 그 세계의 기억.

마하임과 시아라는 윈드시크릿의 자그마한 영빈관의 뜰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하객이라고는 요한과 마하임을 따르는 몇 되지 않는 중신들이 다였다.

아르케비니아 성은 이미 제국의 수중에 넘어갔다. 윈드시크릿의 운명도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마하임은 행복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있었기에. 시아라 그녀 역시 행복했다. 아직 희망을 품을 수 있었기에.

짤막한 식이 끝나고 둘은 서로 입을 맞췄다. 새하얀 드레스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그녀. 마하임의 온몸으로 시아라의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아련함, 지금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흘러간 기억의 잔상, 이젠 미래도 과거도 아닌 것이 되고 말았다.

‘왜일까?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일까?’

마하임은 공허한 하늘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여전히 답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기어코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칠흑과 같은 어둠. 그곳에 마하임은 서 있었다.

이제 더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미래를 기억하는 것조차 두려웠다.

그러나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듯, 마하임의 현실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긴….”

눈을 뜬 마하임에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눈에 익은 천장이었다. 그러나 당장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마하임은 자신이 영빈관 서재에 위치한 침대 누워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깨어나셨습니까? 영주님.”

마하임의 앞에서 머리를 숙이는 하륜. 그는 여전히 가면을 쓴 채 여유로운 모습으로 마하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며칠이나 잠들어 있었지?”

“3일입니다. 꽤 상처가 깊으니 당분간 몸 쓰는 일은 하지 마셔야 합니다.”

마하임은 잠시 침묵했다.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지만 이내 그는 할 말을 떠올렸다.

“어떻게 알았지? 에스탄테가 죽으면 시문이 물러난다는 것을.”

“자랑은 아니지만, 예전에 제국 밥을 얻어먹은 적이 있죠. 그때의 경험이 도움이 됐다, 정도로 해 두죠.”

“…….”

마하임은 입을 닫았다. 아직 이해 안 가는 부분은 있었지만, 굳이 하륜에게 따질 생각은 없었다.

결과론적으로 하륜은 마하임 자신을 구해 준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상황 보고, 들을 수 있을까?”

“아, 네. 제페쉬의 노예 시장은 제국의 개입으로 와해된 것으로 마무리됐습니다. 생존한 타국의 귀족들이 떠들어 대는 바람에 정보 조작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제페쉬는?”

“살아 있습니다. 일단 가택 연금으로 가두어 두긴 했는데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마하임은 하륜의 말에 되물었다. 원칙적으로 죽이는 것이 맞지만, 문제는 그가 요한의 아버지란 것이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고. 한번 찾아가 보시죠? 죽이는 것은 그다음에도 됩니다.”

하륜의 말에 마하임은 침묵했다. 다른 사람의 말이라면 무시했겠지만, 하륜의 말이었기에 마하임은 조금 더 생각해 보기로 결정했다.

“그 건은 일단 뒤로 미루지. 요한의 의향도 들어 봐야 하니까.”

마하임은 침대에서 상반신을 일으켰다. 모험이나 다름없었던 첫 번째 계획은 일단 성공했다. 그런데 이게 과연 성공이라 할 수 있을까?

그가 알던 미래의 정보는 비틀리고 왜곡되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약 하륜의 도움이 없었다면, 뭔가 시작도 해 보기 전에 생이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한마디로 ‘운이 좋았다.’라는 표현 말고는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영주님?!!!”

바로 그때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사람은 요한이었다. 그리고 세실과, 아나모네도 뒤이어 따라 들어왔다.

“주인?! 괜찮나? 다친 곳은?!”

아나모네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마하임에게 안겼다. 순간 세실의 눈꼬리가 올라갔지만, 그냥 입을 닫았다. 요한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모일 만한 사람은 다 모였으니 결산을 한번 해 볼까요?”

“떼먹으면 죽는다?”

“걱정 마세요. 세실 님 몫은 확실히 챙겨 놨으니까요.”

하륜은 이렇게 말하며 쓰고 있던, 가면을 만지작거렸다.

제페쉬의 저택에서 얻은 수입은 생각 이상으로 컸다.

저택에 방문한 타국의 귀족들이 남긴 재화를 모두 합치면 무려

이천만 골드라는 거금이 모였다. 거기다 밀 십여 톤과 군마 오백 필은 덤이랄까?

“난 골드만 있으면 되니까. 알아서 정산해 줘.”

“알겠습니다. 정산이 끝나는 대로 은빛화살로 보내겠습니다.”

“좋아. 난 갈 테니까 무슨 일 있음 불러. 바이바이~”

세실은 언제나 그렇듯 가벼운 걸음으로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하임의 방 안에는 하륜, 아나모네, 그리고 요한만이 남았다.

“영주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다른 분들은 좀 자리를 비켜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무겁게 요한이 입을 열었다. 하륜은 요한의 눈치를 한번 스윽 살핀 뒤 웃으며 아나모네 곁으로 갔다.

“잠시 자리를 비워 드립시다. 아나모네 님. 잠시 데이트 어떠신가요?”

“거절한다.”

“이런이런. 유감스럽군요. 하하.”

멋쩍은 듯 웃는 하륜. 그런 하륜을 무시한 채 아나모네는 마하임의 이마에 살짝 키스한 뒤 말했다.

“다시는 무리하지 않겠다고 약속해라, 주인.”

“노력은 해 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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