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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군주-30화 (30/194)

30화

마하임의 말에 아나모네는 크게 한숨을 쉰 뒤 그녀의 특기인 그림자 은신술로 눈 녹듯 사라졌다.

“눈치 없이 저만 남았군요. 저도 이만….”

아나모네가 사라지자 하륜 역시 마하임을 향해 가볍게 인사 후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방 안에 남은 사람은 요한밖에 없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마하임은 요한을 바라보고 입을 땠다.

“제페쉬 백작, 아니 네 아버지 처우 문제인가?”

“네, 영주님.”

지난 삶에서는 제페쉬를 처형했었다. 그는 윈드시크릿의 실제적 지배자였고 그 영향력은 절대 무시할 수 없었기에, 자의든 타의든 죽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를…. 제페쉬 백작님을 살려 주십시오.”

요한은 마하임을 향해 무릎을 꿇고 말했다. 제페쉬의 죄는 그 누구보다 요한이 잘 알았다. 그리고 그 죄는 죽음으로밖에 해결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하지만 그는 지금의 요한을 있게 만들어 준, 소중한 가족이었다.

“네가 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제페쉬는 지금의 나에게 있어 최대의 적이라는 것 또한 사실이지.”

“하오나!”

요한은 목이 메 더는 말을 잊지 못했다.

마하임은 묵묵히 요한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원하건 원치 않건 또다시 마하임은 선택의 기로에 서고 말았다. 그리고 마하임은 선택했다.

“일단 제페쉬를 만나 보겠다. 죽이고 살리는 것은 그 다음에 결정하겠다.”

마하임은 침대를 내려와 몸을 일으켰다. 아직 몸 상태가 완전하지 않아 몸 곳곳이 쑤시고 결려 왔다. 하지만 왠지 모를 상쾌한 감각이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그래. 새로운 길로 가 보자. 그 끝이 파멸이라 할지라도.’

* * *

제페쉬의 대저택, 2층. 그곳에는 제페쉬 백작의 침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말이 침실이지, 집무용 책상과 책이 가득 찬 책장까지 벽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기에 침실이라고 보기보다는 서재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 서재의 주인 제페쉬는 창백한 얼굴로 낡은 책상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오늘은 맑군….”

창으로 쏟아지는 따스한 햇볕을 바라보며 제페쉬는 중얼거렸다.

새하얗게 새어 버린 금발. 그리고 그의 얼굴에는 3일 전, 비밀 경매장에서 입은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사실 지금도 몸 상태는 좋지 않았다. 이렇게 책상 앞에 앉을 수 있는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똑똑똑.

갑자기 들려온 노크 소리에 제페쉬는 자신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잠시 뭐라 말할까 망설이던 제페쉬는 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굳이 노크하지 않아도 된다. 난 패배한 개일 뿐이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 등장한 사람은 다름 아닌 마하임이었다.

“드디어 오셨구려. 기다렸습니다.”

마하임은 말없이 걸어와 제페쉬의 침대에 앉았다. 그리곤 맞은편 창으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창밖 경치가 좋군.”

“돌려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영주님. 무엇입니까? 절 살려 둔 이유가?”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제페쉬.”

이미 미래의 흐름을 아는 마하임인지라 그는 그리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있어선 안 되는 인물, 제거해야 할 걸림돌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마하임은 어째선지 그를 죽이지 않고 있었다.

“하륜이 그러더군.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왜인지 알려 줄 수 있겠나? 아르케비니아 왕가를 적으로 돌린 이유 말이야.”

마하임의 말을 들은 제페쉬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떠올리기 싫은 일을 떠올렸다.

“소피아란 이름을 들어 봤습니까?”

그의 물음에 마하임은 인상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었다. 왕성에 머물렀던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녀에게 대해 한 번쯤은 들어 봤을 인물이었다.

소피아, 그녀는 아르케비니아 사교계를 떠들썩하게 만들 정도로 유명한 미녀였다.

성품도 좋아서 아르케비니아의 성녀라 불리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3년 전 행방불명됐다.

그 누구도 이 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소피아는 사람들 기억 사이에서 잊혀졌다.

“그녀는, 제 딸입니다. 아르케비니아 왕가, 정확히는 왕위 서열 1위인 레온 왕자에게 납치당했지요.”

아르케비니아의 왕자 중 가장 대책 없는 망나니 레온. 그의 악행은 아르케비니아를 넘어 이웃나라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대단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를 제지하지 못했다. 그는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왕자일 뿐 아니라, 아크 메이지급의 대마법사였다.

스스로 일인 군단이라 말할 정도로 그의 마법사로서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가할 정도로 엄청났다.

몇몇 그의 횡포에 반기를 든 귀족도 있었지만, 그의 마법과 권력 앞에 모두 멸문지화의 변을 피하지 못했다.

“더는 할 말 없습니다. 전 사랑하는 딸 한 명조차 지키지 못한 무능한 아버지일 뿐입니다. 이젠 마지막 희망마저도 사라졌으니…. 죽여 주십시오.”

그는 의자 아래로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리고 참고 또 참아 왔던 억울함을 토해 놓았다.

“그 마장기…. 딸을 구하기 위해서였나?”

“마법사를 상대하기 위해선 마장기 이상의 병기는 없으니까요.”

대략 조각이 맞춰졌다. 제페쉬가 왜 이런 깡촌에 들어와서 닥치는 대로 돈을 모았고, 심지어는 마장기까지 손에 넣은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하륜의 말대로 핑계 없는 무덤은 없었던 것이다. 마하임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입을 뗐다.

“제안을 하나 하지. 당신의 딸, 내가 구해 준다면 무엇을 해 줄 수 있지?”

“……?!”

전혀 생각지 못한 마하임의 제안에 제페쉬는 눈을 부릅떴다.

“어째서입니까? 전 당신의 적입니다.”

“적이기 이전에 나의 소중한 부하, 요한의 아버지다. 그리고, 아르케비니아 왕가 역시 언젠가 내가 쳐부숴야 할 적. 이 정도면 이유로서 충분하지 않을까?”

마하임의 말에 제페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마치 누군가에게 한 대 맞은 듯한 멍한 기분. 하지만 이건 분명 현실이었다.

제페쉬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마하임 앞에서 가슴에 손을 얹고 말했다.

“제 딸을 되찾아 주신다면….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이 한 목숨, 영주님께 받치겠습니다.”

마하임은 말없이 제페쉬의 어깨를 두들겼다. 이로써 이전에는 경험한 적 없는 새로운 미래로 들어섰다.

이것이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는 이제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마하임은 후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었기에…. 마하임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 * *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갔다. 그리고 윈드시크릿에도 차가운 겨울이 찾아왔다.

폭정과 기근에 시달리던 윈드시크릿이었지만, 이번 겨울만큼은 풍요로웠다.

“휴이, 남쪽 성벽 작업은 어때?”

“말도 마라. 새로 만드는 게 더 빠르겠다, 야.”

휴이는 먼지 뽀얗게 앉은 투구를 툭툭 털며 말했다. 휴이와 듀이 이 둘은 형제는 아니었지만, 나름 손발이 잘 맞는 파트너였다.

너무 손발이 잘 맞는 바람에 마하임에게 찍혀 온갖 고초를 당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마하임에게 어느 정도 인정도 받아 둘 다 병장이 되어 윈드시크릿 경비병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배급 물량은 충분해?”

“아직은 여유 있어.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말야.”

영주 마하임과 윈드시크릿의 실세 제페쉬 백작이 무제한 지원을 시작하자 기근에 시달리던 영지민들은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기근이 계속되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5만 명에 다다르는 영지민에게 언제까지 지원을 계속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러나 저러나 아직도 믿기지 않아. 그 완고한 제페쉬 백작이 영주님께 무릎을 꿇다니….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군.”

“난 백작의 목을 쳐 버릴 줄 알았는데, 잘됐지 뭐. 요한 대장님도 이제 한시름 놨겠네.”

요 며칠 사이에 일어난 윈드시크릿의 변화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제페쉬는 윈드시크릿의 실세. 전 영주도 제페쉬에게 꼼짝 못 했기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번 영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하임은 보란 듯이 제페쉬 백작을 쓰러트리고 충성 맹세까지 받아 냈으니 윈드시크릿을 뒤흔들 만한 큰 이슈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넌 얼마나 갈 것 같냐?”

“뭐가?”

“뭐긴. 영주님이 이것저것 하고 있는 일 말이야.”

휴이는 처음 마하임을 보았을 때 그 역시 지금껏 윈드시크릿을 거쳐 간 여러 영주와 마찬가지로 부패하고 별 볼 일 없는 귀족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다.

기강이 무너진 병사들을 재정비하고 빈곤에 찌든 영지민들에게 먹을 것과 농지 개간을 적극 지원하는 등, 마하임은 혁명에 가까운 파격적인 행보를 이어 갔다.

그 혁명에 휘말려 휴이 역시 죽을 뻔했지만, 윈드시크릿은 전보다 훨씬 살기 좋아진 것만큼은 확실했다.

“나름 강단이 있으신 분이니 알아서 잘 하시겠지.”

“참 너도 속 편하게 산다. 에휴.”

휴이는 고개를 저으며 쓰고 있던 투구를 고쳐 썼다. 휴이의 집안은 몰락 귀족가인 만큼, 아르케비니아의 역사에 관해 공부한 바 있었다.

그 역사에 의하면 마하임 같은, 소위 말하는 혁명가들의 목숨은 한결같이 오래 가지 못했다.

기득권을 위협하는 신규 세력은 기득권의 눈에 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설령 왕족이라고 하더라도 그 최후는 반역자란 낙인이 찍혀 허무하게 사라졌다. 그것이 아르케비니아의 역사였다.

“제발 그렇게는 되지 말아야 할 텐데…. 쩝.”

바로 그때였다. 휴이와 듀이가 앉아 있는 성벽 아래에 경비병 하나가 허겁지겁 뛰어왔다.

“무슨 일이지?”

“하, 하피가 나타났습니다! 북쪽 성문 인근입니다.”

“뭐라고?!”

윈드시크릿의 북쪽으로 이어지는 시노쿠 산맥 언저리에 수많은 몬스터가 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하피는 윈드시크릿 최고의 골칫덩이였다.

하피란 상반신은 여성, 하반신은 맹금류의 모습인 기묘한 형태의 몬스터였다.

작년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하피는 윈드시크릿에 종종 나타나는 대표적인 몬스터이자 가장 많은 피해를 끼치는 몬스터였다.

특히 소나 말 같은 가축부터 시작하여 드물게는 사람까지 가리지 않고 사냥했다.

그래서 놈들이 나타나면 윈드시크릿은 비상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넌 요한 님께 가서 즉시 보고해!”

“예, 알겠습니다!”

“듀이 어서 가자. 소라도 한 마리 잃으면 요한 님이 불호령을 내릴 거야.”

“젠장! 하필 하피라니! 모을 수 있는 병사들은 다 모아!”

허겁지겁 세워 둔 말로 뛰어가는 휴이와 듀이. 멀리 윈드시크릿의 황혼이 불길한 기운을 내뿜으며 성큼 다가와 있었다.

* * *

이히히힝-!

군마들의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이 사방을 진동했다. 기세 좋게 휴이와 듀이가 병사들을 이끌고 윈드시크릿 외곽에 도착했을 땐 상황이 좋지 않았다. 문제의 하피 무리가 나타난 것이다.

“모두 말에서 내려! 말을 보호한다!”

거대한 황금색 하피들. 이런 하피는 휴이를 비롯한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하피는 말을 통째로 채갈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크기도 성인 남자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저 하피의 크기는 2미터가 넘는 리자드맨보다 1미터는 더 컸다.

이히이이잉!

겁에 질려 멋대로 도망치던 군마 한 마리가 고통스러운 울음소리와 함께, 하늘로 솟구쳤다.

말할 것도 없이 하피의 습격이었다. 말은 필사적으로 버둥거렸지만, 3미터가 넘는 덩치의 이 하피들 앞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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