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툭 후두둑 투툭.
하피가 낚아챈 군마는 다른 하피들까지 가세해 공중에서 순식간에 해체당해 버렸다.
그 결과 군마의 피와 살, 내장이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졌다.
“정신 차려! 말을 지키면서 천천히 후퇴한다!”
그 광경은 악몽에서나 나올 법한 끔찍한 것이었다. 휴이 역시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았지만, 애써 멘탈을 붙잡고 다른 경비병들을 안심시켰다.
“망할 오러도 통하지 않아. 뭐 이런 괴물이 다 있지?”
듀이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저놈들은 단순히 덩치만 큰 하피가 아니었다.
저 하피의 황금빛 깃털은 듀이의 오러 소드를 완벽하게 무효화시켰다.
오러 유저인 휴이와 듀이의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자 그와 함께 온 경비병들은 완전히 겁에 질리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도망가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사방에서 날뛰는 하피 때문에 퇴로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건 말도 안 돼!”
듀이가 히스테릭하게 소리쳤다. 일반적인 하피들은 애초에 저렇게 크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단독 생활을 하는 몬스터였다.
그런데 저 황금색 하피는 무리를 지어 조직적인 사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히이이잉~!
또 한 마리의 군마가 하피의 날카로운 발톱에 찍혀 하늘로 솟구쳤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이 난장판을 바라보는 듀이. 흥분한 하피들은 겁에 질려 사방으로 도망치는 군마를 잔인하게 찢어 죽였고, 주변은 순식간에 피바다가 되고 말았다.
“이제 어쩌지?”
휴이는 하늘이 무너진 듯한 기분에 중얼거렸다. 이미 여기까지 타고 왔던 군마는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사람을 보내 놨으니 구원병이 오긴 하겠지만, 문제는 지금 당장이었다.
“나도 몰라. 젠장, 그나마 우릴 공격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듀이는 하피들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말했다.
그는 이전에도 하피와 싸워 본 적이 있었다. 물론 지금 저 하피와는 종 자체가 다른 듯했지만, 기본적인 습성은 비슷해 보였다.
일반적으로 하피들의 먹이는 말이나 소 같은 동물이었으나, 인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하피에게 공격을 당해 죽을 뻔하거나 혹은 녀석들의 먹이가 되어 버린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윈드시크릿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불행 중 다행히 저 하피들은 아직 사람을 노리지는 않았지만, 언제 상황이 바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삐이- 삐익- 끼룩-
푸드드득.
휴이와 듀이는 경비병들을 추슬러 타고 온 군마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무런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저 황금색 깃털의 하피들은 그런 휴이와 듀이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군마를 한 마리, 두 마리씩 낚아채 갔다.
“몰살…인가?”
50마리의 군마가 모두 하피에게 사냥당하는 데 걸린 시간은 길지 않았다.
하피는 말의 일부를 어디론가 가져가기도 했지만 대부분 즉석에서 말을 뜯어 먹었다.
하피의 수는 시간이 갈수록 늘어갔고 지금 눈에 띄는 하피만 해도 30마리가 넘는 것 같다.
비릿한 피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검붉은 피와, 여기저기 널려 있는 말들의 내장들. 몇몇 비위가 약한 병사들은 헛구역질을 하기도 했지만, 누구도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인 것 같은데.”
듀이는 불길한 예감에 몸을 움츠렸다.
하피들의 만찬은 이제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 많은 수의 군마들을 순식간에 해치워 버리는 하피의 먹성에 경비병 모두는 치를 떨었다.
하지만 녀석들은 아직도 배가 덜 찬 모양인지 새로운 먹이를 찾기 위해 코를 킁킁거렸다.
기어코 하피들은 경비병이 몰려 있는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었다.
지금 어설프게 물러서다 잘못되면 그때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
“모두 움직이지 마라.”
바로 그때였다. 갑작스레 들려온 이 소리에 듀이는 고개를 돌렸다. 그 목소린 다름 아닌 마하임의 목소리였다.
삐익- 삐이이이-
푸득 푸드드득!
놀란 하피들은 깃털을 휘날리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하피가 자리를 비운 그 사이로 달려오는 마하임과 아나모네, 그리고 요한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 다 살아 있습니다. 영주님.”
“다행이군.”
마하임은 검을 뽑아 든 채로 하늘로 날아오른 하피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대로 그냥 상황이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하늘로 날라 올랐던 하피들은 이내 대열을 갖추며 마하임 일행을 포위했다.
“영주님 뒤로 피하십시오! 저 하피들, 보통의 하피가 아닙니다!”
오러가 휘날리는 검을 뽑아든 요한이 말했다. 그러나 요한이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저 하피의 위험성은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 알고 있었다.
마하임이 아는 미래에서도 이 하피들은 존재했었다. 이 황금빛 하피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던가?
보통의 하피와는 달리 유난히 먹성 좋은 이놈들은 인간들도 가차 없이 사냥했다.
게다가 인간 이상으로 영악해 함정이나 덫 같은 건 걸리지도 않았다. 결국 이 녀석들을 몰아낸 건 시아라가 윈드시크릿에 온 이후였다.
함정이나 덫도, 그리고 이능의 힘도 전혀 먹히지 않았지만 선술, 다시 말하자면 검기만큼은 저 하피에게 통했던 것이다.
실제 아나모네가 하피를 쫒기 위해 검기를 사용하자 녀석들은 기겁을 하고 도망가기에 바빴다.
‘좋아. 여기까진 생각한 대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검기를 사용할 수 있는 자가 아나모네 혼자라는 것을 안 하피들은 그녀를 포위한 뒤 특유의 날카로운 울부짖음으로 아나모네를 경계했다.
“주인, 이제 어떻게 할 건가?”
아나모네는 로이드를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하피가 뿜어내는 따가운 살기에 마하임은 식은땀이 날 정도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여기서 철수하는 것이 맞겠지만….’
시아라가 있다면 또 모를까 지금 저 하피들을 무력으로 몰아내기 위해선 아군의 피해도 상당수 감수해야 했다.
지금 윈드시크릿의 상황에서 그런 피해는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손실이 될 수도 있었다.
마하임은 자신의 애검, 오페라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페라, 하피와도 대화가 가능하다고 했지?”
[네, 해당 종족, 통칭 ‘로어하피’는 지성이 있는 종족으로, 대화가 가능합니다. 실시간 통역 시스템 온라인. 통역을 시작할까요?]
“시작해. 이대로는 물러날 수 없다.”
하피와의 대화. 그것은 이전에 시도해 본 적 없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이 대화 때문에 더 상황이 나빠질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물러나는 것을 마하임은 용납할 수 없었다.
“미안하지만 만찬은 이쯤에서 멈춰 주면 안 될까?”
마하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피들은 갑자기 동요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살기 어린 포효라고 하기보다는 놀람과 두려움이 뒤범벅된 경계의 외침이었다.
삐이이이이-!
삑- 삐이이이-!
길고 날카로운 하피의 울부짖음과 함께 하피 무리 사이로 지금껏 보지 못한 거대한 하피 한 마리 모습을 드러냈다.
얼핏 봐도 여기 모인 하피보다 1m 이상이나 더 커 보이는 녀석이 등장하자 주변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이 거대한 하피는 곧장 마하임을 향해 다가왔다.
‘놀랍군.’
마하임은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맹수 중의 맹수라는 와이번조차도 이놈 앞에선 상대가 되지 못할 터였다.
저런 하피는 마하임의 과거와 미래의 기억을 통틀어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피의 덩치도 덩치거니와 하피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여성의 모습을 한 상반신도 다른 놈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네가 이 하피들의 우두머리냐?”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하는 하피. 그러나 마하임은 이 하피 앞에서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말했다.
하피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로이드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보면 귀엽다고 느껴질 정도로 천진난만한 표정이었다.
보통 하피의 외양은 상반신은 인간의 여성 형태, 하반신과 날개는 맹금류의 그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여성의 상반신이라고는 하지만 정상적인 여성의 모습이 아니었다.
귓불까지 찢어진 입과 그 사이로 불규칙하게 튀어나온 톱날 같은 이빨 때문에 아무리 좋게 봐 주려 해도 호감이 가는 모습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 나타난 이 하피는 달랐다.
‘기분 나빠. 하피 주제에 웬만한 여성보다 더 아름답잖아?’
휴이가 봐도 저 하피는 상당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심지어는 인간처럼 팔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정말 놀라운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저 하피는 마치 마하임의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조그만 인간. 너, 우리 말 알아듣는 거냐?”
요한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귀에는 보통의 하피들의 울부짖음으로밖에 들리지 않았지만, 마하임은 녀석이 하는 말을 분명 이해할 수 있었다.
[실시간 통역 모드가 정상 작동 중입니다. 치완 성공율 98%. 통역 속행합니다.]
오페라는 신속 정확하게 하피의 언어를 번역해 마하임의 뇌에 직접 전달했다.
그 결과 마하임은 원래 하피의 언어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하피와 소통이 가능했다.
“나도 정말 이런 것이 가능할지는 생각 못 했다.”
마하임이 말을 하기가 무섭게 하피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이 하피들의 언어로 말을 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저 인간, 하피 말 한다.”
“그럼 저것도 하피?”
“멍청이! 저건 하피 아냐!”
하피들 사이의 혼란은 더욱더 심해졌다. 이를 본 선두에 선 하피는 자신의 날개를 활짝 펴 세찬 날갯짓을 했다.
순간 폭풍 같은 바람이 사방을 뒤흔들었다. 이에 깜짝 놀란 하피들은 고개를 조아리며 입을 다물었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하피의 우두머리는 천천히 마하임을 중심에 두고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모습의 하피.
아나모네는 잔뜩 긴장한 채 하피의 우두머리를 향해 검기를 더욱 짙게 만들었다.
그러나 하피는 전혀 개의치 않고 마하임을 향해 거리를 좁혀 왔다. 그리고 마하임과 채 3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르렀을 때 하피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흥미로운 인간. 보아하니 뭔가 할 말이 있나 본데?”
“대화를 하고 싶다.”
“인간과 하피가?”
“이미 하고 있지 않은가?”
마하임의 말에 하피는 머리를 갸웃거리더니 처음으로 입가에 미소를 흘렸다. 그리곤 마하임의 곁에선 아나모네를 바라보며 말했다.
“좋아. 그럼 저 다크엘프부터 좀 치워. 기분 나쁘니까.”
하피의 말에 마하임은 아나모네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나모네는 잠시 망설이다 검기를 거둬들였다.
마하임은 아나모네를 뒤로하고 하피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너희 무리는 어디서 온 거지? 윈드시크릿에서 너희 같은 하피를 본 적은 없다.”
“우리? 우린 북쪽에서 왔다.”
“북쪽?”
“그래 북쪽. 루인산맥 북쪽 광활한 침엽수림이 끝나는 바로 그곳이 우리의 고향이다”
하피는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북쪽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마하임 역시 그곳에 대해서라면 모를 리 없다.
루인산맥 북쪽이라면 바로 시오니아 제국과 인접한 지역. 그 먼 곳에서 대륙 변경인 이곳 윈드시크릿까지 저토록 강한 하피들이 도망칠 만한 이유는 몇 되지 않았다.
‘제국이 움직이기 시작했군.’
그것은 마하임이 기억하는 미래와 비슷한 진행이었다.
그 미래에서도 이맘때 하피 무리들이 나타났으니 의심할 바 없는 흐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