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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군주-32화 (32/194)

32화

“나는 인간이 싫다. 나는 인간이 밉다. 우리는 놈들의 사냥감조차도 아니었다. 나는, 나는…. 인간을 저주한다.”

노골적으로 살기를 뿜어내는 하피. 한때 대륙의 중앙을 주름잡던 용맹하기로 이름 높은 그녀의 일족은 이제 100마리도 남지 않았다.

지난 달 말, 갑작스럽게 쳐들어온 제국의 부대에 의해 하피들은 일방적인 학살당했다.

대륙의 정화라는 미명하에 대대적인 몬스터 토벌이 시작된 것이다. 하피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제국의 선봉에는 황제의 수족이 된 시문이 있었다.

오러조차도 통하지 않는 그들이었지만, 시문의 선술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했다.

“우리 무리는 돌아갈 곳도, 키울 새끼들도, 짝짓기를 할 수컷도 존재하지 않는다. 살아남은 여기에 있는 무리가 전부다. 우리 무리는 이미 끝났다.”

하피는 살기를 거두고 마하임을 바라보았다. 하피의 붉은 눈동자는 촉촉이 젖어 있었다. 마하임은 말없이 그저 그런 하피를 바라볼 뿐이다.

“어째서 인간 따위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그래, 너도 우리를 죽이러 온 것이냐?”

마하임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하피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나 마하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생각과 마음은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심지어 돌아갈 곳마저 잃은 이 하피의 모습은 그 처절했던 미래의 기억 속 마하임 자신의 모습과 정확히 겹쳐 보였다.

그 절망과, 그 상실감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마하임은 저도 모르게 하피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하피의 황금빛 날개에 천천히 손을 가져다 댔다.

“너흰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피의 따뜻한 체온이 그의 손을 통해 전해져 왔다.

그것은 하피에게 하는 말이자 마하임 자신에게 한 말이었다.

이미 마하임이 알던 미래는 어긋나기 시작했다. 거창하게 제국 타도를 외치긴 했지만, 아직 자신의 영지조차 제대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잃은 것이 있다면 다시 찾으면 된다. 포기하지 마. 너흰 아직 살아 있다. 살아 있는 한 희망은 있다.”

마하임의 말을 들은 하피는 마하임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곤 자신의 팔을 뻗어 마하임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하피는 마하임의 몸 여기저기의 체취를 맡기 시작했다. 자신을 비해 너무나 작고 약해 보이는 인간. 하지만 이 인간은 다른 그 어떠한 인간보다 특별해 보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말을 통한다고 하더라도 마주 보고 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희망…이라.”

하피의 부드러운 깃털이 마하임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그녀의 체취는 수만 년을 산다는 정령수의 향처럼 은은하면서도 향긋했다. 그리고 들려온 하피의 나지막한 목소리.

“말해 봐라, 인간. 우리에게 남겨진 희망을.”

하피는 마하임의 자유롭게 놔주었다. 마하임과 눈을 맞추는 하피. 그런 하피를 향해 마하임은 입을 열었다.

“나는 윈드시크릿의 영주, 마하임. 너희들이 살 곳 정도는 해결해 줄 수 있다. 여기서 서쪽, 은혼의 숲이라면 너희 무리 정도는 넉넉히 살 수 있겠지.”

마하임은 손을 뻗어 윈드시크릿의 허름한 성벽이 끝나는 곳을 가리켰다. 그곳은 예나 지금이나 몬스터들이 많이 살기로 악명 높은 곳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은혼의 숲에 사는 몬스터라고 해 봤자, 오크나 코볼트, 그리고 보통의 하피 정도가 고작이었다.

저 하피 무리라면 손쉽게 다른 몬스터를 누르고 먹이 사슬 최상위를 차지할 수 있을 터였다.

“나와 함께…. 이 땅에서 살아 주지 않겠나?”

마하임은 하피의 타오를 듯한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고 말했다. 하피는 그의 말을 잠자코 듣기만 했다.

주위는 쥐 죽은 듯 조용하다. 얼마간 시간이 지났을까? 하피는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인간을 믿을 수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에게 있어서 인간이란 먹이조차도 되지 못하는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 인간에게 고향을 잃은 지금, 그녀에게 있어서 인간이란 공포와 증오의 대상일 뿐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눈앞에 있는 저 인간은 무언가 달랐다.

“우리 선조는… 아주 먼 옛날, 스올의 붉은 별을 피하기 위해 ‘방주(Ark)’에 탔다.”

하피는 자신의 선대 족장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원래 하피들은 이 세계의 주민이 아니었다. 그들의 세계는 스올의 불길이 타오르는 붉은 별에 의해 사라졌다. 멸족의 기로에선 들은 자신의 창조신 ‘피닉스’에게 울부짖었다.

‘피닉스’여 우리는 멸망당하기 위해 만들어졌나이까?!’

하피의 절규를 들은 피닉스는 그들을 불쌍히 여겨 ‘아크’에 태워 끝없는 별의 바다로 도피시켰다. 그리고 피닉스는 하피들에게 말했다.

“언젠가, 너희들을 낙원으로 인도할 자가 나타나리니 그는 모든 ‘아크’를 이끌 자. ‘아크로드’라 불리기 부족함이 없으리라.”

대부분의 하피들은 이 전설과 같은 이야길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지 않았다.

낙원은 자신의 힘으로, 하피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은 틀렸다.

그녀는 하피들의 낙원을 만들 수 없었다. 심지어 자신의 무리조차 지킬 힘이 없었다. 그렇게 절망과 괴로움에 젖어 있는 그녀 앞에 나타난 것 바로 마하임이었다.

“그래 어쩌면 네가 ‘그’일지도 모르지.”

“그?”

“좋다. 우리가 살 곳, 해가 지는 쪽으로 가면 되나?”

하피의 선문답에 마하임은 이해를 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결과만 좋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마하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본 하피는 마하임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은 마하임이 지금껏 본 그 어떤 미소보다 아름다웠다.

하피는 허리를 굽혀 마하의 이마에 살짝 키스하곤, 입을 땠다.

“나의 이름은 ‘붉은 바람의 눈’ 로어하피들의 족장.”

그녀는 자신의 커다란 날개를 활짝 폈다. 가뜩이나 커다란 이 하피의 몸은 날개를 펼치자 하늘이 가릴 정도로 거대해졌다.

그리고 ‘붉은 바람의 눈’은 작별인사를 하기라도 하듯 마하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로어하피의 긍지를 걸고 맹세하마. 그대가 원한다면 언제 어느 때라도 좋다. 우리 로어하피들은 그대의 날개, 그대의 발톱이 될 것을 약속한다.”

그리고 하피들은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늦은 오후의 따스한 햇빛을 잔득 머금은 하피의 깃털은 마치 금으로 세공이라도 한 듯 눈부실 정도로 찬란했다.

이들의 갑작스러운 도약에 모두는 주춤했지만, 하피들이 만들어 낸 이 장관에 압도되어 누구 하나 입을 떼는 자는 없었다.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하피들은 녹음이 짓게 우거진 윈드시크릿 서쪽, 은혼의 숲으로 날아갈 뿐이었다.

* * *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된 겨울의 어느 늦은 오전. 윈드시크릿의 영빈관 집무실에서는 한숨이 연이어 들려왔다.

“정말 난감하군.”

“저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전 영주가 이렇게까지 방만하게 영지를 경영했을 줄이야.”

마하임과 제페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마하임과 제페쉬와의 관계는 조금 껄끄러웠지만, 단 한 명의 인재라도 아쉬운 마하임이었기에 제페쉬까지 내정 업무에 동원되었다.

게다가 제페쉬는 아르케비니아의 재상(宰相)으로서도 활동한 경력이 있었기에 내정 쪽으로는 하륜보다 능력이 뛰어났다.

“오늘 아그라 쪽에서 사람이 온다지?”

“네…. 아마도 빚 독촉을 위해서겠죠.”

지금 문제는 전 영주가 너무나 많은 빚을 이웃 영지에 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급한 불은 지난번 제페쉬 백작의 저택에서 벌어진 암시장에서 회수한 돈으로 껐지만, 이웃의 영주 아그라에게 빌린 천만 골드는 손도 대지 못했다.

이미 빚을 갚아야 할 만기는 훨씬 지나 있었다. 딱히 이자의 개념이 정해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연체’라니.

최악의 경우에는 영지를 통째로 빼앗길 수도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본국에 도움을 청할 수 있을는지요.”

“그게 가능했다면, 무리하게 자네의 저택을 습격하지도 않았겠지.”

마하임의 말에 제페쉬는 입을 닫았다. 마하임이 윈드시크릿으로 온 이유는 추방이나 다를 바 없었다.

말할 것도 없이 본국 아르케비니아의 지원은 바랄 수 없었다.

“영주님, 아그라 영주님의 사신이 도착했습니다.”

문밖에서 들려온 하륜의 목소리. 그것은 반갑지 않은 손님의 도착을 알렸다.

“안으로 모셔라.”

무표정한 얼굴로 마하임은 말했다. 그리고 잠시 후, 하륜과 아그라 영주의 사신이 영빈관 안 마하임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시오.”

마하임은 아그라 영주의 사신에게 가볍게 인사했다. 그는 단순히 사신이라고 말하기에는 덩치가 상당히 컸다.

키는 적어도 180cm 이상. 게다가 중장갑옷으로 완전 무장한 상태였다.

그는 마하임을 위아래로 휙 훑어보더니 어이가 없다 표정으로 말했다.

“영주가 바뀌었다고 들었는데, 이런 애송이일 줄이야. 아르케비니아도 이제 한물갔나 보군.”

“무례하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입을 함부로 놀리시오!”

그의 말을 듣던 제페쉬는 발끈하여 소리쳤다. 제페쉬는 뭐라 더 말하려고 했지만, 마하임이 손을 올려 제지했다. 그러자 아그라 영주의 사신은 비릿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잠시 제가 실언을 하였소. 제 이름은 아카피론. 아그라 영주님을 모시고 있는 기사요.”

“기사? 아그라 영주님의 식견도 상당히 떨어졌나 보군요. 당신 같은 사람을 기사로 임명하다니. 그쪽 영지에도 인재가 별로 없나 봅니다.”

하륜의 말에 순간 아카피론의 눈썹이 꿈틀했다. 당장 허리춤에 차고 있는 칼을 뽑기라도 하려는 듯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는 아카피론.

하지만 그는 칼을 뽑을 수 없었다.

“한번 뽑아 보시지. 이방인.”

아나모네의 차가운 목소리가 아카피론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그의 목에는 검기로 이글거리는 아나모네의 단검이 아슬아슬한 위치에서 번뜩이고 있었다.

“하하. 이거 한 방 먹었소. 이 검 좀 치워 주시게. 내 사과하지.”

검에서 흘러나오는 싸늘한 살기에 아카피론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마하임은 아나모네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지켜보겠다. 이방인.”

이 말을 남긴 아나모네는 거짓말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음음. 거두절미하고 말하겠소. 윈드시크릿에서 빌려간 채무를 갚아 주셔야겠소.”

아니나 다를까 아카피론은 채무 이야기를 꺼냈다. 마하임은 자신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채무 계약서를 다시금 바라봤다.

‘총 채무는 천만 골드. 이자는 시가에 비례한다.’라는 엉성하기 그지없는 계약.

정말 어처구니없는 계약서였다.

“총 얼마를 갚으면 되겠습니까?”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던 제페쉬가 말했다. 그러자 아카피론은 이때다 싶었던지 말을 쏟아 냈다.

“이미 다섯 달이 연체됐으니, 연체 수수료까지 포함한다면 이천오백만 골드 되겠소.”

“지금 농담하는 겁니까? 어떻게 원금보다 이자가 더 많을 수가 있습니까?”

“연체하지 않았소! 기존 이자에 복리로 이자가 붙었을 뿐이오.”

“그건 억지입니다! 지금 우리를 바보 취급하는 겁니까?”

제페쉬는 얼굴을 붉히며 목청껏 소리쳤다. 그리고 잠시 흐르는 침묵. 마하임은 뭔가 결정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

“천이백만 골드까지는 줄 수 있다. 그 이상은 무리다.”

“허허, 영주님. 돈 처음 빌려 보시오? 그 돈으로는 어림도 없소. 저희 영주님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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