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대군주-33화 (33/194)

33화

아카피론은 잘라 말했다. 그가 이렇게 나올지 이미 예견한 일…. 이제 남은 것은 하나였다.

“그렇다면, 우린 채무를 갚지 않겠다.”

“뭐라고요? 다시 한번 말해 보시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카피론은 반문했다. 그러자 마하임은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어차피 내가 빌린 돈도 아니다. 굳이 받고 싶으면 죽은 전 영주에게 받도록.”

“영지전을 불사하겠다는 거요?”

아카피론은 속으로 웃고 있었다. 아그라 영주는 윈드시크릿을 통째로 잡아먹기 위한 명분이 필요할 뿐, 이 애송이 영주가 무려 1만 골드가 넘는 채무를 갚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쪽이 쳐들어오면 대응할 뿐이다.”

“우리 영지의 상대가 되리라 생각하오?”

비아냥거리듯 말하는 아카피론. 사실 아그라 영주와의 영지전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전쟁이었다.

윈드시크릿의 상비병까지 모두 긁어모아도 2,000명 이상의 병력은 어려웠다.

하지만 아그라 영주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어림잡아도 1만 명 이상….

게다가 윈드시크릿은 이제 성벽을 재건하는 중이라 농성전도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하임은 아카피론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할 말 다 했으면 돌아가라.”

“후회할 것이오.”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가는 아카피론. 그와 동시에 마하임의 그림자에서 아나모네가 희미한 잔상을 흩뿌리며 나타났다.

“주인. 저 인간, 죽여도 되나?”

“아니. 지금은 때가 아니다.”

마하임은 싸늘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하륜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하륜, 분명 이길 수 있다고 했지?”

“네. 영주님. 이미 계책은 다 짜여 있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말하는 하륜. 그의 가면은 오늘따라 더욱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그럼 시작해 보자, 우리의 첫 번째 전쟁을.”

* * *

윈드시크릿은 바다를 끼고 있는 일종의 반도와 같은 지정학적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육상으로 윈드시크릿을 오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샤이닝힐’이라는 험준한 산맥을 넘어야만 했다.

그 험준한 샤이닝힐 산맥의 초입 부근. 그곳에 100여 명의 기마병을 이끌고 마하임과 하륜이 숨을 죽이고 멈춰 서 있었다.

다그닥다그닥.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얼마 후 기마병 한 명이 선두의 마하임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마하임 앞에서 말을 내린 후 무릎을 꿇고 말했다.

“아그라 영주의 병사들이 접근을 확인했습니다. 기마병은 2000명, 그 뒤를 5000여 명의 보병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수고했다. 본대와 합류하도록.”

“예. 영주님.”

그와 대화를 마친 후 마하임은 하륜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수는 대략 맞군.”

“소심한 아그라 영주라면 절반 이상의 병력은 자신의 영지에 남겨 둘 테니까요.”

하륜은 늘 그렇듯 은색의 가면을 쓴 채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마하임은 타고 있는 말의 고삐를 당기며 자신을 따르는 병사에게 외쳤다.

“적이 다가오고 있다. 너희도 잘 알고 있겠지만, 이번 전쟁은 우리가 일방적인 열세다.”

쥐 죽은 듯이 조용한 병사들. 그런 병사들을 향해 마하임은 더욱더 소리 높여 외쳤다.

“어쩌면 여기서 모두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두 번 다시 가족들을 못 볼지도 모른다.”

마하임은 입을 닫고 잠시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훈련은 충분할지 몰라도 실전은 이게 처음일 것이다. 첫 전투에 사망할 확률은 무려 70%.

더욱이 이런 불리한 싸움에서라면 그 확률은 더욱더 올라간다. 그러나 싸우지 않으면 노예가 되거나 죽을 뿐이다.

언제나 그렇듯 자유는 승자의 것. 마하임은 마음을 다잡고 힘차게 외쳤다.

“허나! 우리는 지켜 낼 것이다. 우리의 고향, 우리 가족들이 살아갈 이 대지! 그곳을 지키기 위해 우린 여기에 모였다! 승리하자! 윈드시크릿의 아들들이여! 승리하자! 아르케비니아의 병사들이여!”

“와아아아아아!”

마하임의 외침에 병사들은 땅이 울릴 듯이 함성을 질렀다. 비록 병사의 수는 적었지만 사기만큼은 하늘을 찌를 만큼 높았다.

저 멀리 지평선 넘어 뿌연 먼지가 피어오르는 것이 마하임의 시야에 들어왔다. 필시 아그라 영주의 병사일 것이다.

“가자, 하륜. 놈들에게 샤이닝힐의 무서움을 보여 주자고.”

“네. 영주님.”

마하임이 탄 말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다른 기마병들도 기다렸다는 듯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승리의 여신은 누구에게 미소를 지을 것인가?

후대에 샤이닝힐의 악몽이라 불리는 전투는 그렇게 서막을 열었다.

* * *

바로 앞도 잘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자욱한 안개가 내려 깔린 샤이닝힐의 언덕길. 기어코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시야는 바로 앞도 보기 어려울 정도로 나빴지만, 상당히 많은 수의 기병과 보병들로 이루어진 무장 집단이 빠른 속도로 이동 중이었다.

무언가 급한 일이 모양인지 이들은 자신의 부대를 상징하는 붉은 용의 문양이 새겨진 깃발조차 똑바로 세우지 못한 채, 샤이닝힐의 좁고 비좁은 오솔길로 줄기차게 나아갔다.

“놓치지 마라! 마하임의 목을 베는 자에게는 50골드, 아니 100골드라도 주겠다!”

이 기마병들의 선두, 그곳에는 다른 기마병들의 투박한 바스트 플레이트와는 비교조차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금빛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있는 사람이 악을 쓰듯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풀 플레이트 아머의 특성상 얼굴을 제외한 모든 몸의 부위가 중장갑(重裝甲)으로 둘러져 있어서 그의 마상에서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위태롭기까지 했다.

하지만 최소한 준마(駿馬)는 되어 보이는 우람한 말과, 그리고 그 말에 장비된 각종 마구(馬具)는 이를 충분히 커버할 정도로 잘 갖추어져 있었다.

‘흥! 포상금은 200골드인데, 100골드는 자기가 먹겠다는 이야기잖아.’

하지만 그가 제시한 100골드는 병사들의 사기를 향상시키는 데에는 그리 큰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이 말을 들은 대부분의 병사들은 속으로 있는 대로 욕을 해 댔다.

물론 100골드는 결코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그의 뻔뻔스러운 계산이 담긴 이 말 자체가 병사들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아카피론 장군님, 진군 속도를 늦추어 주십시오!”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던 화려한 갑옷의 남자는 그때서야 말의 고삐를 당겨 속도를 늦춘 뒤 자신에게 잔소리를 해 대는 이 귀찮은 존재를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입니까? 제난 경. 적의 우두머리가 바로 코앞인데.”

“그렇다 하더라도 멈추셔야 합니다. 이미 후속 병참 부대의 진형은 모두 무너진 상태입니다. 지금 기습이라도 당한다면 큰 피해를 입을 겁니다.”

“마법사인 그대가 전술에 대해 무엇을 알겠소. 더군다나 적의 수는 끽해야 5000명 이하요. 2000명이 넘는 기마병으로 이루어진 우리 부대가 왜 놈들이 두려워해야 하오?”

왜소한 체구에, 무장이라고는 상의에 걸쳐 입은 흑갈색 가죽 로브가 전부인 그는 살기등등한 아카피론의 말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말했다.

“그것은, 장군님이 잘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적을 단순한 도적 집단처럼 생각하시면 큰 오산입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몇 시간이나 쫓았는데 꼬리조차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적에게 무슨 계략이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닥치시오, 제난 경. 아그라 영주님이 지금 당신의 말을 들었다면 경을 쳤을 거요. 닥치고 그대는 내 뒤만 따라오시오. 알아듣겠소?”

아카피론은 더는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말머리를 돌렸다. 그러고는 잠시나마 진군 속도를 늦춘 기마대에 다시 전력 진군 명령을 내렸다.

약 2000여 기에 달하는 기마병들은 그의 명령과 함께 일제히 속도를 높였다.

‘아아, 이젠 어떡하란 말인가?’

제난은 인상을 잔뜩 구긴 채 아카피론 장군의 투구로 가려진 뒷머리를 뚫어지게 노려봤다.

이런다고 별수 없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동안 쌓여 온 증오와 분노 때문에 아카피론 장군에게 파이어볼을 날려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그라 영주의 영지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은 3일. 이 3일 동안 제난은 앞뒤가 꽉 막힌 아카피론 때문에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나름대로 조언도 해 보고 달래도 보았지만, 아카피론은 기본적인 용병술마저 무시하고 마치 이미 이 전투에서 승리한 것처럼 날뛰고 있었다.

“기, 기습이닷!”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던 제난은 갑작스러운 병사들의 비명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슉슉-!

방금까지만 해도 칙칙한 안개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하늘에서 화살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던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짙은 안개 속에서 이처럼 정확한 화살 공격이 가능한지 알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번 공격 역시 피하기는 글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벌써 이런 식으로 기습을 당한 것이 네 번째…. 하지만 이들의 피해 정도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카피론이 이끄는 기마병의 무서운 점은 그들이 입고 있는 갑옷과 방패였다.

아카피론이 입고 있는 풀 플레이트 아머 정도는 아니었지만, 가슴부터 허리까지 완벽히 감싸 주는 바스트 플레이트와 대형 방패로 무장한 이들은 적의 공격, 특히 화살 공격에 대해서는 완벽한 방어가 가능했다.

“당황하지 마라, 방어 대형으로!”

몇 번이나 똑같은 패턴의 기습을 당해 온 터라 병사들은 별로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아카피론의 명령에 따라 둥글게 뭉쳤다.

그리고 기마병들은 일제히 방패를 위로 향하게 함으로써 진은 일순간 화살 하나 파고들지 못할 요새로 변모했다.

“겁쟁이 녀석들아! 나와서 정정당당히 승부하자!”

벌써 몇 시간째 이런 지루한 추격전이 계속되자 짜증이 머리끝까지 난 아카피론 장군은 진의 중간에서 주변 사람들의 귀가 아플 정도의 큰소리로 외쳐 댔다.

‘하…!’

제난은 자신도 모르게 그만 실소하고 말았다.

정정당당히라니…. 이 세상에 어느 정신 나간 놈이 겨우 5000의 병력으로, 아그라 영주의 정예 기병대와 정면으로 승부한단 말인가?

그야 어쨌든 마하임이 이끄는 윈드시크릿의 군대의 움직임은 아무리 봐도 수상했다.

적의 공격 방식으로 볼 때 유인작전임에 틀림없었지만, 그 진의는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이런 산악 지형에서 주로 사용하는 용병술로는 화계나 그렇지 않다면 낙석 등이 있지만, 지금 이곳에는 이 두 가지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는 것 같았다.

화계는 지금의 습한 날씨 때문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고, 낙석 역시 아름드리 원시림으로 빽빽이 뒤덮인 이곳에서 사용한다는 것은 화계만큼이나 실효성 없는 작전이었다.

“저, 적이다!”

그때였다. 화살의 파상 공격이 멈추기가 무섭게 지금까지 제대로 된 공격 한 번 없이 도망만 치던 윈드시크릿 군이 비탈진 언덕 위에서 쏟아지듯 나타났다.

약 100여 명으로 구성된 이들은 길게 늘어진 아카피론의 기병대 옆구리를 단숨에 파고들었다.

익숙지 않는 지형, 그리고 그동안의 무리한 행군으로 지칠 때로 지친 병사들이 결사의 각오로 달려드는 이들을 막아 낼 리 만무했다.

게다가 선두에서 오러를 흩뿌리며 일방적인 살육을 자행하는 요한의 존재는 이들의 사기를 단번에 바닥으로 만들고 말았다.

“크아아.”

“으아악!! 내 팔…. 내 팔이!!”

“살려 줘. 으아아악!!”

병사들의 비명이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주변이 탁 트인 넓은 곳이라면 그나마 어떻게 해 보겠지만, 이곳은 2000명이나 되는 기마병이 행군을 하기에는 너무나 장소가 협소한 곳이었다.

가뜩이나 좁은 곳에서 습격을 받은 데다가 방금 전 활 공격의 방어를 위해 짠 밀집 대형의 진은 기마병 최대의 장점인 기동력을 제로로 만들어 버려 더더욱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