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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군주-35화 (35/194)

35화

“미안해, 리나. 기다려 줄 수 있지?”

“응 언니, 기다릴게. 부디 샤론의 가호가 함께하길.”

세실은 동생 리나에게 모든 짐을 넘기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벌써 5년 전 일….

아직도 세실은 리나의 체온이 느껴지는 듯했다.

당장에라도 조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지금 가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시오니아 제국의 힘은 강대했고, 그녀는 아무것도 아닌 도둑에 불과했으니까.

“나는 돌아갈 거야. 반드시!”

거침없이 레이피어를 휘두르는 세실. 검이 번뜩일 때마다 적은 썰려 나갔다. 그 모습은 피에 굶주린 악귀의 모습 그 자체였다.

“물러서지 마라! 적은 소수다!”

어느 사이엔가 전열을 가다듬은 아그라 군이 세실과 리자드맨들을 포위했다.

비록 일부가 죽고, 사기가 떨어졌다고 하나, 그들 역시 정식 훈련을 받은 군인이었다. 하이엘프 하나와 리자드맨 수십 마리에 무너질 리 없었다.

“포기하고. 무기를 버려라!”

점점 포위망을 좁혀오는 아그라의 병사들. 리자드맨들은 그럼에도 격렬히 저항했다. 그러나 압도적인 수적 열세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넘어설 수 없는 거대한 벽이었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전멸을 피할 수 없는 상황. 하지만 세실의 얼굴에는 절망이라는 감정은 느낄 수 없었다.

“설마 했는데, 진짜 왔네?”

세실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직후 흐릿한 검은 그림자가 바닥에 드리워졌다. 그것은 거대한 날개의 잔상. 그림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로어하피였다.

키에에에에-!

우지직!

고공에서 낙하한 로어하피 무리는 단숨에 병사들을 낚아채 하늘 위로 던져 버렸다.

로어하피의 공격은 그야말로 자비란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 팔뚝만 한 날카로운 발톱으로 하늘에서 내리꽂듯 공격하는 하피의 공격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일격 필살의 위력을 보여 줬다.

제아무리 수가 많고 훈련이 잘된 군대라 하더라도 이런 생소한 공격에는 당해 낼 수가 없었다.

“키르르르, 하이엘프. 벌써 발톱을 감추는 거냐?”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여느 로어하피보다 훨씬 크고 진한 황금빛 깃털의 로어하피 ‘붉은 바람의 눈’.

그녀는 타오르는 듯한 붉은 눈을 번뜩이며 세실에게 말했다. 그녀는 엘프 특유의 동물 교감을 통해 하피의 말을 알아들었다.

“좀 지쳤을 뿐이야. 그보다 무슨 바람이 불었지? 로어하피가 인간을 위해 발톱을 세우다니.”

“케릉,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다. 아크로드를 위해서다.”

언짢은 듯 인상을 구기는 붉은 바람의 눈. 그런 그녀를 향해 세실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웃었다.

“그 아크로드가 인간이잖아?”

“케르르르, 닥치고 발톱을 세워라! 적이 눈앞이다!”

붉은 바람의 눈은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세실은 붉은 바람의 눈을 바라보며 외쳤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지?! 단숨에 날려 버리자!”

“키에에엑, 날개 없는 자에게 진다는 것은 수치! 그 수치를 반복할 순 없지.”

붉은 바람의 눈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20마리의 로어하피가 연이어 따라왔다.

그녀의 목표는 길게 늘어선 아그라 군 보급 부대의 허리를 끊는 것. 붉은 바람의 눈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목표를 향해 내리꽂혔다.

츄아아아!

퍼억! 키루루루루!

괴, 괴물이다! 으아악!

하피의 포효 소리와 병사들의 비명 소리가 뒤엉켰다. 병사들은 싸울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보통의 하피보다 2배는 큰 덩치에 그 힘은 숲의 제왕이라 일컬어지는 ‘버그베어’보다 강력했다.

특히 로어하피의 우두머리 ‘붉은 바람의 눈’은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공포에 질릴 만큼 엄청난 박력으로 병사들을 유린했다.

“안 돼! 저건 이길 수 없어!”

“도망쳐! 괴물, 아니 악마다!!!”

병사들은 버티지 못하고 저마다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사기가 떨어진 상태에서 로어하피의 등장은 병사들이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키에에엑 ‘아크로드’의 명이다. 죽어라, 인간!”

붉은 바람의 눈이 힘껏 날갯짓하자 순간 돌풍이 일어났다. 그 위력은 세실이 소환한 바람의 정령의 힘만큼이나 강력했다.

병사들은 붉은 바람의 눈이 일으킨 바람에 휘말려 종잇장처럼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리고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다른 로어하피들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놈들을 짓밟아 버렸다.

“모두 후퇴하라! 모두 후퇴!!!”

누구랄 것도 없었다. 무기를 쥔 병사들은 저마다 자신의 병장기를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전투에서 한 번 무너진 사기는 쉽게 회복할 수 없다. 더군다나 같은 인간도 아닌 저런 괴물 앞에서야 정상적인 사고를 하기는 불가능했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공포는 전염된다. 이럴 때는 오히려 근처에 사람이 많은 것이 독이 되는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좁은 공간에 많은 인원의 병사들이 뒤엉키면서 서로 밟고 밟히는 사태도 속출했다.

그러나 앞뒤가 완전히 분단된 이들을 지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륜 녀석, 제법인데? 다시 봐야겠는걸?”

처음 하륜이 이 작전을 말했을 때 세실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신이 이끄는 리자드맨들 30마리와 도움을 줄지도 확신할 수 없는 로어하피 무리를 믿고 무려 5000명의 대군을 막아서야 한다니.

자살 행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하륜의 생각은 달랐다.

“충분히 승산은 있습니다. 무조건 병력이 많다고 다 유리한 것은 아니니까요.”

하륜은 이렇게 말하며 거액의 선수금까지 쥐여 주자 세실은 마지못해 이번 작전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원래라면 이런 위험천만한 일은 억만금을 준다 해도 절대 승낙하지 않았겠지만, 아그라 영주가 윈드시크릿을 점령하게 된다면 세실에게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운이 없다면 지난 몇 년간 애써 만든 세실의 거점이 날아가 버릴 가능성도 컸기에, 싫든 좋든 싸워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전장의 모든 상황이 하륜이 말한 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승률이라고는 쥐꼬리만큼도 보이지 않은 전투였지만, 로어하피 무리까지 지원군으로 나타나자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어 버렸다.

“워워, 이게 다 식량이야?”

도망친 아그라군 병사들이 남긴 것은 군량미가 가득 실린 수레 100여 대였다.

대부분 밀과 같은 곡물이었지만, 그중 일부는 육포와 같은 건어물도 있었다.

“크르르릉, 이걸 다 태워야 하나? 아깝다, 족장.”

“그러게. 나도 좀 챙겼으면 좋겠지만….”

시간이 없었다. 아그라군의 병참 부대가 당장은 도망쳤다 하더라도, 전열을 가다듬어서 다시 돌아올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후방 병참 부대에 문제가 생긴 것을 안 선두 부대에서 증원을 보내올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되면 꼼짝없이 고립되어 놈들의 먹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모두 불태운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

세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의 검이 시뻘건 불길을 뿜어내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불의 정령 샐러맨더가 소환된 것이다.

“횃불을 들어라! 빨리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

아직도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리자드맨들을 세실은 다그쳤다. 그러자 리다드맨들은 마지못해 미리 준비해 온 횃불에 불을 붙였다.

화르르륵-!

군량미를 실은 수레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윈드시크릿의 겨울 우기 때문에 매우 습한 날씨였지만, 잘 마른 밀알은 불씨가 되어 순식간에 수레 전체로 불이 번져 갔다. 세실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할 일은 다 했어. 이제 마무리는 영주, 네가 하기 나름이야.”

* * *

같은 시각, 아그라군 선두 기마 부대. 아카피론은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뭐라? 병참 부대가 퇴각했다고?!”

뒤늦게 보고 받은 아카피론은 분노에 온몸을 떨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병참 부대는 비록 보병이라고는 하나 5,000명 이상의 병사로 보호받고 있었다.

이는 윈드시크릿의 군대 전체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규모였다. 그런데 그 병참 부대가 공격을 받아 퇴각했다니,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자세한 상황은 척후병이 돌아오지 않아 알 수 없습니다.”

“이 병신 같은 놈들! 즉시 병참 부대를 지원하러 간다!”

병사의 보고에 아카피론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아직 윈드시크릿의 영주를 잡지도 못했다. 그런데 병참 부대가 패퇴했다니, 그것은 치명적인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군대를 움직이려면 반드시 식량이 필요했다. 전투에는 많은 칼로리를 소모했기에 승리를 위해서라면 단 한 끼도 굶길 수 없었다.

게다가 식량 보급은 사기와도 직결되었기에 병참 부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훗, 꼴좋군. 이번 원정은 끝이다.’

제난은 아카피론의 등 뒤에서 그를 바라보며 비웃었다.

보급 부대가 위치한 곳으로 추정되는 곳에서는 시커먼 연기가 모락모락 솟아오르고 있었다.

아마도 지금 돌아가 봤자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잿더미가 되어 버린 식량뿐일 것이다.

‘마하임이라고 했나? 어쩌면 우린 무서운 자를 적으로 돌렸는지도 몰라.’

아그라군과 윈드시크릿군의 병력 차는 적어도 2배 이상이었다.

그런데도 윈드시크릿군은 허무할 정도로 간단히 병참 부대를 물리쳤다.

그 방법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대로 간다면 아그라군은 전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제난의 머릿속을 스쳤다.

“회군하라! 즉시 회군…?!”

급하게 말머리를 돌리는 아카피론. 바로 그때였다.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그의 뺨을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

“응? 뭐야?”

그는 뺨을 닦았다. 흘러내리는 피. 그리고 아카피론의 등 뒤에 있던 병사 한 명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낙마했다.

“화살?!”

병사의 이마에 정확히 꽂혀 있는 것은 새하얀 깃이 달린 화살이었다.

아카피론은 천천히 뒤돌아봤다. 그리고 화살이 날아온 진행 방향에 서 있는 한 무리의 사람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선두에서 유독 낯익은 얼굴이 눈에 띄었다.

“드디어 찾았다! 마하임 영주.”

귀족 특유의 짙은 금발, 그리고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 아카피론은 마하임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이제 도망은 포기한 거냐?”

아카피론의 물음에 답한 것은 또 한 발의 화살이었다.

화살을 쏜 사람은 다름 아닌 아나모네. 그녀가 쏜 화살은 눈 깜짝할 사이에 아카피론이 타고 있던 말 정수리에 꽂혔다.

히이이잉!

고통스러운 울부짖음과 함께 아카피론의 말은 뒤로 펄쩍 뛰어오른 뒤 바닥에 쓰러졌다. 아카피론 역시 균형을 잃고 바닥에 나동그라졌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크흑! 잡아, 잡으라고! 뭣들 하고 있냐?!”

바닥에 쓰러진 아카피론은 소리쳤다. 하지만 병사들은 머뭇거리고 있을 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말을 움직이면 자신들의 지휘관, 아카피론을 짓밟아 버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멍청한 녀석들!”

아카피론은 가장 가까이 있는 기마병 한 명을 강제로 바닥에 끌어내렸다. 그리고 그의 말을 올라탄 채 소리쳤다.

“전군 전진하라! 마하임 영주를 쫓아라!”

아카피론이 앞장서고 그 뒤로 그의 부하들이 뒤를 따랐다. 아나모네는 기다렸다는 듯 아카피론을 향해 다시 화살을 날렸다.

“흥, 어림도 없지!”

비록 군 지휘력은 떨어졌지만, 그도 일단은 장군이었다. 그는 몸을 살짝 기울이더니 검으로 아나모네의 화살을 간단히 쳐 냈다.

“그딴 화살에 당할 것 같나?!”

아카피론 장군이 소리쳤다. 하지만 마하임은 대꾸도 하지 않고 말머리를 돌려 샤이닝힐의 원시림 속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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