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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군주-36화 (36/194)

36화

“이익! 또 도망을 쳐?! 이번에는 안 놓친다!!!”

비록 병참 부대가 당했다 하더라도 지금 이곳에서 마하임을 붙잡으면 전쟁은 끝, 모든 것이 해결된다.

그럼 병참 부대를 잃은 데에 대한 책임도 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가득 찬 아카피론은 앞뒤 보지 않고 마하임을 뒤쫓기 시작했다.

‘망할, 이건 누가 봐도 유인계 아닌가?!’

아카피론을 뒤따르던 제난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다 나올 정도였다. 병참 부대를 잃은 것도 그렇고, 이런 뻔히 보이는 계략에 휘말리다니.

이번 전투의 끝은 보나 마나였다.

‘도망쳐야 해!’

그의 본능이 끊임없이 경고를 보냈지만 여기서 달아날 방법이 없었다.

그는 고위 마법사가 아닌지라 ‘귀환’ 같은 상위 클래스의 마법은 사용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적진 한복판인 이곳에서 마법사인 자신이 혼자서 탈영한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머뭇거리지 마라, 쫓아라! 뒤처지는 자는 군법으로 처단하겠다!!!”

아카피론의 엄포에 마지못해 병사들은 말을 몰았다. 그러나 마하임의 뒤를 쫓으면 쫓을수록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질퍽한 늪 같은 오솔길과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숲이었다.

근래 내린 폭우 덕분에 샤이닝힐은 흠뻑 젖어 있었다. 젖은 땅은 진창을 이루고 있어 말이 지나가기에는 최악의 조건이었다.

더군다나 지면까지 솟아오른 나무의 뿌리는 천연의 덫이 되어 말의 발을 부러트려 놓았다.

이히이잉! 으악-!

말과 사람의 신음이 연이어 들려왔다. 아카피론이 이끄는 기마 부대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낙오하는 자가 속출했다. 그러나 아카피론은 멈추지 않았다.

“똑바로 못 해!? 그라고도 너희들이 아그라 영주님의 기마병이냐?!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 윈드시크릿 놈들도 여길 지나갔다. 너희들이 못 할 게 뭐냐?”

아카피론의 말에 틀린 곳은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샤이닝힐의 험준한 산길은 그들처럼 대규모로 움직이는 병력에게는 최악의 환경이라는 것이다.

“사, 살려….”

퍼퍽!

동료들이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데도 그들은 전진만을 계속해야 했다.

말발굽에 밟혀 동료들의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귓전에까지 들려다. 그러나 그들은 멈출 수 없었다.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 앞으로 달리는 것뿐….

타인의 죽음을 신경 쓸 만한 여유 같은 건 없었다.

길은 여전히 좁고 마치 동굴을 연상시킬 정도로 빽빽한 나무로 감싸져 있었다. 방향 감각 따위는 상실한 지 오래였고 진 중앙에서는 낙오한 병사들의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지금껏 수차례나 전쟁의 한복판에 서 있었던 그들이었지만, 후퇴도 아닌 추격을 하면서 아군을 짓밟고 나아가야 하는 이런 상황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었다.

“하하하, 전진하라! 정의는 우리에게 있다. 가라! 아그라의 용사들이여!”

뭐가 그리 좋은지는 몰라도 흥에 겨워 외쳐 대는 아카피론에게 제난은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은 역겨움을 느꼈다.

정의!? 동료를 짓밟고서라도 적을 섬멸해야 하는 정의라….

하긴, 지금 이 전쟁 자체가 정의란 단어와는 전혀 인연이 없었으니 그리 흥분할 일도 아니었다.

약자를 힘으로 제압하고 채무를 회수하는 일은 깡패들이 하는 일이지, 정규군이 나서서 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아무런 명예도 명분도 없는 전쟁. 제난은 파병 이전부터 이번 전쟁을 반대했었다.

언제나 그렇듯 제난은 아무런 힘이 없었다. 그는 문벌 귀족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영주에게 신임을 받는 신하도 아니었다.

오직 마나를 다룰 수 있다는 이유, 그 이유 하나만으로 등용된 마법사일 뿐이었다.

‘이대로 끝인가?’

제난은 느낄 수 있었다. 점점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병참 부대가 무너졌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기껏해야 3일 정도밖에 작전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당장 마하임을 잡지 못하면 패배는 시간문제라는 이야기였다. 그런데도 아카피론은 적의 계략에 빠져 전진만을 외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이 샤이닝힐에 온 직후부터 아카피론은 적의 계략에 놀아나고 있었다.

소규모의 병력으로 아카피론의 자존심을 건드려, 샤이닝힐의 악로 중의 악로로 유인, 후미의 병참 부대와 선두 병력인 기마 부대를 떼어 놓았다.

그리고 샤이닝힐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기마 부대 최대의 장점인 돌진력과 기동력을 거의 쓸모없게 만들어 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미리 매복하고 있는 궁수들과 호응함으로써 도주하는 동료들의 추격을 더디게 만들었다.

거의 따라 잡을 만하면 하늘에서는 화살의 비가 내렸고 아카피론의 부대는 꼼짝없이 추격을 멈춰야 했다.

거기다 아카피론의 어이없는 명령이 더해져서 아그라 영지가 자랑하는 기마 부대는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래. 힘없는 자의 운명은 원래 이런 것이야. 높으신 분들의 탐욕의 희생양이지. 미안하다, 아들아. 미안해, 여보. 난 여기서 못 돌아갈 것 같아.’

제난은 고향 생각에 목이 멨다. 그리 풍족하진 않았지만, 그곳에는 그의 소중한 가족들이 있었고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이 갑자기 보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망상에 불과했다. 그는 여기 거짓과 탐욕, 그리고 죽음의 기운만이 넘쳐나는 이곳에서 미친 지휘관의 아무런 힘없는 부관일 뿐이었다.

이번 전투에서 패할 것은 확실했다. 지금 이 상태에서 적군이 전력을 다해 반격해 온다면 2000명, 아니 이미 1000여 명으로 줄어든 기마병들은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다.

‘하지만 아카피론 넌. 사신의 손에 죽는 것이 아니라 내 손에 죽는다. 뿌드득….’

제난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언제라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도록 주변의 마나를 조금씩 모았다.

그리고 발동어 한마디만 외치면 시전될 수 있도록 천천히 스펠을 외우기 시작했다. 자신이 아는 대인 공격 마법 중 최강의 주문을.

“오오! 숲이 끝났다!”

제난이 주문을 거의 다 외웠을 무렵, 선두를 달리던 척후병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칠 대로 지친 병사들은 저마다 살았다는 표정으로 척후병이 가리킨 곳으로 힘차게 내 달았다.

제난 역시 그가 원하건 원치 않건, 뒷사람에게 떠밀려서라도 그곳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정말 숲이 끝나 있었다. 그리고 장소도 넓었다. 비록 구름 때문에 파란 하늘은 볼 수 없었지만, 구름 속에서 힘겹게 빛나고 있는 햇빛을 느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앞은 깎아 내린 듯한 절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설마, 함정!’

한마디로 말하자면 완전히 고립된 지역이었다. 이곳을 벗어나려면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곳에서 화살 세례라도 당하면 그야말로 전멸을 면할 길이 없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주변은 조용하기만 했다. 너무나 조용했다.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기, 기름 냄새?! 모두 흩어져라! 화공이다!”

제난은 미친 듯 외쳤다. 이 냄새는 연금술에서 많이 쓰이는 강한 휘발성을 지닌 기름 냄새였다.

그 특유의 역겨운 냄새 때문에 한 번 맡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냄새가 이곳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푸화하학!

병사들이 미처 반응도 하기 전에 바닥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매서운 열기와 함께 바닥은 맹렬히 타올랐다.

바닥은 화공을 위해 미리 깔아 놓은 마른 나뭇가지로 가득했다. 여기에 불이 붙었으니, 불길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아아아악! 살려 줘! 불, 불이다!”

“모두 퇴각, 퇴각하라!!”

“악!! 퇴로가 막혔어! 젠장 비켜!”

대혼란 속에 아그라군의 기마 부대는 산 채로 구워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몸, 심지어는 그들의 갑옷까지도 타들어 갔다.

강한 휘발성의 기름은 나무를 불태우면서 엄청난 열기를 뿜어냈다. 병사들은 살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사방이 가로막힌 이곳에서 그들의 발버둥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만능의 힘, 마나여! 영원의 차가움으로 여기에 강림하라! 아이스 배리어(Ice Barrier)!”

사방이 타들어 가는 난장판 속에서 제난은 급하게 주문을 외웠다. 원래는 광범위 방어 주문이었지만, 급하게 시전하느라 제난 자신의 방어에도 힘에 부쳤다.

탁타탁 화르르르…!

희미한 아이스 실드의 기운이 그의 몸을 뒤덮었다. 타오르는 열기는 그의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했다.

만약 조금만 더 열기가 지속되었다면 그 역시 다른 병사들과 똑같이 운명을 피하지 못했을 터였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이 불길이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전멸인가….”

제난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주변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불길이 스쳐 간 곳은 그야말로 지옥을 방불케 했다. 형체마저도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말들의 사체, 그리고 아직도 고통의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는 기마병들의 시체들…. 그는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나만 살아 남았…. 아니, 그건 아닌 것 같군.’

주위를 살펴보던 제난의 인상은 곧바로 구겨졌다. 자신 말고도 생존자가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기뻐해야겠지만, 그는 절대 기뻐할 수 없었다. 그 생존자는 다름 아닌 아카피론 장군이었으니 말이다.

“오, 제난 경 살아 있었군. 역시 제난 경은 뛰어난 마법사일세. 자, 적이 오기 전에 어서 도망….”

“풋, 하하하!”

제난은 아카피론의 말을 끊고는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지금 이 모든 것이 우스꽝스러운 연극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 부인 못 할 진실의 순간이 다가오고야 말았다.

“제길, 제대로 웃지도 못하겠군. 다시 한번 말해 보시지? 아카피론 장군!”

제난은 너무나 황당하고도 역겨운 그의 이 말에 실소하고 말았다. 그가 어떻게 이 불지옥에서 살아남았는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그가 입고 있는 풀 플레이트 아머에 인챈트 마법으로 불에 대한 보호가 걸려 있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서 아는 것이었으니까.

그는 처음 아카피론 장군의 생존을 보았을 때 그야말로 증오로 불타올랐지만,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아니 혹시라도 죽었다면 제난은 분명 통곡을 했으리라.

“무슨 말인가? 제난 경. 난 그대의 상관이다!”

“상관? 훗, 내가 할 말은 이것뿐이다. 만능의 힘 마나! 그 목적 없는 강대한 힘이여. 영원히 부패하는 검은 구름으로 여기에 강림하라! 타일런트!!!”

부패 마법 타일런트. 제난이 알고 있는 마법 중 가장 강력하고도 가장 잔인한 마법. 실제 사용해 본 적도 없는 마법이었지만, 그 위력만큼은 확실했다.

“자, 잠깐…. 제난! 무슨 짓이야, 으아악!!”

제난이 재구성한 마나는 음침하고도 소름 끼치는 검은 구름으로 변해 순간 그를 감쌌다. 그리고 서서히 아카피론의 몸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제발 멈춰, 큭…. 크아아아아!”

찢어질 듯한 비명이 연이어 울려 퍼졌다. 하지만 제난은 한없이 차가운 미소를 지을 뿐, 그를 도와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표현할 길 없는 극심한 고통에 휩싸인 아카피론은 이내 자아마저도 붕괴해 갔다.

곧, 아카피론의 몸에서 이상한 조짐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조짐은 갑옷 밖으로 드러난 아카피론 몸 전체에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그의 피부는 일순간 검게 변하는 듯하더니, 이내 물컹이는 액체로 변하여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리고 코를 찌르는 악취. 그의 몸은 문자 그대로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크어어….”

이젠 시체라 부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뭉개져 버린 아카피론은 서 있지도 못하고 괴성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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