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그 참혹한 모습에 제난은 순간 얼굴을 찡그렸지만, 불쌍하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들었다.
오히려 좀 더 고통스럽게 죽이지 못한 것이 제난은 못내 아쉬울 뿐이었다.
“후후, 역겨운 최후로군. 딱 어울려, 네놈에게는.”
제난은 미친 듯이 한참을 웃었다. 그리곤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검을 하나 주워들었다. 불의 영향으로 대부분 검게 그을려 있었지만 그 날카로움은 여전했다.
“이제 끝내자. 너무 지쳤어.”
검을 주워 든 제난은 천천히 자신의 목에 그것을 가져다 댔다.
동료들과 가족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할 수만 있다면 살고 싶었다. 미친 듯이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고향, 아그라에서는 패잔병이란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돌아가 봤자 그를 기다리는 것은 멸시와 천대, 그리고 죽음뿐이었다. 어차피 죽는다면 명예롭게 전장에서 죽는 것이 맞았다.
제난은 눈을 질끈 감고 손에 든 칼로 목을 그었다.
챙-!
그가 막 목을 긋기 직전이었다. 어디선가 날아온 단검은 너무나 정확히 제난이 쥐고 있는 검신에 명중했던 것이다. 이때의 충격으로 순간 그는 검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재미있군요. 이름이 제난이었던가요?”
단검이 날아왔으리라고 생각되는 곳을 바라본 제난은 너무나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전방을 가로막고 있던 낭떠러지가 순간 희미해지더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들은 마치 유령처럼 희미해 존재감마저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지만, 제난에게로 다가옴에 따라 선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유적에서 파낸 홀로그램을 이런 식으로 사용할지는 생각지 못했을 겁니다.”
제난의 눈앞에 나타난 이들은 약 30명의 기마병이었다. 각자 다른 무장과 병장비를 볼 때 균일한 훈련을 받은 부대는 아닌 듯했다. 하지만 그들이 든 깃발을 보자 제난은 입을 다물었다.
“윈드시크릿의 군대인가?”
절벽은 곧 사라졌다. 그제야 제난은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 수 있었다. 지금 그가 있는 이곳은 윈드시크릿군을 처음 발견해 쫓기 시작한 바로 그곳이었다.
“원래 계획은 없었지만, 영주님께서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고 하셔서요.”
하륜은 이렇게 말하며 제난을 바라보고 방긋 웃었다. 제난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 하륜 뒤에서 새하얀 백마를 탄 금발의 소년이 나타난 것이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이군. 윈드시크릿의 영주 마하임이라고 한다.”
제난 앞에 나선 마하임. 그는 아카피론이 입고 있던 갑옷에는 못 미치지만 적어도 실용적인 면에서는 월등히 뛰어난 중장 갑옷을 입고 있었다.
“존칭은 생략하마. 어쨌건 내가 전투에서 이겼으니까.”
이렇게 말하고선 마하임은 말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상당한 무게의 중장갑을 입고 있는 상태였지만 마하임은 갑옷 부딪치는 소리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착지했다.
그러고는 제난의 눈과 자신의 눈을 같은 높이로 맞추었다.
“제난. 넌 정의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
겉보기에는 소년 티를 막 벗은 애송이의 모습인 마하임의 물음에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의. 지금의 자신과 가장 거리가 먼 이야기. 그는 마하임의 물음에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럼 내 생각을 이야기하지. 힘이 곧 정의다.”
“……!!”
제난은 이 궤변과 같은 이야기를 듣고 실소할 뻔했다. 그는 비아냥거리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힘은 정의가 아니다. 어린 영주여. 우리 아그라를 보아라. 우리는 힘이 있지만 정의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그건 네놈들의 일이 잘 안 풀려서 그렇겠지? 만약 너희가 이 전투에서 이겼다면 어땠을까? 정당한 채무의 회수 과정에서 발생한 전쟁이었다며, 당당하게 윈드시크릿을 약탈했겠지. 그리곤 정의는 실현되었다고 아그라 영주는 말하겠지. 어때, 내 말이 틀렸는가?”
마하임의 말에 제난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은 한 치의 과장도 없는 현실이었으니까.
“지난날 이 대륙의 역사를 보아라. 힘이 약한 정의가 있었는가? 정의는 항상 강했고, 그 정의라는 것의 이름으로 힘없고 억눌린 자를 악으로 몰아붙이지 않았던가.”
숨도 제대로 쉬지 않고 마하임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그것이 정의야. 빌어먹을 정의!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 그렇다면, 그렇다면! 이젠 내가 정의가 되겠다!”
마하임은 자신의 이 외침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검을 쥐고 있지 않는 다른 한 손은 자신의 흉갑(胸甲)위로 가져갔다.
“이것이 나의 검이다. 너무나 나약한. 이래서는 정의가 될 수 없다. 잘난 척하며 말했지만, 나 역시 버림받은, 힘없는 왕족일 뿐. 나 혼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마하임의 말을 들은 제난은 생각에 잠긴 듯 두 눈을 감았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이 전투 속에서 그는 많은 것을 선택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원하건 원치 않건 또다시 선택의 시간이 온 듯했다.
“윈드시크릿의 영주님…. 제가 무엇을 하기를 바라십니까.”
“나의 정의, 아니 우리 모두의 정의를 위해 당신의 마나를 움직여 주길 바란다.”
“그것이 가능하리라 생각하십니까?”
그는 반문했다. 그러나 마하임은 무어라 말을 하는 대신 부드러운 미소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좋습니다. 이 제난 페르미온, 당신이 만드는 정의에 저의 마나, 저의 생명 모두를 걸겠습니다.”
마하임의 앞에 무릎을 꿇는 제난 페르미온.
흐렸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늦은 오후의 황혼을 흩뿌리고 있었다. 그렇게 마하임의 첫 전투는 막을 내렸다.
* * *
3일 뒤. 아그라 영지의 영주, 라크나의 영빈관. 점심 식사를 하던 그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병사의 보고에 깜짝 놀라 소리쳤다.
“무어라?! 전멸했다고?”
그의 나이 육십. 지금껏 살면서 이처럼 황당하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은 처음이었다.
“네…. 보병 부대도 3000명 정도밖에 귀환하지 못했습니다.”
“…아카피론은?”
“전사하셨습니다.”
“망할!!! 역시 그 병신에게 맡겨선 안 되는 거였어!”
아카피론의 무능함은 라크난 역시도 모르진 않았다. 그래도 명색이 그는 기사 작위를 받았고, 아그라 영지의 유수한 권력층이기도 해 그를 총지휘관으로 임명했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참혹하다 못해 처참할 정도였다. 윈드시크릿의 병력은 해 봤자 3000 남짓이었을 텐데 그 2배 이상이나 되는, 그것도 정예병을 이도록 허무하게 잃다니….
라크난 작금의 현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꼴도 보기 싫다! 나가! 어서!”
“네, 넵!”
보고를 하던 병사는 허겁지겁 영빈관 밖으로 나갔다. 라크난은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윈드시크릿이 이렇게나 성장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윈드시크릿…. 영주 마하임이라고 했던가?”
채무를 핑계로 윈드시크릿을 은근슬쩍 흡수해 버리려는 그의 계획은 뿌리째 흔들렸다.
어쩌면 이번 전쟁을 구실로 본격적인 영지전을 걸어올지도 몰랐다.
물론 그에게는 아직 병력이 남아 있긴 했지만, 이번 전투에서 진 이유가 병력 때문이 아니었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와장창-
점심상이 차려져 있는 책상을 엎어 버리는 라크난. 그러고도 분이 안 풀리는지 책상에 있는 책이며 장식물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이대로 물러설 순 없어! 이렇게 된 이상 본국에 지원…. 누구냐?!”
갑자기 느껴진 인기척에 라크난은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어지럽혀진 음식물과 그릇만 나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신경과민인가?”
긴 한숨을 내쉬는 라크난. 생각해 보면 지금 이곳에 인적이 있을 리 없었다.
이곳은 자신의 영지 중에서 가장 안전한 곳 중 하나였다. 자신이 허락지 않으면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어쨌건 윈드시크릿은 가만히 놔둘 수 없어. 이렇게 된 이상, 뿌리를 뽑아 버려야 해!”
“그건 곤란하다.”
바로 그때 들려온 목소리. 라크난은 화들짝 놀라 뒤돌아섰다. 역시 주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표현할 길 없는 무언가가 분명 이곳에 존재했다.
챙-!
라크난은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을 뽑았다. 여전히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살기가 그의 온몸을 긴장시켰다.
“내 이름은 아나모네. 마하임 영주님의 전언이 있다.”
다시금 들려온 차가운 여성의 목소리. 그와 함께 라크난의 목에 검은색 줄이 소리 없이 휘감겼다. 그리고 교수형에 처한 사형수처럼 라크난은 허공에 매달렸다.
“컥, 허억!”
목이 졸려 허공에서 버둥대는 라크난. 그의 그림자에서 사람의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아니 그녀는 그림자만큼이나 새까만 옷을 입고 있었다.
“죽어라, 라크난. 그대의 마법사는 유용하게 쓰겠다.”
점점 의식을 잃어 가는 라크난의 귀에 차가운 여성의 마지막 음성이 마지막으로 들렸다.
그러나 그는 무어라 대꾸도 못 하고 혀를 내밀고 축 늘어졌다.
그의 죽음을 확인한 아나모네는 처음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로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 듯 사라졌다.
* * *
“부탁이야 영주! 제바알~!”
전쟁이 끝나고 석달이 지났다. 윈드시크릿에도 봄이 찾아왔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세실이 또 마하임의 서재가 있는 영빈관으로 찾아왔다.
“거부한다.”
마하임은 다시금 세실의 제안을 거부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저 엘프는 돈에 미쳐 있음이 틀림없었다.
지난 아그라와의 영지전에서 하륜에게 받은 짭짤한 수익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실은 좋은 돈벌이가 있다면서 마하임 꼬시기를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도와주겠노라고 이야기했지만, 그녀의 본론을 듣고 난 뒤 마하임은 펄쩍 뛸 수밖에 없었다.
“나보고 해적질을 하라는 거냐?”
“다른 나라들도 알게 모르게 다 하는 일인데 뭐 어때? 그냥 하자? 응?”
그녀의 말에는 틀린 것은 없었다. 바다를 끼고 있는 대부분의 나라가 저마다 정규군의 일부를 해적으로 돌려 타국의 상선이나 어선을 공격해 자국으로 빼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 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건 나도 안다. 허나 세실. 그대가 노리는 건 시오니아 제국의 상선 아닌가?”
“그래서 이렇게 부탁하는 거잖아. 마하임이 도와주면 가능하다니까. 이번 한탕만 하면…. 당분간 돈 걱정은 끝~! 같이하자, 여엉주-!!”
세실의 집요한 설득에도 마하임은 고개를 저었다.
마하임 역시 돈은 필요했다. 지금 윈드시크릿의 상황은 응급조치를 겨우 해 놓은 상황. 본격적인 영지 재건에는 막대한 돈이 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시점에서 시오니아 제국의 배를 털 수는 없었다.
시오니아 제국은 문자 그대로 대륙 최강이었고 해군력 역시 막강해서 그 어떤 해적도 시오니아의 배는 건들지 않았다.
그런데 ‘해군’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지금의 윈드시크릿이 해적질이라니 그것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할 수 있다니까? 왜 사람 말을 못 믿는 거야?”
세실은 답답한 듯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말했다. 그러자 마하임은 한숨을 푹 내쉬며 차갑게 말했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혼자 하지 그래?”
“그건 무리. 나도 바보는 아니란 말이야. 같이하자, 응?!”
급기야는 마하임에 목을 감싸 안고 온갖 애교를 다 부리는 세실. 그러나 한 가지 잊고 있는 것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