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이 도둑고양이 년!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암내를 풍기려 드느냐!”
마하임의 그림자에서 잠복하고 있던 아나모네가 더는 참지 못하고 튀어나왔다. 그리곤 자신의 검을 뽑아 드는 아나모네.
“흥, 그러는 넌 영주의 그림자에 딱 달라붙어서 밤낮 스토커짓하잖아? 너는 되는데 왜 난 안 돼?”
“닥쳐라. 어서 떨어지지 못할까!”
티격태격 싸우는 두 엘프를 바라보며 마하임은 없던 두통까지 생기려 했다.
둘을 이대로 놔두면 또 칼부림이 날 것이 분명했다. 바로 그때, 마하임의 집무실 문이 열리며 하륜과 요한이 들어왔다.
“그쯤 해 두시죠, 두 분. 하륜 인사드립니다.”
“충. 영주님 안녕하십니까?”
“허허, 영주님의 영빈관은 언제나 왁자지껄해서 좋군요.”
때마침 들어온 하륜과 요한, 그리고 제난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세실과 아나모네는 식식거리며 마지못해 뒤로 물러섰다.
“도둑고양이 한 번만 더 영주님께 치근대면 목을 베어 버릴 테다!”
“메롱, 할 수 있으면 해 보시지?”
둘의 싸움이 점점 유치해져 가자, 마하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모두의 시선이 세실과 아나모네에게 쏠리자 둘도 당황한 모양인지 얼굴을 붉히며 물러섰다. 마하임은 크게 한숨을 내쉰 뒤 하륜을 바라보고 말했다.
“하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서?”
마하임의 말에 하륜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여느 때처럼 가면을 쓴 그는 헛기침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하륜은 자신의 망토 안에서 주먹보다 약간 큰 네모난 상자를 꺼냈다. 그리고는 그것을 허공으로 살짝 던졌다.
위잉-
귀에 거슬리는 기묘한 소리와 함께 상자는 중력의 속박에서 벗어나 허공에 두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눈부신 빛이 상자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 빛들은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무언가의 그림을 만들어 갔다.
“보시다시피, 이건 대륙 지도입니다. 1:6,000,000 스케일인데, 굳이 스케일이 무엇인지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이미 잊혀진 지식이니까요.”
그것은 시중에 굴러다니는 조잡한 지도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대륙 중앙을 가로지르는 4개의 산맥과 7개의 강. 그리고 그 중앙에 광대한 영토의 국가 시오니아 제국이 붉게 표시되었다.
“오? 홀로그래픽 아냐? 이렇게 조그마한 건 처음 봐!”
세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을 반짝이며 허공에 펼쳐진 고해상도 입체 영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꽤나 레어한 아이템이죠. 구한다고 나름 고생했지 말입니다.”
하륜은 이렇게 말하며 홀로그래픽을 바라보았다. 홀로그래픽에 표시된 제국의 붉은 표식은 사방으로 뻗어 나가 대륙 대부분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두 달 전, 에나르 왕국이 제국에 의해 병합당했습니다. 바야흐로 제국의 대륙 통일을 위한 첫걸음이 시작된 것이지요.”
그것은 마하임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앞으로 3년 안에 제국은 대륙 북부 대다수의 국가들을 무력으로 병합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뭐, 제국의 땅따먹기가 이런 남부 촌구석 영지와 무슨 관련이 있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제부터는 반드시 신경 써야 할 겁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제국이 윈드시크릿에 쳐들어오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잠자코 지켜만 보던 요한이 말했다. 그 역시 제국의 동향이 심상치 않음을 소문으로 익히 들어왔다.
하지만 제국과 윈드시크릿의 거리는 극과 극. 상식선에서 생각해 보아도 아무런 접점도 찾을 수 없었다.
“시간문제겠죠. 어차피 황제는 대륙 통일이 목표. 게다가 이 영지는 쓸데없는 짐까지 지고 있습니다.”
“그 쓸데없는 짐이란?”
“말할 것도 없이, 제페쉬 백작의 백작 사건 때문입니다. 밀반입된 자국의 비밀 병기를 수거하기 위해 ‘사냥개’까지 보냈는데 모를 리 있겠습니까?”
‘…….’
마하임은 저도 모르게 손을 머리에 가져다 댔다.
제페쉬 백작의 저택에서 일어난 일은 마하임이 알던 미래와 전혀 다른 전개였다. 그리고 그 결과 역시도 겨우 최악을 면한 수준이었다. 하륜은 계속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하수인 중 한 명은 제 손으로 직접 죽였죠. 결과적으로 저 역시 같은 배를 탔다고나 할까요?”
하륜은 자신의 목에 검지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좌에서 우로 지긋이 긋는다. 이를 지켜보던 세실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이런 씹어 먹을! 그걸 알고도 죽인 거야!?”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제가 안 죽였으면 영주님이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목을 댕강 날려 버리면 어떡하냐고!”
화가 난 세실은 하륜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 댔다. 당황한 요한이 뒤늦게 그녀를 하륜에게서 떼어 내고 나서야 상황은 일단락됐다.
“어차피 세실 님도 언젠가 제국과는 결판을 내려 했지 않나요?”
“시끄러!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그래 봤자 현실은 변하지 않죠. 어쨌거나 좋든, 싫든 우린 제국과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륜의 말에 장내의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었다.
제국과의 전쟁. 그것은 비현실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될 일이다. 애초에 제국과 윈드시크릿은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물론 미래를 이미 알고 있는 영주님 앞에서 이런 말을 한다는 건 좀 우습지만 말입니다.”
하륜은 마하임을 바라보며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마하임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 미래는 이미 많이 틀어져 버렸고 사실 이젠 비밀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사실 전 영주님이 보셨다는 그 미래를 전혀 신용할 수 없군요. 회귀? 전생? 천기를 엿보다? 하하하.”
하륜이 고개를 젖히고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러나 마하임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그런 하륜을 노려볼 뿐이다.
“설령 진짜 영주님이 그 미래를 보았다 하더라도 그쯤은 저도 충분히 예측 가능한 정보에 불과합니다. 못 믿겠다는 눈치신데 그럼 지금 제가 직접 증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륜은 몸을 휙 돌리더니 허공에 떠 있는 상자에 손을 댔다. 그러자 ‘지도’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먼저 제국은 북쪽 중소 국가들부터 집어삼킬 겁니다. 황제의 목표가 대륙의 제패인 만큼 약소국부터 손봐 주는 것은 당연한 수순. 기한은 빠르면 2년, 늦어도 3년 안에 마무리 지을 겁니다.”
붉게 물드는 대륙의 북부. 그것은 마하임이 기억하는 미래와 다를 바 없는 양상이었다.
그의 말대로 제국은 3년 만에 대륙 북부를 제패한다. 당시 잔혹한 제국의 점령 전쟁 때문에 남쪽의 윈드시크릿까지 피난민이 몰려든 것을 마하임은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하륜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럼 이제 남은 건 대륙 동부의 대국 롤카, 스바냐, 하스반으로 이어지는 대륙 연합과 서쪽의 아인종들. 그리고 남부의 아르케비니아 왕국 정도가 되겠군요.”
붉게 변한 대륙의 북부를 제외하고 지도에 표시되는 것은 서부의 푸른색과 동부로 이어지는 노랑색, 그리고 검정으로 표시된 아르케비니아 왕국.
“동부의 대륙 연합은 아무리 제국이라도 함부로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 제국은 이들과는 동맹을 맺겠죠. 그 초석으로 대륙 연합의 주요 귀족들을 수도 없이 포섭해 두었을 겁니다. 제가 죽인 에스탄테 자작도 그중 하나일 겁니다. 요약하자면 대충 이런 그림이 그려집니다.”
대륙의 북부와 동부가 붉게 변했다. 이제 남은 것은 아인종들의 거주지, 서부와 그리고 아르케비니아와 같은 약소국이 몰려 있는 남부만이 지도에 표시됐다.
“그리고 제국은 본격적인 전쟁을 시작하겠죠. 그 첫 목표로 지목되는 것은 바로 아인종들 일겁니다. 아인종들은 단합은 안 되어 있지만, 그 힘은 대륙연합에 필적하지요. 꽤나 큰 전쟁이 될 거라 생각됩니다만, 각 종족 간의 뿌리 깊은 갈등 때문에 결국에는 무너지겠죠. 게다가 대륙 연합과 힘을 합친 제국이라면 어렵지 않게 제압 가능할 겁니다. 길게는 5년, 짧게는 3년이면 이 전쟁도 끝날 것으로 예상됩니다.”
지도는 하륜의 말에 따라 점점 붉게 바뀌어 갔다. 마하임을 비롯한 모두는 눈앞에서 전개되는 대륙의 미래에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영주님의 영지가 있는 남부를 손쉽게 점령함으로써 제국은 대륙 통일을 달성할 겁니다. 어떻습니까? 영주님. 제 예측이? 틀린 점이 있습니까?”
거대한 대륙은 붉게 물들었다. 마하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지도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그것은 마하임이 아는 미래의 흐름과 정확히 일치했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미래의 기억들이 다시금 스멀거렸다. 피를 피로 씻는 전쟁. 바로 그 전쟁이 다시금 재현되려 하고 있었다.
“역시, 그렇군요. 그럼 영주님께선 선택을 하셔야 합니다. 제국과 같은 편에 서거나, 혹은 제국과 싸우거나.”
하륜은 두둥실 떠 있는 상자를 손으로 거머쥐었다. 그러자 빛으로 만들어진 지도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남은 것은 희미한 빛의 잔상뿐. 상자를 품속으로 집어넣은 하륜은 마하임을 바라보았다.
“같은 편에 선다는 건 어디까지나 동등한 입장일 경우에나 가능한 것이지. 결국, 싸울 수밖에 없다. 그때가 언제건 간에 말이야.”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상대는 고사하고 비교 대상으로서도 매우 부적합하죠. 굳이 비교하자면 계란으로 바위 치기랄까요?”
“그런데 왜 내게로 왔지?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싸움이잖는가?”
마하임은 하륜에게 쏘아붙였다. 마하임이 지금 가진 카드는 미래의 지식 하나뿐.
그것조차 이제는 그다지 믿을 게 못 된다는 것이 이번 제페쉬 백작이 사건으로 증명됐다.
지금의 마하임은 마치 부도 직전의 수표나 마찬가지였다. 하륜은 마하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그리고 자신의 팔을 뻗어 마하임을 향했다.
“계란도 계란 나름이고 바위도 바위 나름이지 않겠습니까? 제가 마하임 님을 아주 특별한 계란으로 만들어 드리죠. 바위조차 부숴 버릴 그런 계란으로 말입니다.”
하륜의 손에는 어느 사이엔가 회백색의 계란이 들려 있었다. 마하임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 계란을 받아들었다.
“!?”
그러나 그것은 보통 계란이 아니었다. 겉보기에는 여느 계란과 다를 바 없었지만, 이 계란은 마하임 자신의 검만큼이나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그래서 말입니다. 해봅시다.”
“뭘 말이냐?”
마하임의 물음에 하륜은 세실을 힐끔 처다본 뒤 말했다.
“해적질이요.”
“뭐라고?!”
“세실 님이 할 수 있다고 했다면 뭔가 히든카드가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나요? 세실 님?”
“으, 응. 당연하지. 난 바보가 아니라고.”
세실은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화제가 옮겨 오자 당황하며 말했다. 하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하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왕이면 서두르는 게 좋겠죠?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좋다. 그럼 그 히든카드라는 것부터 보도록 하지. 결정은 그다음에 하겠다.”
정해진 길로 가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자신이 겪었던 미래의 기억이 증명했다.
그렇다면 이번만큼은 새로운 길에 걸고 싶었다. 그 길의 옳고 그름은 시간이 증명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