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끼룩끼룩!
갈매기 소리와 짠 내가 물씬 풍겨오는 이곳은 윈드시크릿의 유일한 항구인 세인트였다.
큰 배라고는 지난번 제페쉬의 암시장 때 죽은 에스탄테가 남기고 간 범선 한 척뿐. 나머지는 고만고만한 어선뿐이었다.
과거 드워프나 엘프와 같은 유사 인간과의 상거래가 활발할 때는 수십 척의 배가 동시에 정박할 수 있는 대륙 최고의 항구로 불릴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세월의 풍파 속에서 무너지고 잊혀진 조그마한 항구에 불과했다.
“오랜만이죠? 이곳에 오기는.”
“바빴으니까.”
하륜의 물음에 마하임은 짧게 대답했다. 사실 지금도 쌓여 있는 업무는 태산 같았다.
아그라와의 전쟁에서 이겼다고는 하지만, 영지민들은 여전히 가난했고 예산은 빠듯했다.
불행 중 다행히 제페쉬가 동료로 합류했기에 망정이지 그것이 아니었다면 영지는 정말 파산할 뻔했다.
“그 히든카드란 건 어디 있지?”
마하임은 총총걸음으로 앞서 걷고 있는 세실에게 말했다. 그러자 세실은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다 와 가니까 보채지 좀 말라고. 깜짝 놀라게 해 줄 테니까.”
세실은 콧노래를 부르며 항구 구석에 위치한 커다란 창고 앞에 멈춰 섰다.
“여기야. 나의 히든카드가 있는 곳.”
창고는 한눈에 봐도 근처에 있는 다른 건물과는 달라 보였다. 일단 창고라고 불리기에는 너무나 컸고, 또한 밖에서는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게 설계되어 있었다.
게다가 창고의 반대편은 곧바로 바다로 연결되어 있어 배가 오가기에 적합했다.
“얘들아, 나 왔다. 문 열어.”
세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창고 문이 열리며 리자드맨 한 마리가 나와 그녀를 맞이했다.
“크르르릉, 어서 와라 족장. 정비 거의 끝냈다.”
“좋아, 좋아. 가 보자고 영주.”
세실은 곧장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마하임과 하륜은 묵묵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호오, 이곳은 도크군요.”
창고 안을 본 하륜이 말했다. 창고 안의 풍경은 여느 창고와는 확실히 달랐다.
창고 중앙에는 폭이 10미터가 넘는 수로가 바다까지 이어져 있었고 그 수로 중앙에는 검고 거대한 금속질의 무언가가 있었다.
“자, 소개할게. 나의 배 ‘노틸러스’야.”
세실은 수로 중앙의 검고 커다란 쇳덩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말을 들은 하륜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설마 저건…. 잠수함입니까?”
“역시 하륜은 아는구나. 얼마 전 드워프에게 수리 맡겼던 것을 인수했지.”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세실. 마하임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수로 중앙에 솟아 있는 검은 쇳덩이를 만지며 말했다.
“이 쇳덩이가 잠수함이란 말인가?”
분명 들은 적이 있었다. 그가 아는 미래의 기억에 남아 있는 미래의 전설 같은 이야기, 해적왕 세실의 신출귀몰한 배 노틸러스.
그에 관한 이야기는 음유시인의 노래로 남을 만큼 유명했다.
그런데 벌써 세실이 이 배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의외의 사실이었다. 시기상으로 본다면 앞으로 3년 뒤에서나 역사에 등장하는 것이 옳았으니 말이다.
“어라? 영주도 알고 있었던 거야?”
“실물은 나도 처음 본다. 아마도 이것 역시 ‘유적’이겠지?”
대지가 파멸의 하늘로 사라지기 이전에 존재했던 고대문명의 유산. 마하임의 몸속에 있는 나노머신도 그 문명의 잔재였다.
그들이 왜 사라졌는지는 베일에 싸여 있지만, 그 찬란한 문명의 흔적들만은 아직도 이 땅에 남아 있었다.
물론 세실의 노틸러스처럼 사용이 가능한 것은 그야말로 극소수였지만 말이다.
“이 녀석을 건져 올리는 데만 해도 5년이 넘게 걸렸다고. 좀 놀라는 척이라도 해 주면 어디가 덧나?”
세실은 실망한 듯 투덜거렸다. 5년 전 윈스시크릿 앞바다에서 이 잠수함을 발견했을 때만 해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 녀석을 바닷속에서 건져 올리고 수리하는 데 무려 5년이나 걸릴지는 상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이래 봬도 꽤 놀라고 있다. 그 점을 알아줬으면 좋겠군.”
“됐네요, 돌덩이 씨!”
세실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마치 세상을 달관한 것 같은 마하임의 무표정한 얼굴이 오늘따라 더 눈에 거슬리는 그녀였다.
“언제쯤 출항할 수 있지?”
“음, 수리는 일단 끝났어. 시운전을 좀 더 해 봐야겠지만 3일 이내면 가능할 거야.”
“좋다. 하륜.”
“네, 영주님.”
“세실과 함께 작전 세부 내역을 짜서 보고하도록.”
“알겠습니다.”
공손히 허리를 굽히는 하륜. 예상치 못한 잠수함의 등장에 하륜은 당장이라도 큰 소리로 웃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범선 시대에 잠수함이라니, 정말 흥미롭군요.’
이 잠수함이 어느 정도의 성능을 지닌지는 아직 잘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바다의 패권은 단숨에 뒤집힐 것이다.
“좋습니다. 한번 거하게 털어 보도록 하죠.”
가면 속 하륜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렇게 미래는 천천히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 * *
밤이 왔다. 지독한 밤….
전쟁과 추악한 욕망이 사방에서 진동했다.
죽이고 파괴하고 약탈하는 악몽의 밤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 갔다.
그리고 죽음은 그 누구도 피하지 못했다.
발버둥 치고 또 발버둥 쳐 보았지만, 결국 그 끝에는 절망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모든 것은 끝나 버렸다.
“크허억!”
숨이 멈출 듯한 비명과 함께 마하임은 눈을 떴다. 흐릿한 의식, 마하임은 거칠게 숨을 쉬며 상체를 일으켰다.
“괜찮나 주인?”
마하임의 곁에서 자던 아나모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럴 바라보았다.
새하얀 머리칼, 그리고 짙은 갈색의 피부. 그녀는 여느 때보다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아직 밤…인가 보군.”
달도 없는 어두운 밤이었다. 방안을 비추는 흐릿한 발광석이 아니었다면 아나모네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내일 해가 뜨면 제국 해군과 일전을 벌여야 했다. 나름 준비를 하긴 했지만, 이런 미래는 겪어 본 적 없는 것이었다.
실패하거나 심지어는 죽을 수도 있었다. 아마도 그 중압감 때문에 잠에서 깬 것 같았다.
“먼저 자, 아나모네. 난 잠이 완전히 깨 버린 것 같다.”
“그래도 자야 한다. 주인.”
마하임을 빤히 바라보며 아나모네는 말했다. 세실이 풋풋한 소녀의 귀여움을 지니고 있다면, 아나모네는 성숙한 여성의 정숙함이 깃들어져 있다.
하지만 마하임은 아나모네를 성적 대상으로는 보지 않았다. 지금 이렇게 같은 침대에 누워 있는 것도 전적으로 아나모네가 원해서였다.
왜일까 하고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마도 틀림없을 것이다. 미래에 자신의 아내 ‘시아라’에 대한 그리움. 그 그리움 때문이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시문을 스승님이라고 불렀지? 그와는 어떤 사이야?”
마하임은 문뜩 떠오른 시아라의 아버지이자 시현류의 당주 시문에 대해 아나모네에게 물었다.
당시 전투 중이라 정확히는 듣지 못했지만, 분명 아나모네는 시문을 스승님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건…. 꽤 긴 이야기가 될 거다, 주인.”
“상관없어. 어차피 밤은 기니까.”
마하임의 말을 들은 아나모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그날 밤의 기억을 떠올렸다.
* * *
“마법사들은 결계를! 1, 2분대는 전투 가능한 자는 모두 죽여라!
대륙 남서부의 조그마한 숲속에 있는 다크엘프들의 마을 인근.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극의 시작은 이 땅을 비추는 2개의 달, 에다와 시다가 하나가 될 무렵이었다.
이날이 되면 다크엘프든 하이엘프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모두 약해졌다.
그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이날이 엘프를 사냥하기에 적기라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빨리빨리 움직이란 말이다. 이 장사 하루 이틀 하냐!”
다시금 울려 퍼진 남자의 목소리. 그의 목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이 대지를 비추는 2개의 달, 에다와 시다가 하나가 되면서 내뿜어 낸 아름다운 오로라를 배경으로 다크엘프들이 살고 있던 마을 하나가 일순간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예나 지금이나 암시장에서 형성되는 엘프 노예의 수요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대단했다.
인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뛰어난 외모에 길만 잘 들이면 정령 소환을 통한 부가적인 수입까지 짭짤하게 올릴 수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수가 작고 힘마저 약한 엘프들은 인간족 노예 사냥꾼의 주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엘프나 하이엘프 같은 종족들은 대부분 원시림 깊은 곳이나 인간의 접근이 불가능할 정도의 험한 곳에서 주로 살았기 때문에 사실상 사로잡기는 불가능했다.
반면 엘프와 하이엘프에 비해 수명이 짧고 외모도 약간 떨어지긴 해도 다크엘프들은, 일반 엘프들에 비해 모여 사는 곳을 찾기 쉽고 비교적 수도 많았기 때문에 노예 사냥꾼들의 제1의 목표물이 되었다.
“어린 것 외엔 모조리 죽여라! 뒤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기 싫으면 다 죽이란 말이닷!
이 살육의 피바다 가운데 노예 상인의 우두머리, 로한은 자신의 롱소드를 휘두르며 연신 소리 질렀다.
다크엘프들은 하이엘프에 필적할 만큼의 프라이드와 전투력으로 인해 최후의 마지막 순간이라도 항복하지 않는다.
만에 하나 잡힌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살해 버리기 일쑤다.
그래서 처음부터 성인 다크엘프들은 죽여 버리는 것이 보통이었고, 이들 노예 사냥꾼들 역시 이 ‘보통’을 철저히 따르고 있었다.
“마법사들은 뭐 하나? 엉!? 네놈들 책 살 돈 보태 줄려고 고용한 게 아니란 말이다. 죽여라. 마나란 전투에 사용되어야 가장 가치 있는 것이다!”
마법사들은 우두머리의 말에 순간 발끈했다. 마법사는 예나 지금이나 고급 인력이었고 수요는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마법사가 더 높은 단계의 ‘서클’을 얻기 위해서는 막대한 연구비가 들었고, 그 연구비를 충당하기 위한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 이 노예 사냥이었던 것이다.
“만능의 마나 그 목적 없는 힘이여! 8개의 권능으로 여기에 임하라! 매직 미사일!”
“만능의 마나 그 목적 없는 힘이여 영원의 불길로 여기에 임하라! 파이어 볼!”
2명의 마법사는 즉시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재구성한 마나는 푸른색으로 빛나는 8발의 ‘매직 미사일’과 거대한 ‘파이어 볼’로 변해 다크엘프 전사들을 향해 날아갔다.
쿠아앙!
마법의 위력은 절대적이었다. 이 한 번의 공격으로 소환해 놓았던 대부분의 정령들이 사라졌다.
그러나 다크엘프들은 그들의 유일한 원거리 무기인 활로 결사 항전했지만 사방에서 쏟아지는 마법 공격을 버텨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 명도 살려 보내선 안 된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기 싫다면 모조리 죽여라!”
칼을 뽑아 든 로한은 목청껏 소리쳤다.
다크엘프는 그야말로 복수의 화신. 여기서 한 마리라도 살아 나간다면, 복수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격해 올 것이다. 이를 막으려면 지금 모조리 다 죽여 버려야만 했다.
마법이 만들어 낸 불길이 순식간에 다크엘프 마을을 불태웠다. 다크엘프들의 저항은 결사적이었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다크엘프들이 정령도 없이 압도적인 병력과 마법으로 무장한 노예 사냥꾼들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결국 이 마을은 노예 사냥꾼들이 습격을 개시한 지 채 1시간도 지나지 않아 단 한 채의 집도 남김없이 불타올랐다.
“젠장, 그 많은 다크엘프들 중에서 겨우 한 마리라니. 대체 뭣들 한 거야! 이 멍청한 녀석들!
로한은 허탈함과 분노로 인상이 절로 찡그려졌다. 마을을 완전히 장악하긴 했지만, 이들의 우두머리로부터 용병이라고 생각되는 그의 부하들까지 단 한 명도 기뻐할 수 없었다.
이 다크엘프 마을에는 적어도 100명 이상의 다크엘프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전투가 끝나고 나서 생포한 다크엘프는 겨우 한 명밖에 없었다.
물론 처음에는 30명 이상 생포하긴 했다. 문제가 있다면 잡히기가 무섭게 다크엘프들은 자살을 해 버렸다는 것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로한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목청이 떠나라 고함을 지르며 마구 욕을 해 대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새끼들아! 이 짓 한두 번 하는 거냐? 마을 하나를 털었는데 겨우 한 마리, 한 마리가 뭐냐! 정신을 어디다 판 거얏!!! 내가 이런 녀석들을 데리고 장사를 한다니 내가 미쳤지. 오늘 일당 없다. 철수!!!????
노예 사냥꾼들은 마치 패잔병처럼 힘없이 대열을 정비했다. 그리고 겨우 한 명밖에 잡지 못한 그 다크엘프를 쇠창살로 만들어진 마차에 넣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차 안에 넣어진 그 다크엘프는 아직 상당히 어린 모양인지 키가 노예 상인들 중 가장 작은 사람과 비교해도 절반 정도밖에 안 되어 보였다.
가뜩이나 작은 이 다크엘프를 자해하지 못하도록 온몸을 밧줄로 칭칭 묶어 놓은 터라 마치 애벌레가 성충으로 변하기 위해 만든 고치같이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다크엘프는 포기하지 않고 탈출하기 위해 끊임없이 몸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반드시 복수할 거야! 용서 못 해!’
다크엘프는 피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었다. 그러나 다크엘프의 울부짖음은 입을 막고 있는 밧줄 때문에 알 수 없는 신음으로 변해 공허하게 울릴 뿐이었다.
다크엘프는 지금도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의 부모와 친척, 그리고 친구들. 그 마지막의 한 명도 남김없이 자신이 보는 앞에서 학살당했다.
혼자 살아남았다는 치욕감과 분노로 다크엘프는 경련이라도 하듯 온몸을 떨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눈앞에 펼쳐진 이 지옥을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