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콰콰쾅-!
그리고 또 한 번의 대폭발. 아마도 배 안의 화약고에 불이 붙은 듯했다.
천천히 좌현으로 기우는 4번함. 침몰하는 배의 갑판은 첫 폭발에 휘말려 사망한 병사들의 시신으로 가득했고, 겨우 살아남은 자들도 치명상을 입은 듯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함장님. 3번함이!”
“또 뭐냐!”
콰콰아앙!
켈베로스가 미처 시선을 옮기기도 전에 3번함에서 찢어지는 폭음이 연달아 울렸다.
적의 무기가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 위력은 정말 상상을 초월했다. 3번함의 좌현 중앙 부위는 마치 거대한 맹수에게 물어뜯긴 듯, 단 일격으로 완파 직전에 놓여 있었다.
“3번함, 대파!”
천천히 좌측으로 기우는 3번함.
이미 손쓸 수 있는 단계는 넘어 버렸다. 전장에서 일생을 바친 켈베로스였지만, 이런 참상은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었다.
“빌어먹을! 5번함 선회! 1번함에게 정선(停船) 명령을 하달하라!”
적의 화력은 실로 엄청났다. 이대로 퇴각만을 고집한다면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모두 당할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수송선이 중요해도 호위함을 모두 잃고 나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모두 눈을 부릅뜨고 주위를 살펴라! 적은 분명 이 바다에 있다. 나 켈베로스를 믿어라!”
어차피 당할 바에는 단 한 번이라도 교전의 기회를 만들어야만 했다. 적의 정체는 여전히 알 길이 없었지만, 대략의 위치는 추측이 가능했다.
지금까지 당한 아군의 전함은 모두 선단의 후미 쪽이었으니까.
“5번함은 포문을 1번함으로 고정! 기함은 수송선을 호위한다!”
신호병은 연이은 켈베로스의 명령을 아군에 전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 정도로 쫓기고 있다면 사기 저하로 인해 혼란에 빠질 만도 했지만, 누가 뭐래도 그들은 시오니아 정예 해병이었다.
더군다나 이 명령은 1번함을 적을 유인할 미끼로 주겠다는 이야기였지만, 그들은 일절의 항명 없이 함대의 전열을 재정비했다.
“기회는 한 번! 움직이는 것이 있다면 무조건 발포하라!”
“옛! 장군님! 전 포문 개방!”
화포, 고대 유적의 자료를 바탕으로 만든 신병기. 아직 시오니아의 전함 중에서도 이것을 탑재한 배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 위력은 과거의 발석차 따위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하지만 켈베로스는 오히려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것은 그야말로 학살을 위한 무기가 아닌가?! 그러나 지금은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지금 막지 못하면 더 이상의 미래는 없었다.
쿠쿵!
조용한 바다 위에 갑작스러운 폭음이 울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군 함대가 당한 것이 아니라, 아군 화포의 포격 소리였다. 켈베로스는 재빨리 화포의 착탄 지점으로 눈을 돌렸다.
“적함 발견!”
켈베로스의 동공이 커졌다. 그것은 일반적인 배와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것이었다.
물 위로 아슬아슬하게 모습을 드러낸 그 물체는 고래를 연상시킬 정도로 커다랗고 빨랐다.
하지만 저것은 분명 고래 따위가 아니었다. 특히 물 위로 삐죽이 솟아오른 탑 모양의 날개는 누가 보아도 인공적이었다.
“전 함대, 저 검은 물체를 향해 일점사하라!”
“목표 6시 방향, 전포 일제 발사!”
퍼벙, 퍼퍼펑!
포탄의 비가 물밑으로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를 향해 쏟아졌다.
미끼로 사용한 1번함을 제외하고 현재 남은 전함은 기함까지 포함해서 2척, 배당 탑재된 화포는 총 7기.
모두 합친다면 14기가 넘는 화포가 일제히 불을 뿜어내자, 천지가 뒤집히는 것 같은 충격이 이 일대를 휩쓸었다.
쾅! 콰콰쾅!
매캐한 연기가 주변 해역을 뒤덮었다. 그러나 포격은 그치지 않고 계속 울려 퍼졌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시큼한 화약 냄새 너머로 켈베로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포격 중지! 포격 중지! 적함을 확인해라!”
켈베로스의 명령에 폭우처럼 쏟아지던 포격이 겨우 정지했다. 하지만 그 여파로 시야가 확보되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흘러야 했다.
얼마 후 바다는 다시금 잔잔해졌다. 켈베로스는 눈을 부릅뜨고 그것이 처음 발견된 곳을 노려보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것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군의 집중 포화를 맞고 서서히 침몰하고 있는 1번함뿐이었다.
“적을 확인해라! 빨리!!!”
켈베로스는 너무나 화가 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제국의 화포는 아직 정밀 조준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물건은 아니었다.
1번함을 직접 겨냥한 것은 아니었지만, 1번함의 피해는 불가피했다. 결과적으로 1번함을 희생시켰지만, 적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쿠쿵!
우지직, 끼이이-!
순간 무언가 묵직한 것이 충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은 다름 아닌 5번함이었다.
켈베로스는 재빨리 소리가 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맙소사! 저건 또 뭐지?!”
켈베로스는 눈을 부릅떴다. 5번함의 우현 선체 아래로 검고 거대한 무언가가 파고들고 있었던 것이다.
5번함은 회피를 위해 선수를 틀었지만, 그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쾅, 콰지직!
너무나 선명한 충격음. 5번함의 우현을 파고든 그것은 단숨에 배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용골까지 뚫고 들어왔다.
나무와 금속이 부딪치면서 들려오는 기괴한 소리, 그것은 마치 배가 토해 내는 비명처럼 느껴졌다.
“크윽! 전 함대 적을 요격하라!”
“함장님, 아직 5번함은 침몰하지 않았습니다!”
“시끄럽다! 기회는 지금뿐! 전포 발사하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신출귀몰한 적함을 잡기 위해서는 모습을 드러낸 지금이 유일한 기회였다.
켈베로스는 입에 피가 고일 만큼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렇게 완벽하게 당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만에 하나 적을 사로잡는다면 기필코 찢어 죽이리라!
“뭣들 하는 거냐! 공격하란 말이다!”
“전함, 목표는 5번함! 전포 발사!”
머뭇거리던 부관은 결국 명령을 하달했다. 아무리 적의 섬멸이 우선이라고는 하지만, 생사를 함께했던 동료의 배를 쏴야 한다니….
당연히 내키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함장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더군다나 그 함장이 켈베로스라면 더욱 그러했다.
쿠쿵! 쿠쿠쿵!
다시 한번 포탄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적의 공격에 기동성을 완전히 상실한 5번함이 그것을 피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철저히 파괴되는 5번함. 그러나 수면 아래의 검은 그림자는 멈추지 않았다. 포탄 세례에도 아랑곳없이 그것은 5번함의 허리를 그대로 관통해 버렸다. 그야말로 5번함을 완전히 두 동강을 내 버린 것이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하지만 그것은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었다. 그리고 더욱더 큰 문제는 아직도 저 검은 물체의 움직임이 진행형이라는 점이었다.
5번함을 관통한 그 검은 물체는 이제 그 앞에 있는 4번함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돌진하고 있었다.
“선수를 돌려라! 뭣들 하나? 피하란 말이다!”
켈베로스는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하지만 그것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이미 후미를 가격당했던 4번함은 군함으로서의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우지직, 쿠쿵!
4번함의 선미와 충돌한 그것은 기분 나쁜 소리를 흘리며 함선 전체를 뒤흔들었다.
기기기긱!
불쾌한 굉음이 사방으로 울려 퍼져졌다.
4번함은 5번함처럼 단번에 두 동강이 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빈사 상태였던 4번함은 그 일격에 순간적으로 우현으로 선체가 급격히 쏠리더니, 그대로 바다 밑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어! 대체 뭐냐, 저것은!”
순식간에 2대의 전함이 침몰했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이 타고 있는 기함과 수송선뿐. 그러나 아직까지 적의 정체조차 알 수 없었다.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적의 의도는 말할 것도 없이 수송선을 노리고 있을 터. 적을 쓰러트리지 못한다면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뿐이었다.
“이렇게 된다면 방법은 하나! 전군! 최대 속도로 이 해역을 이탈한다!”
어찌 생각하면 지극히 간단한 방법이었다.
처음에는 화포를 능가하는 화력으로 공격해 왔지만, 지금은 그 방법으로 공격할 수 없는 듯했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자신을 노출해 가면서 저런 식의 돌격을 감행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때야 켈베로스는 깨달았다. 저 검은 무엇인가가 노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 모든 것이 우리를 멈춰 세우기 위한 수작이란 말인가!”
생각해 보면 너무나 뻔히 보이는 상황이다. 순풍을 받은 함선의 속도는 상당히 빠르다.
아마도 적은 이곳에 매복해 있다가 습격, 시오니아의 전함이 멈추도록 유도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의 함대는 보기 좋게 이 계략에 넘어갔고 말이다. 켈베로스는 허탈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 함대, 돛을 올려라! 전속으로 이 해역을 이탈한다!”
그렇다. 아직 그에게는 아직 수송선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지금이라도 전속으로 이 해역을 벗어난다면 기회는 분명히 있었다.
적이 우리보다 빠르지 않다고 가정할 때 충분히 가능한 일, 켈베로스는 여기에 모든 것을 걸었다.
“바람을 타라! 멈추지 마라! 뒤떨어지는 순간 당한다!”
배는 순풍을 타고 점점 속도를 높여 갔다.
그 검은 무언가는 4번함을 완전히 좌초시키고는 크게 선회한 뒤 곧장 켈베로스의 기함을 따라오기 시작했다.
역시 적의 남은 공격 방식은 오로지 돌진밖에 없는 듯했다. 게다가 그 움직임도 생각보다 느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뒤로 처지기 시작했다.
“제길, 젠장…!!”
켈베로스는 굴욕감에 치를 떨었다. 본국에 돌아가면 징계를 받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바람이었다. 이 무렵 계절풍은 범선에게는 최고의 동력원이었다.
순풍을 탄 켈베로스의 기함과 수송함은 점점 속도가 붙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더 이상 그 악몽과 같은 검은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겨우 떨쳐 버렸는가?”
그러나 그것은 켈베로스의 착각이었다.
“함장님! 수송함이 이상합니다!!”
“뭣이!”
부관의 다급한 목소리에 켈베로스는 맞은편에 위치한 소송함으로 눈을 돌렸다. 겉보기에 특별한 전조 같은 것은 없었다.
그렇지만 수송함은 곧장 켈베로스가 타고 있는 기함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즉시 정지 신호를 보내라!”
“옛, 함장님! 관측병, 정지 신호를 보내라!!”
관측병은 필사적으로 정선을 명하는 깃발을 흔들었다. 그러나 수송함은 멈추지 않고, 오히려 속력을 높였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게도 수송함의 갑판이 그야말로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이 분명했다.
“수송함 급속 접근! 피할 수 없습니다! 충돌합니다!”
관측병의 비명과 같은 목소리가 갑판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기함과 수송함은 묵직한 굉음을 내며 요란스럽게 부딪쳤다.
미친 듯 좌우로 흔들리는 기함. 수송함은 켈베로스가 타고 있는 기함보다 2배는 컸다.
“당황하지 마라! 전원, 적의 공격에 대비하라!”
켈베로스는 미친 듯 외쳤다. 그러나 병사들의 사기는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였다.
이 혼란의 와중에 제대로 이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켈베로스 하나뿐이라 말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거기다 뒤이어 등장한 ‘그것’의 모습에 병사들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