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삑, 대뇌 클락 업 개시. 전술 프로그램 기동. 생존을 위한 최적화 작업을 개시합니다.]
온몸을 짓누르던 고통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당장이라도 멈출 것 같은 호흡은 이내 정상을 되찾고, 입에서 쉼 없이 흘러내리던 내출혈도 멈추었다.
“큭! 무슨…. 우우욱!”
입에서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호흡 곤란이 없어졌다.
폐에 깊은 상처를 남긴 갈비뼈도 마치 스스로 의지가 있는 것처럼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 복원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완벽한 치료, 아니 재생에 더 가까웠다. 신체 기능이 정상을 되찾아 가자 마하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짙은 혈향으로 가득 찬 대기의 흐름 그리고 켈베로스의 거친 숨소리. 이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거대한 정보의 흐름이 오감을 통해 미친 듯 흘러들어 왔다.
[중추 신경 처리 속도 개선, 대뇌 연산 능력 가속. 하이퍼 모드 정상 기동 완료.]
단순히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켈베로스의 예상 공격 루트가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쏟아져 들어오는 수많은 정보의 분석과 재구성이 빛의 흐름만큼이나 빠르고 정확하게 정리되어 눈앞에 펼쳐졌다.
하지만 이 갑작스러운 변화에 놀라고 있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마하임은 다시금 검을 손에 쥐었다.
“응? 너 아직 움직일 수 있는가?”
“놔라. 그 손. 네 상대는 나다.”
“좋다. 두 번 다시 일어서지 못하게 만들어 주지.”
켈베로스는 세실을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고 마하임을 향해 달려왔다.
켈베로스가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뗄 때마다 육중한 울림이 배 전체를 흔들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마하임은 두렵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은 마치 그와 전혀 관계없는 타인의 일인 듯 느껴졌다.
‘녀석이 저렇게 느렸던가?’
마하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에게 매서운 살기를 뿜어내며 달려오는 켈베로스의 움직임이 정지에 가까울 정도로 느리게 보였던 것이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과 비슷했다.
이건 처음 각성할 때와 비교할 바 아니었다. 마하임은 너무나 간단히 켈베로스의 돌진을 피했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뻗었다.
퍼벅-!
“크아아악!”
묵직한 충돌음과 더불어 찢어질 것 같은 비명. 켈베로스는 남아 있는 마스트를 모조리 부러트리며 선창에 처박혔다. 마하임은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쿨럭, 쿨럭. 무슨 짓을 한 거냐!”
엄청난 양의 피를 토해 내며 켈베로스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방금 전의 공격으로 어깨가 완전히 탈골되어 버렸는지 왼팔은 힘조차 못 주고 있었다.
하지만 켈베로스 역시 보통의 인간과는 동떨어진 몸이다. 탈골된 팔을 비틀어 단숨에 원상태로 만드는 그의 모습에 로이드는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괴물이야. 워울프는 확실히 다르군.”
“네놈!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냐!”
“글쎄. 네가 생각하는 것 그 이상으로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마하임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비록 앞으로 수년 뒤의 일이긴 했지만 켈베로스는 시오니아 최정예 수인 부대를 지휘하는 악몽과 같은 존재로 거듭난다.
시오니아 제국이 부활시킨 고대인의 힘으로 양산화한 수인 부대, 그들의 막강한 화력 앞에서 버틸 수 있는 국가는 없었다.
“와라, 시오니아의 사냥개여! 이번만큼은 네놈들에게 미래를 빼앗기지 않겠다!”
“미래? 웃기지 마라! 감히 일개 해적에게 패할 것 같으냐!”
켈베로스는 미친 듯이 마하임에게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는 마하임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의 공격은 매섭기 그지없었지만, 극한까지 활성화된 마하임의 육체는 그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리고 켈베로스가 잠시 멈칫거린 순간, 마하임은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슈캉-!
대기를 가르는 마하임의 검광. 그의 검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켈베로스의 심장을 관통했다. 머리가 부서져도 한동안 날뛰는 것이 워울프였다. 그를 죽이기 위해서는 심장을 파괴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마하임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켈베로스는 마치 허물어지는 오래된 탑처럼 천천히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큭큭, 정말 멋진 싸움이었다.”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켈베로스는 희미하게 웃었다.
마하임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겼다는 통쾌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뭔가 알 수 없는 공허함까지 느껴졌다.
“마지막에 왜 전력을 다하지 않았지? 충분히 더 버틸 수 있었을 텐데.”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왜 그랬을까. 쿨럭쿨럭”
다시금 피를 토해 내는 켈베로스. 그는 천천히 옛일을 떠올렸다.
언제부터인가 시오니아의 황제는 미쳐 버렸다. 자신을 이따위 괴물로 만든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황제는 주변 나라를 모조리 초토화하면서 광기의 점령전을 시작했다.
신하들의 충언은 망각된 지 오래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황제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그 광기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던 자신이 안타까울 뿐이다.
“네가 승리했다. 마하임.”
씁쓸히 말하는 켈베로스. 마하임은 그런 켈베로스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운이 좋았을 뿐. 이제 쉬어라, 켈베로스.”
“그 이름은 황제의 저주받은 하사품이다. 카시스 로한, 카시스라 불러 주게.”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는 인간 대 인간으로 겨루고 싶군. 카시스 장군.”
“후, 그때를 기대하지.”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마하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바다에서의 사투는 끝나 가고 있었다.
* * *
시노쿠 대륙의 엔더산맥 끝자락에는 시오니아 제국의 수도 시온이 있다.
잃어버린 고대인의 도시 위에 세워진 이 도시는 맑은 날보다 흐린 날이 많아 비의 성이라는 별칭이 붙은 곳이기도 했다.
그 시온의 지하 수백 미터 아래, 그곳에는 시오니아 제국이 비밀리에 발굴하고 있는 고대 유적이 있었다.
이곳은 철저한 보안하에 황제의 직속 경호병 ‘엠페러 포스’만이 접근할 수 있는 극비 구역이었다.
“충!”
경비 중인 엠페러 포스를 지나자 거대한 규모의 동굴이 나타났다.
시문은 언제나처럼 새하얀 도복을 입고 마치 유령처럼 동굴을 가로질렀다.
동굴 안은 아직도 발굴 중인 고대인의 유적들이 드문드문 지표에 드러나 있었고, 이를 비추는 조명들이 반딧불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왔나, 시문?”
잠자고 있는 유적 중 유일하게 환한 빛을 내뿜고 있는 둥근 원통형 유적 속에서 황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황제는 실오라기도 걸치지 않은 알몸. 그녀의 몸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푸른색의 액체가 바닥으로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불렀나? 황제.”
“그래. 생각지 못한 흥미로운 일이 생겨서 말이야.”
몸을 일으킨 황제는 바닥에 발을 디디고 섰다. 풍만한 가슴과 남성이라면 혹할 만큼의 육감적인 몸매를 지닌 그녀였지만, 시문은 마치 굳은 동상처럼 무감각하게 황제를 바라볼 뿐이었다.
“넌 아느냐? 지금 우리는 패배자란 사실을.”
“그게 무슨 말이지?”
시문은 황제에게 반문했다. 그러자 황제는 마치 시를 읊기라도 하듯 천천히 입을 땠다.
“옛날옛날…. 아주 먼 옛날. 레비아탄의 침략을 받은 인류는 이곳으로 ‘시노쿠’로 도망쳤다. 그러나 도망자는 도망자일 뿐.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알고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널 따르지도 않았겠지.”
“그래. 진실은 언제나 잔혹하고, 역사엔 가정이란 것은 있을 수 없지.”
황제는 시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시문은 어디선가 꺼내 온 새하얀 수건을 황제에게 건넸다. 황제는 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흥미로운 사람을 찾아냈어. 나의 귀여운 장난감을 망가트린 발칙한 놈이긴 하지만, 확인해 볼 게 있어서 말이야. 시문, 저번에 네가 말했던 아르케비니아의 왕자, 마하임. 세실 일리암스와 함께 활동하고 있다는군. 정보를 모아 보고하도록.”
“존명. 확인 후 보고 올리겠다.”
시문은 고개를 숙이고선 유적 사이로 사라져 갔다. 황제는 몸에 묻은 액체를 닦은 뒤 조용히 중얼거렸다.
“여기까지 온 이상, 나도 망설이지 않겠어. 설령 이 모든 것이 꿈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나에게 있어선 이 꿈이 나의 전부이니까.”
* * *
윈드시크릿의 아침이 밝아 왔다.
최근 몇 달 동안 마하임은 하루에 5시간 이상 자 본 적이 없었다.
“흐아아암….”
마하임은 팔을 길게 뻗으며 기지개를 폈다. 그의 책상위에는 처리해야 할 문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시오니아 제국의 수송선을 털어 얻은 설탕은 세실에게 넘겨 모두 장물로 처리해 버렸다.
정상적인 가격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가격이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설탕은 사치품, 그 사치품이 정상적인 유통 경로를 통해 대량으로 풀린다면 시오니아 제국에게 꼬리가 잡힐 것이 분명했다.
“음…. 주인. 좀 쉬자. 으으으….”
마하임의 침대에서 자고 있는 아나모네는 몸을 뒤척이며 말했다.
지난 주 내내 성벽 보수를 위해 검기를 남발한 그녀는 완전 탈진해 그녀의 특기인 그림자 은신술조차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요한이나 제난 역시 마찬가지였다. 돈은 어느 정도 모였지만, 실제 일할 일꾼들은 몇 달 동안 재대로 밥도 챙겨 먹지 못한 몰골의 영지민들뿐이었다.
결국 대규모 토목 공사를 진행하기 위해서 ‘오라’라든지, ‘마법’은 필수 능력이 되어 버렸고 이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조리 동원되어 쥐어짜듯 일을 해야만 했다.
“나도 조금 무리했나?”
할 일은 넘쳐났다. 마하임 역시 오페라를 한계까지 이용해 하루하루를 버틴 덕분에 정신적인 피로도는 이미 한계를 넘긴 지 오래였다.
똑똑똑.
그때 들려온 소리. 이 시간에 마하임의 집무실에 찾아올 사람은 단 사람뿐이었다.
“들어와.”
“네, 영주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문 밖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다름 아닌 요한이었다. 요한의 얼굴에는 채 씻어 내지 못한 피로로 다크서클이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새 방은 마음에 드시는지요.”
“꽤 좋군. 제페쉬 백작에게 너무 폐를 끼치는 건 아닌가 싶군.”
시오니아 제국의 상선을 턴 이후, 마하임은 제페쉬 백작의 저택으로 업무 장소를 옮겼다.
새로운 인재의 영입도 있었고, 예산이 확보되자 할 일이 몇 곱절은 늘었던 것이다.
영빈관은 영지의 너무 구석진 곳에 있을 뿐 아니라 넓이도 좁아서 결국 제페쉬 백작의 저택을 임시로 빌렸다.
“식사하셔야죠. 저녁 식사도 거르셨지 않습니까?”
“알았다. 곧 나가지.”
요한이 나간 후 마하임은 몸을 일으켜 아나모네를 깨웠다. 아나모네는 피곤한 나머지 한동안 정신을 못 차렸지만 이내 늦잠을 잔 것을 알고 화들짝 놀랐다.
“미안하다, 주인. 늦잠을 자 버리다니….”
어쩔 줄 몰라 하는 아나모네와 함께 마하임은 식당이자 대회의장으로 향했다.
회의장에는 이미 제페쉬와 제난, 그리고 세실과 요한 등 마하임의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어머, 아나모네. 어젯밤에도 새하얗게 불태웠나 보네? 그렇게나 영주가 좋아?”
마하임과 아나모네가 같은 침대를 쓴다는 것은 모두 다 아는 사실. 물론 성적인 접촉은 없었지만, 세실은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다.
“닥쳐라, 이 도둑고양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그따위 막말을 하는가!”
발끈해 칼부터 뽑는 아나모네. 하지만 세실은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아아, 영주는 좋겠다. 싸움도 잘하고 밤시중도 잘 드는 다크엘프가 있어서.”
입을 삐죽이는 세실. 원래의 역사대로라면 아나모네는 세실의 충실한 부하였겠지만, 이미 역사는 바뀌었다.
조금 미안한 생각도 들었지만,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아나모네를 세실에게 돌려보낼 생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