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적당히 하십시오, 세실 님. 다들 보고 있습니다.”
보다 못한 요한이 세실을 제지하며 말했다. 그러자 세실은 불평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칫, 다들 나만 미워해.”
토라진 세실. 이를 바라보던 제난과 제페쉬는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자, 자 식사나 하지. 나 때문에 늦은 것 같은데.”
식탁 위에 차려진 스테이크며 스프는 아직도 따스한 수증기를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하임이 스테이크 한 조각을 베어 물자 누구나 할 것 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바로 전 소란은 언제 있었나 싶었을 정도로 식사 시간은 조용히 이어졌다.
세실은 하이엘프라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고기와 술을 마구 입 안으로 쑤셔 넣었다. 아나모네는 언제나 그렇듯 소리 없이 식사를 이어 갔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군.’
마하임은 입속의 스테이크를 음미하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과거로 회귀한 뒤, 하루하루 쫓기듯 살아온 그였기에 이런 여유는 정말 오래간만에 느껴 보는 것이었다.
이대로 아무 일 없이 평범하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가올 미래를 알고 있는 마하임에게 있어서는 지금 이 여유는 그저 폭풍전야의 고요함과 같았다.
어느 듯 식사시간은 끝나고 사용인들이 접시를 치웠다. 마하임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오전 회의를 시작했다.
“제페쉬. 영지민들의 보급 상황은 어떻지?”
“아, 네. 기본 배급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지난겨울에 내린 비 덕분에 파종 작업도 순조롭게 끝났습니다. 올해 가을이면 배급 없이 자급자족이 가능할 겁니다.”
“그래. 다행이군. 요한, 성벽 재건 사업은?”
“넷!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앞으로 3개월 후면 외성벽 복원은 완료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무리했던 보람이 있었다. 윈드시크릿 재건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다.
물론 시오니아 제국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한참이나 부족했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시기상으로도 제국과의 전면전은 아직 5년 이상 남았다. 지금으로서는 최선을 다하는 것 외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경비병 한 명이 다가와 제페쉬에 귀에 뭔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제페쉬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제페쉬는 마하임을 향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영주님, 제국에서 사신이 왔다고 합니다.”
“제국에서 사신?”
마하임은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다. 제국의 수송선을 습격한 지 이제 두 달이 막 지난 시점에서 제국의 사신이라니….
이건 말할 것도 없이 제국에게 꼬리를 잡혔다는 이야기였다.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알았다. 일단 기다리라고 말해….”
“네 알겠습니다.
마하임의 말에 제페쉬는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마하임은 모여 있는 모두에게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지? 지금의 이 상황.”
마하임의 질문에 침묵이 흘렀다. 세실은 눈이 동그래져서 눈치만 볼 뿐이었고, 요한은 입을 꾹 다문 채 침묵할 뿐이었다. 바로 그때 하륜이 입을 열었다.
“영주님께서도 예상하시겠지만, 들켰다고 봐야겠지요.”
“말도 안 돼. 보안은 완벽했다고!”
세실은 발끈해 소리쳤다. 호전적인 시오니아 제국이 자신의 수송선이 듣보잡 해적에게 털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전쟁은 필연적이었다.
그래서 최소한의 인원만을 동원해 제국의 수송선을 털었고, 적의 생존자는 단 한 명도 살려 두지 않았다.
그리고 수송선에서 얻은 장물은 조금씩 여러 단계에 걸쳐 철저하게 세탁 후 암시장에 내다 팔았기 때문에 들킬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하지만 제국의 사신이 찾아왔죠. 최악의 상황을 생각해 둬야 합니다.”
사뭇 진지하게 하륜은 말했다. 마하임의 이를 악물었다. 이런 상황을 생각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닥치니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일단 사신부터 만나 봐야겠다.”
마하임은 몸을 일으켰다. 지금 여기서 무너질 생각은 없었다. 달리 생각해 보면 시오니아가 사신을 보내왔다면 자신을 당장 죽일 생각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제국이 마음만 먹으면 윈드시크릿 같은 작은 영지 따위 금세 함락이 가능할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신을 보내왔다는 것은 뭔가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오랜만이군. 윈드시크릿의 영주.”
“너, 넌!”
제국의 사신을 만난 마하임은 놀라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는 다름 아닌 시문이었던 것이다.
지난번 노예 시장에서 벌어진 참사의 주인공이었던 시문. 그가 여기에 왔다는 것은 최악의 경우, 마하임을 비롯한 모두가 죽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걱정 마라. 이번에는 암살을 위해 온 것은 아니다.”
“그럼 왜 왔지?”
“황제폐하의 ‘하명’을 전하러 왔다.”
시문은 짧게 말을 끊었다. 요한과 세실, 그리고 아나모네는 검을 뽑은 채 긴장한 얼굴로 시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주위를 살얼음판처럼 만들었다.
“뭐지? 그 ‘하명’이란 것은?”
“회색의 마녀 ‘윈디’를 만나라.”
시문의 말을 들은 마하임은 순간 머릿속이 멍해짐을 느꼈다.
시노쿠 대륙에 사는 사람이라면 그녀에 대해서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 봤을 것이다.
전설과 같은 옛이야기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그녀는 천공의 대마법사, 전자의 요정 등 수많은 별칭으로 불리는 전설적인 존재였다.
“믿을 수 없군. 그녀가 실존한단 말인가?”
“넌 그녀를 만나기만 하면 된다. 반드시 혼자 가라. 위치는 알려 주겠다.”
“싫다면?”
“피보라가 몰아 칠거다.”
시문은 지금껏 감추고 있었던 살기를 한꺼번에 발산했다. 그것은 마치 폭풍처럼 맹렬한 파문을 그리며 사방으로 퍼져 갔다. 이건 말할 것도 없이 협박 그 자체였다.
“생각할 시간을 줄 수 있겠나?”
마하임은 신음하듯 말했다. 지난번 봤을 때보다 더 강해진 것 같은 시문. 지금 여기에 있는 모두가 동시에 덤벼도 시문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가능하리라 생각하나?”
“알겠다. 언제 출발하면 되지.”
“36시간 주겠다.”
시문은 마하임의 앞에 종이 한 장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뒤돌아서면서 차갑게 말을 이었다.
“다른 생각은 하지 마라. 황제 폐하의 변덕만 아니었다면, 넌 내 손에 이미 죽었을 거다.”
시문이 흩뿌리던 강렬한 살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살기만으로 새파랗게 질렸던 세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문은 곧장 문밖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리고 처음 등장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후우, 아무래도 벌집을 제대로 건드린 것 같군요.”
하륜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최악의 상황은 면한 것 같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좋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 제국을 적으로 돌려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하륜의 물음에 마하임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지금 시점에서 마하임 자신이 없다 하더라도 영지는 그럭저럭 돌아는 갈 것이다.
그를 위해서 제페쉬와 같은 인재를 모았던 것이고.
“회색의 마녀 ‘윈디’…. 직접 만나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저기 영주님…. 혹시라도 윈디 님이 저에 대해서 묻는다면 무조건 모른다고 해 주십시오.”
“왜지?”
“하하, 그건 나름의 사정이 있는지라. 꼭 부탁드립니다.”
하륜의 알 수 없는 부탁을 들은 마하임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찌 되었건 그렇게 조금은 뜬금없는 마하임의 여행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 *
이른 봄. 서산으로 기우는 태양을 등지고 마하임은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윈드시크릿을 떠난 지 벌써 1주일이 지났다. 배로 4일, 마차로 2일, 그리고 걸어서 하루 만에 겨우 이곳에 도착한 마하임은 그 누구도 동행하지 않고 홀로 길을 걷고 있었다.
“후우, 아직도 멀었나?”
숲과 바위로 꽉 가로막힌 산길. 이곳은 시오니아 제국령이긴 했지만, 제국령의 가장 외각이었기에 평범한 시골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길은 마차 한 대도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좁았다. 하지만 제법 많은 사람이 지나다닌 모양인지 길은 반들반들하게 잘 닦여 있었다.
시문이 알려 준 회색의 마녀 윈디가 사는 곳은 바로 이 좁은 오솔길 끝이라고 했다.
“여기로군.”
땀이 마하임의 금발을 완전히 적시고 나서야 석조로 만들어진 낡은 저택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산골에는 어울리지 않는 3층짜리 저택. 저택은 온통 덩굴나무로 덮여 있어 어디까지가 집이고 어디까지가 덩굴나무인지 구별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계십니까?”
잿빛 도료(塗料)가 칠해진 금속제 문을 두드렸다. 문은 꽤 낡아서인지 마하임이 문을 두들길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그러고 보면 이곳은 저택이라 말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어 보였다. 3층짜리 건물이긴 했지만, 그 규모가 그다지 크지는 않았다.
그리고 병풍처럼 둘러쳐진 건물 주변의 숲 때문에, 저택이라기보다는 아담한 별장을 연상시켰다.
끼이이-
저택 안에서 특별한 반응은 없었다. 대신 닫혀 있던 문이 마찰음과 함께 미끄러지듯 열렸다. 그러나 여전히 인기척 같은 것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법?’
문을 여는 마법 정도야 흔하다면 흔한 마법이었다. 하지만 마법을 사용했을 때 발생하는 마나의 파동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뭔가 수상쩍은 기운이 느껴졌다.
‘함정인가?’
나름 지옥과 같은 전쟁을 겪어 본 마하임에게 있어 함정 마법은 생소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확히 어떤 함정 마법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알면서 당한다는 건 정말 싫군.”
마하임의 예민한 감각이 이것은 함정이라고 끊임없이 경고하고 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때론 함정인지 알고서도 당해 줘야 할 때도 있는 법,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었다.
마하임은 이를 지그시 깨물고 저택 안으로 첫걸음을 뗐다.
“아무도 없나?”
문 안쪽은 뜻밖에 평범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그리고 현관은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현관 건너편에는 커다란 창문이 있었는데 황혼으로 변한 따스한 햇볕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고급스럽다 보기보다는 실용성이 더 강조된, 그야말로 평범한 현관이었다.
평범하다 못해 포근하기까지 한 분위기.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여전히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여기에 서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다시 돌아간다는 건 더욱 말이 안 된다.
이판사판, 이미 결심은 섰다. 남은 것은 실행에 옮기는 것이었다.
부웅-
마하임이 문 안쪽으로 완전히 들어왔을 때였다. 마치 저택 전체가 진동하는 듯한 울림이 마하임의 귀를 자극했다.
마하임은 순간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집어 던져 버리고 방어 자세를 잡았다. 그것은 의도적인 것보다는 실전으로 다져진 습관에 가까운 것이었다.
“호오, 반응은 좋다요.”
그때 들려온 목소리. 그리고 그와 함께 주변의 풍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칠흑 같은 어둠이 몰려왔다. 전후좌우 가리지 않고 그 어둠은 순식간에 저택 모든 것을 가려 버렸다. 남은 것은 오직 하나, 현관 건너편에 있던 커다란 창문뿐이었다.
‘망할! 결계(結界)다! 이제야 눈치채다니!’
마하임은 이것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처럼 빠르고 광범위하게 구현된 건 처음 보지만 예전에도 이것에 당해 본 적이 있었다.
이것은 마법이 아니다. 마법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마나를 다루는 기술, 즉 주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