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어디서 왔다요?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다요.”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생각보다 훨씬 어린 소녀의 목소리. 조금은 당혹스러웠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모든 전략에 있어 상대의 정확한 정보를 아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그러나 지금 저 목소리의 주인공은 모습은 고사하고 어디쯤 있는지조차 가늠하기 어려웠다.
“황제의 명으로 왔습니다. 마하임이라 합니다. 윈디 님 맞으신지요.”
그녀의 물음에 마하임은 짧게 대답하며 주위를 살폈다. 그의 극도로 예민해진 감각으로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아! 깜빡했다요. 네가 그 ‘해적’이다요?”
“…….”
들으면 들을수록 적응되지 않는 기묘한 목소리였다. 특히 말끝마다 ‘요’자를 붙이는 것이 마하임의 귀에 몹시나 거슬렸다. 하지만 지금 그런 데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귀여움을 넘어서 천진난만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에 담겨 있는 마나의 흐름은 거의 언령(言灵) 마법급. 이야기로만 듣던 드래곤 피어를 정면에서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도망가지 않는 거 보니 기본은 되어 있어 보인다요. 죽이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요.”
도망가고 싶어도 결계 내에선 도망칠 수 없었다. 지금 이곳은 외부세계와 완벽히 격리된 또 다른 세계. 그녀가 허락하지 않고서는 그 어디도 갈 수 없었다.
“내 장난감이랑 잠시 어울려 주면 된다요. 3분만 버티면 합격이다요.”
쿵-!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들려온 묵직한 충격음. 그리고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제가 생일 선물로 줬다요.”
“저, 저건!”
마하임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마장기였다. 3m가 넘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거인. 저런 형태의 거체는 마장기 말고는 없었다.
“그럼 시작이다요!”
윈디의 외침과 함께 마하임을 향해 마장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쿵쿵쿵!
마장기가 한 걸음 한 걸음을 뗄 때마다 바닥이 진동했다. 처음은 그다지 빠르지 않았지만 마장기는 순식간에 마하임과의 거리를 좁혀 왔다.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마하임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삑, 모델 넘버 A12211. 이족 보행 정찰용 안드로이드 급속 접근!]
“알고 있어! 초진동 발동!”
[초진동 모드로 전환합니다]
오페라의 외침과 함께 마하임의 검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실전에서 사용은 처음이었지만, 마장기와 같은 금속으로 만들어진 물건이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간단히 잘라내 버리는 위력을 보여 준다.
부우우웅!
나지막한 울림과 함께 검의 진동음이 파문을 그리며 퍼져 갔다. 하지만 마장기는 전혀 개의치 않고 마하임을 향해 달려들었다.
마하임은 뒤로 물러서지 않고 마장기의 가장 취약한 부분인 다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서걱-!
두께만 해도 1m에 가까운 마장기의 다리가 허무할 정도로 간단히 잘려 버렸다.
“호오, 초진동 나이프다요? 어라, 그런데…. 그 검. 어디서 본 것 같다요?”
마장기는 더는 움직이지 못하고 바닥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흘렀다.
“혹시, 하륜에게 무슨 이야기 못 들었다요?”
뜬금없이 하륜의 이름이 윈디에게서 나오자 마하임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보아하니 이미 자신과 함께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일단은 제 부관으로 일하고 있긴하지만 별 말은 없었습니다. 왜 그러시는지?”
“부관?! 그럼 네가 새로운 하륜의 봉인가 보다요?”
“보, 봉?”
“네가 가진 검. 그리고 네 몸속의 나노머신, 모두 내 거다요. 하륜 그놈이 모조리 내게서 훔쳐간 거다요.”
윈디의 화난 목소리가 주변을 쩌렁쩌렁 울렸다. 마하임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전 모르는 일입니다!”
“그건 네 사정이다요. 꽤나 하륜의 마음에 들은 것 같은데, 나랑은 상관없다요. 돌려 받아야겠다요!”
쾅-!
비명조차 지를 시간이 없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한 줄기의 섬광. 그것은 전격 계열 최상의 주문 중 하나인 라이덴(leiden)이었다.
수만 볼트에 이르는 전격이 마하임의 몸에 직격하자 아무리 나노머신의 보호를 받고 있는 마하임이라고 하지만, 단숨에 의식이 날아가고 말았다.
* * *
“정신이 들었다요?”
마하임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하임의 마지막 기억은 윈디의 결계에 갇혀 마장기와 싸우다 의식을 잃은 데까지였다.
마하임은 저도 모르게 몸을 벌떡 일으켰다.
“설마, 당신이…?”
마하임의 눈이 커졌다. 윈디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마하임도 알고 있었다.
이미 전설이 되어 버린 회색의 마녀 윈디. 그녀의 전설은 수백 년 전부터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그래서 마하임은 윈디가 엘프와 같은 유사 인간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마하임의 시야에 들어온 저것은 그의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님프 처음 보냐요? 내가 바로 윈디다요.”
눈앞의 그것은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수도 있을 정도의 작고 앙증맞은 붉은 머리 소녀였다.
그리고 소녀의 등 뒤에는 반짝이는 두 쌍의 날개가 달려 있었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불쾌한 듯 마하임에게 쏘아붙였다.
“불쾌하셨다면 사죄드립니다. 님프는 정말 처음이라.”
마하임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라이덴을 맞아 기절하는 건 한 번으로 충분했다.
“흥, 됐다요. 라이덴은 미안했다요. 이것으로 퉁치자요.”
“…….”
뭔가 완전 손해 보는 느낌이었지만, 지금 마하임이 감 놔라 배 놔라 할 처지는 아니었다.
“치료는 잘된 것 같다요. 타 버린 머리칼이랑 몸도 완전히 회복시켜 놨다요. 전보다 움직이기 훨씬 쉬울 거다요.”
만약 마하임이 라이덴을 맞은 직후의 자신을 봤다면 정말 경악을 했을 것이다.
머리카락은 라이덴을 맞은 직후 증발해 버렸고 피부 대부분이 3도 화상을 입고 말았다.
보통은 쇼크로 죽는 것이 맞지만, 윈디에게 있어 이 정도 상처를 치료하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
“윈드시크릿의 영주. 마하임이라고 했다요.”
“네.”
“흠, 뭔가 조금 애매하긴 하지만 뭐 좋다요.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니니까.”
윈디는 마하임 주변을 날아다니며 무슨 신기한 물건이라도 보듯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몸 여기저기를 툭툭 건드리며 고개를 연신 갸우뚱했다. 그러다 입을 연 윈디.
“마법을 배워 볼 생각 없다요?”
“무슨 말씀이신지.”
“마법 모른다요? 만능의 힘, 마나를 제어하여 일으키는 초상현상.”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마법을 배울 수 없는 몸입니다.”
그건 타고난 것이었다. 마법도, 오러도, 심지어는 내공조차도 마하임은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버려졌다.
“배울 수 있다요. 그렇지 않다면 하륜의 나노머신이 제대로 작동할 리가 없다요.”
“?!!”
“그렇게 놀라는 표정 짓지 말라요. 그 나노머신은 원래 본녀의 것이었다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겁니까?!”
마하임은 놀라 반문했다. 물어볼 것은 너무나 많았지만, 우선 윈디의 말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이미 자신의 정체를 완벽하게 간파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륜과 나노머신에 대해서도 그녀는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있다요. 황제가 무엇 때문에 널 나한테 보냈는지, 그리고 나의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한 건 당연하다요.”
윈디은 마하임에게 날아가 그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댄 후 말을 이었다.
“우선은 나의 학교 ‘알타베르나’에 입학한다요. 그대의 영지는 걱정 말라요. 내 밑에 있으면 그대의 영지를 황제가 손대는 일은 없을 거다요.”
“그건 제안입니까? 아님 명령입니까?”
“둘 다 아니다요. 굳이 말하자면…. ‘운명’이다요.”
윈디는 방긋 웃었다. 마하임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운명’이라….
돌이켜 보면 정말 웃긴 일이었다.
꿈과 같은 과거로의 회귀.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다 보니 이곳까지 왔다.
우연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작위적인, 어쩌면 윈디의 말처럼 정말 운명일지도 몰랐다.
“좋습니다. 그럼 언제까지 다녀야 합니까?”
“당연히 졸업할 때까지다요.”
“…….”
마하임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윈디를 바라보았다.
알타베르나가 어떤 곳인지는 마하임 역시 알고 있었다.
대륙 유일의 ‘대학’. 비록 제국령에 있긴 하지만, 이 대학은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 지역이었다. 그리고 대륙에서도 내로라하는 인재가 모이는 상아탑.
그 이름에 걸맞게 졸업하는 것도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의 난이도를 자랑했다. 마하임은 답답한 마음에 입을 열었다.
“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요.”
“제고해 주십시오.”
“거절하겠다요.”
어림도 없다는 듯 윈디는 단칼에 마하임의 말을 잘라 버렸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대체 무슨 의도로 이러는지 알기라도 한다면 뭔가 대책이라도 세워 보겠지만, 닥치고 가라니 제아무리 마하임이라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이건 정해진 사안이다요. 네 영지를 지키고 싶다요? 그럼 스스로 증명해 보라요. 자신의 가치를. 그럼 내일부터 등교다요. 엘케인!”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윈디의 외침과 동시에 마치 유령처럼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독수리와 인간을 합쳐놓은 듯한 존재였다.
이런 모습의 유사 인간이 있다는 이야긴 그 어떤 책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가만, 엘케인?’
마하임은 재빨리 기억을 더듬었다. 엘케인이라 함은 분명 바람의 정령. 그것도 역사상 단 한 명밖에 소환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정령왕’을 뜻하는 단어였다.
“아, 손님이 계셨군요.”
“데려가서 좀 씻겨라요. 방은 제일 위층 방으로 주고.”
“네, 알겠습니다.”
엘케인은 공손히 윈디 앞에 머리를 조아린 뒤 마하임을 바라보며 말했다.
“엘케인이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우선 자리를 옮길까요?”
마하임은 엘케인의 보이지 않은 존재감에 눌려 무언가 홀린 듯 그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또다시 마하임의 넋을 빼놓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어서 들어오시지요.”
엘케인은 방문 안쪽에서 마하임을 재촉했다. 마하임은 방 안쪽에 펼쳐진 풍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문을 열자 마하임의 눈에 보인 광경은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하늘,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 그 가장자리에 있는 노천이었다.
노천의 물은 보글거리는 소리를 내며 새하얀 수증기를 끊임없이 하늘로 뿜어내고 있었다.
“아, 이런 건 처음 보시나 보죠? 저 문은 포탈(Portal)입니다. 공간이동 마법이 걸려 있죠. 들어 보신 적은 있을 텐데요?”
물론 마하임이 모를 리는 없었다. 그러나 책에서 한두 번 이름만 접해 본 마법을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작스레 온몸으로 체험하니 아무리 마하임이라고 해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지금 이곳의 계절은 한여름. 그것도 밤이었는데 지금 이곳은 밤이 아니라 낮, 그것도 함박눈이 쏟아지는 한겨울이었다.
포탈 마법은 이어지는 포탈의 거리가 증가할수록 막대한 마나 연산이 필요하다.
낮과 밤, 심지어는 계절마저 달라질 정도의 거리라면 7클래스로도 부족한 고위 마법일 터였다.
“뭐, 상관없겠죠. 나오실 때 역시 이 문으로 나오시면 됩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길.”
엘케인은 이렇게 말하고 마하임을 그곳에 놔두고 문 안쪽, 그러니까 한밤중의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마하임은 저택 안과 설원의 경계선에 서서 이 놀라운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애썼다.
“이거 정말 귀신에게 홀린 기분이군.”
마하임은 부드러운 눈이 잔디처럼 깔린 설원 안쪽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뽀도독-
눈 밟는 소리가 마하임의 귀를 간지럽혔다. 시원한 감촉에 등골까지 오싹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춥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마하임은 천천히 눈앞의 노천탕 안으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이 온몸을 감싸 오자 마하임의 입에서 신음이 절로 나왔다.
마치 피로가 단숨에 풀리는 듯한 느낌. 물은 너무나 깨끗했고 또한 깊었다. 물에 발을 담그기가 무섭게 마하임의 어깨까지 물이 잠겨 왔다. 눈발은 점점 약해졌다. 마하임은 멍하게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사이에서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 햇살…. 운명은 그렇게 흘러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