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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군주-48화 (48/194)

48화

같은 시각, 윈디의 집무실 안. 집무실 내부는 바로 코앞에 무엇이 있는지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이곳에 있는 빛이라고는 방 중앙에 있는 수정구뿐이었다.

“꽤나 급한 모양이다요. 황제.”

윈디는 구슬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구슬 안에는 희미한 인영이 일렁거렸다. 구슬 속에 비친 제국의 황제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서버’에 운명이 달린 일이니까요.”

황제의 말에 윈디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더는 물러날 수 없었다.

“99%다요. ‘카테고리 S1’이 확실하다요.”

“가이아가 이곳까지 ‘S1급 보안 인물’을 대피시켰다는 것은 우리 서버가 마지막이라는 것을 뜻하겠죠.

“그렇다요. 다른 서버들과의 교신도 다 끊겼다요. 난감하다요.”

윈디는 꼬리를 무는 걱정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녀가 계산해 왔던들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어긋나 버렸다.

이렇게 된다면 각오를 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죠. 마하임이라고 했던가요? 생각 이상으로 성장이 빨라 보였습니다.”

“최소 조건이 충족된 것에 불과하다요. 일단 그 정도는 해줘야 ‘지구연방’의 결전 병기라 할 수 있다요.”

윈디는 긴 곰방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담배 심지에 불을 붙이는 윈디. 그녀에게 있어 흡연이란 사실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곰방대를 빨 때면 비록 조금이라 할지라도 마음이 안정됐다.

“경계 태세를 강화해야 할 듯합니다. 그가 우리 서버에 온 이상 이곳도 더는 안전지대가 아닐 테니까요. 그럼 좋은 밤 되시길.”

수정구의 빛이 사라졌다. 방 안은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윈디는 곰방대를 길게 빨아들였다 새하얀 연기를 뿜어냈다.

“더는 물러날 곳도 없다요. 주사위는 던져졌다요.”

이 세상 모든 것은 시작이 있고, 또한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윈디는 그 끝이 멀지 않음을 직감했다.

지금부터는 시간 싸움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무리 윈디라 할지라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끝을 돌파할 열쇠 중 하나가 바로 마하임이라는 것뿐이었다.

윈디는 곰방대를 갈무리하고 자신의 집무실 창밖을 바라봤다.

이미 태양은 지고, 하늘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마치 이 세계의 종말이라도 알리려는 듯이….

그러나 끝도 종말도 그 무엇도 결정된 것은 없었다. 윈디는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담아 기원했다.

부디 그 끝이 새로운 시작이 되기를….

* * *

마하임은 사실 학교라는 곳에 다녀 본 적이 없었다. 일반적인 왕족이 그러하듯 왕실에서 초빙한 교사에게 단독으로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학교라는 곳은 평민이나 하층민이 다니는 곳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앞으로 다녀야 할 ‘알타베르나’는 달랐다.

알타베르나는 대륙에서도 내로라하는 인재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그래서 이 학교에 입학하는 것만으로도 가문의 영광이었고, 국가로서도 국격을 높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마하임의 모국인 아르케비니아에서도 이 학교에 왕족을 입학시키려는 시도는 수없이 있었지만 성공한 것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만큼 입학하기 어려운 곳이 바로 ‘알타베르나’였다.

“후우, 어쩌면 나한테는 과분한 곳일지도 모르겠군.”

마하임은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알타베르나’는 그 규모가 일개 도시만큼 거대했다.

상업 지구와 거주 지구, 교습 지구 등으로 세밀하게 나누어지는 알타베르나는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처음은 생소하겠지만 익숙해지면 괜찮을 겁니다.”

긴장해 잔뜩 굳어 있는 마하임을 향해 엘케인은 말했다. 하지만 주변 상황은 엘케인의 이 말을 전혀 설득력이 없게 만들었다.

특히 신경 쓰였던 것은 주변의 시선. 정령왕 엘케인이 인간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관심을 독차지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널따란 대로를 가로질러 마치 신전을 형상화한 것 같은 ‘교육 지구’에 다다르기까지 마하임은 따가운 시선을 견디며 발걸음을 내디뎠다.

반질한 대리석으로 된 바닥에 레드 카펫. 누군가에게는 환영의 인사였지만 마하임에게는 어색하고 부담스러움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다.

카펫을 가로질러 꺾여 있는 코너를 지나 엘케인의 안내를 받으며 한 강의실로 입장하게 되었다.

B2004호. 마하임이 입장하자 떠들썩하던 분위기에 찬 물을 끼얹진 것처럼 싸늘해졌다.

엘케인은 가볍게 눈인사를 맞춘 뒤 바삐 어디론가 가버렸고, 마하임은 자작나무로 제작된 책걸상을 가로질러 구석 귀퉁이에 자리를 잡았다.

“자자, 자리에 앉으세요.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따가운 시선은 새하얀 로브를 걸친 나이 지긋한 교수가 교실에 들어와서야 잦아들었다.

지금 마하임이 있는 곳은 나무 냄새 물씬 풍기는 고풍스러운 건물 안이었다.

건물 안에는 학생들을 위한 자작나무로 만들어진 책상과 의자가 나란히 놓여 있었고, 교실 안을 가득 채울 정도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앉아 있었다.

“오늘 배울 내용은 마법학 개론입니다.”

교수는 느긋하게 입을 땠다. 수업의 내용은 중급 마법학에 관한 내용이었지만, 마하임에게 있어서는 그다지 생소하지 않았다.

비록 마하임은 마법을 쓰지는 못했지만, 그의 모국 아르케비니아는 마법을 신성시하는 국가였다.

당연히 귀족들은 누구 할 것 없이 마법의 재능이 있었고 마법학 교육은 태어날 때부터 해야 하는 필수 과목이었다.

“아는 걸 다시 듣는 것도 고역이구나.”

교수의 강의는 거의 교과서를 읽는 수준이었고,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어렵게 설명하는 등,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마하임이었지만, 그가 알고 있는 마법 지식은 최소 7클래스 이상이었다.

그러다 보니 중급 마법학 정도는 교과서 자체를 달달 외울 경지였다. 그러니 당연히 지루할 수밖에 없었다.

“거슬리는군.”

수업 중에도 주변의 시선은 여전히 따가웠다. 그중에서도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건장한 체구의 남자는 노골적으로 살기까지 내뿜고 있었다.

자신보다 10cm는 더 커 보이는 키에, 터질 듯한 근육.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은 옛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영웅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강의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교수가 교실 밖으로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 붉은 머리의 남자가 마하임에게로 다가왔다.

“넌 뭐냐?”

앞도 뒤도 없는 반말. 마하임은 순간 발끈했지만, 첫날부터 문제를 일으킬 생각은 없었다. 마하임은 애써 화를 죽이고 입을 열었다.

“뭣 때문에 그러는 거지?”

“1학년을 거치지도 않고 2학년 편입에, 윈디 그 마녀의 시종마인 엘케인과 함께 등교라니. 너 정체가 뭐야? 그 마녀의 끄나풀인가?”

“…….”

마하임은 긴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돌아봤다. 교실 안의 학생들의 시선은 모두 마하임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알타베르나’에서는 편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히 편입이라는 제도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하임은 2학년으로 편입되어 학교에 다니게 된 것이다.

거기다 첫 등교부터 엘케인과 함께 교실까지 들어왔으니 눈에 안 띄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신경 꺼 줬으면 좋겠어. 귀찮으니까.”

마하임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의 말을 들은 주변의 학생들은 모두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마하임에게 시비를 건 저 남자는 알타베르나 최고의 문제아 ‘루다크’였던 것이다.

“뭐라?!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반말이냐!”

“내가 왜 너한테 존대를 해야 하지?”

“이 하등한!”

주먹을 부르르 떠는 루다크. 하지만 이내 진정하고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어느 깡촌에서 온 애송인지 모르겠지만, 내 이름을 알려 주지. 내 이름은 루다크 슈라토. 시오니아 제국의 기사다!”

“…….”

마하임은 침묵했다. 슈라토 가문. 어디서 들어봤다고 생각했지만 ‘루다크’라는 이름을 듣자 곧바로 기억이 떠올랐다.

어찌 그 이름을 잊을 수 있으랴!

회귀 전, 그 미래에서 시오니아 제국의 총사령관이자 강한 무위를 자랑하던 기사 중의 기사였다.

그리고 마하임이 아끼는 신하와 동료를 무자비하게 도륙한 원수 중의 원수이기도 했다.

“왜 그러지? 내 이름만 듣고서도 주눅이 들었나?”

루다크는 마하임을 내려다보며 깔보듯 말했다. 하지만 마하임은 지금 그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참을 수 없는 분노. 여기서 녀석을 죽인다면 미래를 바꿀 수 있었다.

물론 대국적인 의미로 역사를 완전히 바꿀 수는 없겠지만, 이놈을 전장에서 만나서 죽이는 것보다는 쉬울 터였다.

‘내 학교에서 살인은 절대 안 된다요. 그 이유야 어쨌든 살인을 한다면 네 영지를 보호해 주겠다는 이야긴 없는 걸로 하겠다요.’

‘알타베르나’로 오기 전 윈디의 경고가 마하임의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놈을 죽이고 싶었지만, 그렇게 된다면 ‘윈드시크릿’이 위험에 놓이게 된다. 그것만은 피하고 싶은 마하임이었다.

“시오니아의 기사? 기사라는 놈이 입만 살았나? 하찮군.”

“뭐라고?! 이 하등한 새끼가!”

주먹을 불끈 쥐는 루다크. 마하임은 싸늘하게 웃었다.

‘죽이지만 않으면 된다는 이야기였지?’

식물인간이나 하반신 불구가 되면 안 된다는 말은 없었다. 지금으로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와라, 시오니아의 기사. 네 걸레 씹은 것 같은 말버릇부터 고쳐 주마.”

마하임은 자세를 고쳐 잡았다. 녀석의 기량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마하임에게는 ‘오페라’가 있었다.

[오페라 전투 모드로 이행합니다. 대뇌 오버클럭 x3으로 이행.]

굳이 말로 실행할 필요조차 없었다. 오페라는 마하임의 심리 상태를 읽고 즉각 반응했다.

사물의 움직임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마하임의 몸속에 흐르는 나노머신은 뇌뿐만 아니라 척수 신경 조직과 근육 세포 모두를 순식간에 장악했다.

[전투준비 완료]

마하임은 천천히 루다크를 향해 걸어갔다. 마하임의 분위가 순식간에 바뀐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루다크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쳤다.

“뭐, 뭐야! 내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건가?!”

루다크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외쳤다. 하지만 마하임은 대꾸도 하지 않고 그에게 다가갈 뿐이었다.

“기세등등하는 것도 지금뿐이다! 보여 주마, 우리 가문의 비기를!”

루다크의 몸 주변에 검은색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를 본 주변의 학생들은 기겁하며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마하임이 오기 이전에도 루다크는 꽤 많은 사건 사고를 저질렀고, 그가 흥분했을 때면 어김없이 저 기술을 사용했었다.

“암흑투기(暗黑鬪技)인가.”

루다크의 전성기 때보다는 훨씬 못 미쳤지만, 저것은 암흑투기가 분명했다.

암흑투기란 기(氣)와 완전 상반되는 힘으로서, 자신의 생명 에너지를 불태워 사용하는 매우 위험한 기술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통적인 격투 문파들은 이 기술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나 시오니아 제국에서는 달랐다.

“그걸 사용하도록 놔둘 순 없지!”

마하임은 단숨에 루다크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루다크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퍽!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마하임의 주먹은 정확히 루다크의 얼굴에 맞았다. 하지만 루다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풋, 이따위 주먹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나? 나의 암흑투기는 공방일체, 무적의 기술이다!”

루다크는 마하임의 얼굴에 자신의 주먹을 날렸다. 그의 주먹에는 암흑투기 특유의 검은 잔영이 타오르듯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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