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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군주-49화 (49/194)

49화

‘역시 암흑투기. 하지만, 맞지 않으면 의미가 없지.’

‘오버클럭’을 사용 중이라 그 움직임은 한없이 느려 보였지만, 방심할 수 없었다.

암흑투기가 실린 공격에는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하임은 기다렸다는 듯 가볍게 몸을 날려 여유 있게 루다크의 공격을 피했다.

“그 움직임, 신체 강화 마법인가?”

처음으로 루다크의 눈이 커졌다. 지금 마하임이 보여 준 움직임은 일반적인 인간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그러나 알타베르나에선 그다지 신기하지도, 낯선 일도 아니었다.

“너도 일단은 알타베르나의 학생이라는 거냐? 좋아, 다음 것도 한번 피해 보시지!”

다시금 루다크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처음보다 훨씬 더 크고 선명한 검은 기운.

마하임은 최소한의 힘으로 루다크를 제압할 생각이었지만, 저 검은 기운은 생각 이상으로 강력한 힘이 느껴졌다.

‘이거 곤란한데. 전력으로 싸워야 하나?’

강의실 안은 이미 난장판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학생들은 괜히 망나니 루다크에게 말려들기 싫어 강의실 밖으로 도망가기 바빴고 책상이고 걸상이고 강의실 안은 이미 전쟁터나 마찬가지였다.

조용히 처리하기에는 이미 선을 넘긴 것이 확실했다.

“죽어라! 버러지!”

흐릿한 검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자 어느 순간 화마의 검으로 변해 있었다.

루다크의 전성기와 비교한다면 한참은 모자랐지만, 저걸 정면에서 맞는다면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오페라, x10.”

[오버클럭 x10 이행. 가속합니다]

마하임이 지금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오버클럭. 비록 아직 단시간만 사용할 수 있었지만 그 위력은 절대적이었다.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위화감이 마하임의 몸을 감쌌다.

루다크의 주먹에서 일렁이는 암흑투기의 흐름마저 굳은 듯 멈췄다. 지금이라면 루다크의 머리통을 단숨에 박살 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마하임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실행에 옮겼다.

“그건 곤란합니다. 마하임 님.”

바로 그때 마하임과 루다크 사이에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그는 다름 아닌 엘케인이었다.

“윈디 님이 말씀하셨을 텐데요. 살인은 금지라고.”

엘케인의 폭풍과 같은 존재감…. 그 존재감만으로 마하임과 루다크를 꼼짝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루다크의 얼굴은 수치심과 굴욕감으로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마하임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묵묵하게 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

시치미를 뚝 떼는 마하임과 루다크. 하지만 그런 말이 엘케인에게 통할 리 없었다.

“입에 침이라도 바르고 거짓말을 하셔야죠. 저기 기절해 있는 학생들이 보이지도 않습니까?”

엘케인의 말에 둘은 입을 닫았다. 그러고 보니 강의실 구석구석에 거품을 물고 쓰러져 있는 학생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루다크의 암흑투기에 노출된 학생일 것이다. 원인은 분명 루다크에게 있었지만, 그의 유치한 도발에 말려든 마하임 역시 잘한 건 없었다.

“이번은 그냥 넘어가 드리겠지만, 다음은 없습니다. 알겠습니까?”

엘케인의 말에 마지못해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케인은 처음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유령처럼 사라졌다.

루다크는 그제야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한 눈초리로 마하임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름이 뭐지? 출신은 어디냐?”

“알아서 뭐 하게?”

“큭큭, 뭐 좋아. 조금만 조사해 보면 금세 알 수 있을 테니. 오늘의 수치는 절대 잊지 않겠다.”

루다크는 살기 어린 눈빛으로 노려보더니 마하임의 어깨를 강하게 스치고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마하임은 스쳐진 어깨를 매만지며 현 상황을 머릿속에서 되뇌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생각지도 못한 학생까지 된 마당에도 불구하고 회귀 전의 숙적을 만나다니. 이건 운명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여기서 죽이지는 못했지만…. 뭐 상관없겠지. 시간은 아직 있으니까.”

마하임은 웃었다. 어쩌면 자신의 진정한 복수는 지금부터일지도 몰랐다.

* * *

마하임이 알타베르나에 다니기 시작한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특별한 사건은 없었다.

루다크와 몇 번 부딪치긴 했지만, 딱히 적대적인 행동은 하지 않았다.

물론 ‘두고 보자. 반드시 죽여 주마’라는 유치찬란한 대사를 주고받기는 했지만 말이다.

다른 학생들은 괜한 일에 얽히기 싫었는지 처음의 과도한 관심도 뚝 끊어졌다.

덕분에 마하임은 평범한 학생으로서 알타베르나에서의 생활에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저러나 언제까지 이 학교를 다녀야 하는 거지?”

알타베르나의 수업은 대체로 들을 만했다. ‘마법학’은 여전히 따분했지만 그 외의 의학, 심리학, 철학, 과학 등 지금껏 접해 보지 못한 다양한 학문을 접하고 나니 자신이 얼마나 좁은 세상에서 살아왔는지 새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마하임은 할 일이 있었다.

‘윈드시크릿’의 부흥. 그리고 시오니아 제국과의 전쟁. 아직 10년 이상의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이렇게 학교 생활을 한다는 것 자체가 시간낭비 같았다.

“학적 번호 190530. 마하임 폰 잉그램 어디 있나?”

갑작스럽게 강의실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은 한곳에 집중되었다. 그곳에는 교무처 직원이 서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만.”

“지금 즉시 교무처로 오게나. 학장님의 호출이네.”

무언가 불길한 예감. 알타베르나는 그 무엇보다 강의 시간을 신성하게 여겼다. 그럼에도 강의 중 갑자기 호출이라니, 일반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올 게 왔나?’

여기 온 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마하임의 편입은 윈디의 억지로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된 것이었다.

윈디는 이 학교의 명예 학장으로, 지금은 일선에 물러나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었고, 윈디는 막무가내로 이 편입을 강행한 것이다.

덕분에 윈디는 물론하고 마하임 역시 적이 잔뜩 생긴 상황이었다.

‘뭐 상관없으려나? 따지고 보면 여기도 전장이니까.’

마하임은 몸을 일으켰다. 이곳의 전장은 무력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전쟁이 아닌 음모와 속임수로 적을 파멸시키는 그런 곳이리라.

마하임은 자신에게 닥쳐온 이 새로운 전장을 향해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 * *

알타베르나의 각종 교무를 처리하는 교무처. 이 삭막한 곳에 간만에 사람이 가득 찼다.

개중에는 알타베르나의 실세를 잡고 있는 학장 ‘쿠라스’부터 시작하여 필수 과목을 담당하는 정교수, 그리고 조교수까지 그 수는 대략 40명이 넘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마하임이 홀로 서 있다.

“무슨 방법을 썼는지 몰라도, 부정행위는 용납 안 되네. 마하임 군.”

노란 곱슬머리에 둥글고 작은 안경을 쓴 학장은 근엄한 목소리로 마하임에게 말했다.

“전 부정행위 같은 건 하지 않았습니다.”

마하임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사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바도 아니었다.

3일 전 시험이 있었다. 알타베르나에서는 4년에 두 번 시험을 본다.

학업 성취도를 평가한다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졸업을 위해서는 반드시 높은 점수를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 난이도가 상당히 높아 시험을 치른 학생 중 절반이 낙제한다는 악명 높은 시험이었다.

“무슨 근거로 제가 부정행위를 했다는 겁니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 않느냐?! 입학한 지 한 달도 안 된 네가 전 과목 수석이라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냔 말이다!”

“말이 안 될 것도 없죠. 세상일을 학장님의 상식과 선입견으로 속단하지 마십시오. 일어나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이-노옴! 어디서 훈계질이야!”

분노한 학장의 외침이 교무처를 쩌렁쩌렁 울렸다. 하지만 마하임은 여전히 미동도 않고 서 있을 뿐이다.

학장은 정말 난처하고 당황스러웠다. 이번 학기, 제국 최고의 명문가라 일컬어지는 루다크 공자에게 수석을 안겨 주기로 당주와 밀약을 맺었던 터였다.

이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전 공작을 했던가? ‘슈라토’의 공자가 듣는 과목 담당 교수들을 일일이 불러 압박을 넣거나, 회유하는 등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였다.

알타베르나의 수석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학교에서 1등을 한다는 개념을 넘어섰다.

전 대륙의 왕족과 귀족들이 모여 수준 높은 교육으로 인재를 배출하는 곳이기 때문에 여기서의 수석은 대륙 전체에서 1% 안에 드는 인재나 다름없었다.

특히 수석을 할 정도의 인재를 배출한 가문은 그 자체만으로도 명문가라 칭송받을 수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대륙 유수의 왕족, 가문들이 알타베르나에 유학생을 보냈고 수석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했다.

암암리에 교수가 매수되는 사건이 일어났지만 알타베르나의 교수를 할 정도의 위치라면 매수당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그 대가가 금화, 그것도 무려 1만 달란트나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웬만한 소왕국의 1년 예산에 필적하는 1만 달란트는 인생을 역전을 할 수 있는 재물이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물이 학장의 인생 역전 계획을 단숨에 망쳐 버린다?

“우리 대학 역사상 12과목 만점은 단 한 번도 나온 적 없었다. 그런데 너 따위가! 너 따위가 감히!”

12과목이면 그 문제 수만 따져도 1000개가 넘는다. 그럼에도 마하임은 그중 단 한 문제도 틀리지 않고 전 과목 만점이라는 유례없는 대기록을 달성했던 것이다.

‘제기랄! 이럴 순 없어! 어떻게 손에 넣은 기회인데!’

학장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슈라토’ 가문의 당주에게 수석을 호언장담했는데, 이런 식이면 답이 없었다.

이제 남은 방법은 단 하나, 마하임을 부정 시험자로 몰아서 차석인 슈라토 가문의 공자, 루다크를 수석으로 만드는 방법뿐이었다.

“우리 학교는 대륙을 통틀어 가장 오래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우수한 대학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 대학에서 부정 시험이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고로 마하임 폰 잉그램을 학칙에 의해 퇴학에 처합니다.”

학장의 뜬금없는 선언에 모여 있던 학교 관계자들이 일제히 웅성거리기 시작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것은 분명한 월권 행위였다.

학생을 퇴학시키기 위해서는 당연히 징계 위원회 같은 절차가 필요하고 그 심의 기간도 한 달 이상 소요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지금 학장은 이것을 송두리째 무시해 버렸던 것이다.

“학장님, 아무리 그래도 퇴학이라뇨. 게다가 부정행위를 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도 없지 않습니까?”

교수 중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지금의 처사는 여러모로 무리수가 있었다. 하지만 학장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증거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그 가증스러운 마녀, 윈디 명예 학장이 직접 데려온 학생입니다. 설령 부정행위가 아닐지라도 그 마녀라면 필시 무슨 장난질을 했을 겁니다. 이번만은 그냥 못 넘어갑니다!”

학장은 이를 갈며 말했다. 이미 마하임이 윈디가 데려온 학생이라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알타베르나에서 윈디의 이미지는 그리 좋지 않았다.

비록 윈디가 알타베르나의 창립자라곤 하지만, 지금은 학교 운영에서 사실상 물러난 상태였다.

때문에 그녀의 영향력은 상당히 줄어들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가 간혹 저지르는 기행 아닌 기행.

그리고 쿠라스 학장의 오랜 편 나누기와 파벌 짓기가 거둔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좋소. 그럼 다수결로 합시다. 마하임의 퇴학을 찬성하는 교수는 손을 드십시오.”

눈을 번뜩이며 학장은 말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다수 교수가 손을 들었다. 손을 들지 않은 사람은 그야말로 손꼽을 정도였다.

이것이 현재 알타베르나의 상황이었다.

이대로라면 진실이야 어떻든 꼼짝없이 퇴학당할 위기에 놓이게 된다. 마하임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바로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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