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본관 1층…. 이곳은 그야말로 하나의 예술품이라 말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세월의 흐름이 물씬 느껴지는 복도, 아득히 멀리 보이는 천장. 창이라고는 하나 보이지 않았지만, 어디선가 스며든 빛들로 이곳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 신비스럽기까지 한 공간을 떠받치고 있는 4개의 거대한 기둥에는 전설과 같은 아름다운 그림들이 총천연색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그리고 그 기둥들의 한가운데는 새하얀 대리석과 알 수 없는 재질의 금속이 어우러진 신비한 비석 하나가 서 있었다.
“이건 뭐죠?”
마하임은 회귀를 하기 전에도 아르케비니아에서 이 비석을 본 기억이 있었다.
몇 번 이 비석에 대해 알아보려고도 해 보았지만, 그 누구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이 비석의 하단에는 대륙에서 공용어로 사용하는 언어로 ‘지구를 그리며’라고 적혀 있었고 그 아래는 고대어로 ‘Guide Stones’라고 적혀 있을 뿐이었다.
“이건 지도다요. 인류의 고향, 아니 우리 모두의 잊혀진 고향 ‘지구’로 돌아가기 위한 지도다요.”
윈디는 그 수수께끼와 같은 비석 앞으로 조용히 날아갔다. 그리고 두 눈을 감고 마치 기도라도 하듯 이 비석을 바라보았다.
지구, 마하임 역시 고대사에 대해 대충은 알고 있었기에 이를 모를 리 없었다.
지금 이 대륙에 거주하는 인류는 아득히 먼 옛날 고향인 지구를 떠나 이곳으로 이주한 이주민이라고 했다.
왜, 무엇 때문에 그들이 고향을 등지고 이 땅으로 왔는지는 아직 그 누구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였다.
“이미 ‘한계 연한’을 오래전 넘긴 내가 아직도 버틸 수 있는 이유도 어쩌면 지구를 향한 그리움 때문인지도 모른다요.”
윈디는 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말했다. 마하임은 그저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가자요. 추한 모습을 보였다요.”
윈디는 그렇게 말하며 앞장섰다. 마하임은 그저 묵묵히 그녀를 따랐다.
윈디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물론 궁금하기는 했지만, 이 이상 무언가를 묻기에는 공기가 너무 무거웠다.
멀리 오후의 따가운 햇살이 스며 들어오는 알타베르나 중앙 탑의 출구가 마하임의 눈에 들어왔다.
* * *
태양이 산허리로 모습을 드러내기 이전. 마하임은 언제나 그렇듯 눈을 떴다.
지금 마하임이 있는 곳은 윈디의 저택. 알타베르나의 학생은 원칙적으로 거주 구역에 있는 기숙사에서 생활해야 하지만, 마하임은 윈디의 배려로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마하임의 방은 그렇게 크지도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아담한 곳이었다.
마하임의 키에 맞춘 듯 딱 맞는 침대 하나와 1인용 책상 하나. 지나치게 검소하다면 검소한 방이었지만, 마하임은 그다지 불만은 없었다. 오히려 조용히 혼자 생활할 수 있어 마음에 들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마하임은 간단하게 몸을 푼 뒤 나무 향 물씬 풍기는 바닥에 앉아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좋아. 다시 한번 마나코어를 제어해 보자.”
이젠 익숙해질 때도 되었지만, ‘마나코어’에 마나를 순환시키는 과정은 어색하기만 했다.
마나코어란 마법사의 제2의 심장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중추핵. 이 중추핵에서 마나는 가공되어 마법으로 발현된다.
아직 자신이 왜 갑자기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된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이유야 어쨌든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 마하임은 너무나 기뻤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마하임은 생각지도 못한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역시 3클래스 이상은 사용할 수 없나?”
마하임의 마법학 지식은 7클래스 마법을 사용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마하임의 ‘마나코어’는 3클래스 이상의 마법은 구현할 수 없었다.
3클래스은 마법사라면 누구나 다 사용할 수 있는 기초 마법. 이 정도 마법밖에 사용할 수 없다면, 마법사로서는 실격이나 마찬가지였다.
똑똑똑.
바로 그때 마하임의 방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지금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일어나 계셨군요. 마하임 님.”
문을 열자 언제나처럼 근엄한 모습의 엘케인이 서 있었다.
엘케인과 윈디의 관계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정령사는 자신이 소환한 정령과 친구와 같은 관계였다.
하지만 윈디와 엘케인은 관계는 주종 관계와 비슷했다. 물론 자세한 것은 물어봐도 대답을 안 해 줘서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편지가 왔습니다.”
엘케인이 내민 편지 봉투. 그 봉투에는 윈드시크릿을 상징하는 인장이 찍힌 봉인이 보였다.
“감사합니다.”
“곧 식사 시간이니 식당으로 오십시오. 그럼 이만.”
엘케인은 이렇게 말을 남기고 문밖으로 사라졌다. 마하임은 문을 닫고 편지 봉투를 뜯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하륜이었다. 별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윈드시크릿은 마하임 자신이 있지 않더라도 잘 돌아가고 있다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빨리 돌아오지 않으면 하륜이 윈드시크릿을 꿀꺽하겠다는 농담 아닌 농담도 적혀 있었다.
“하아, 언제쯤 돌아갈 수 있을까?”
윈디가 정한 기한은 졸업할 때까지였다. 하지만 마하임이 알아본 바로는 최근 3년 간 졸업한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알타베르나의 교육 기간은 4년. 4년 안에 졸업하지 못하면 그냥 수료증만 받고 퇴교하거나, 졸업 인증을 받을 때까지 계속 학교를 다닐 수밖에 없었다.
과연 윈디는 적일까 아군일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그저 대학 생활에 조금이라도 빨리 적응하는 것 말고는 뾰족한 대안이 없었다.
“아침밥 다 됐다요! 빨리 안 오면 내가 다 먹는다요!”
윈디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빨리 안 가면 정말 마하임 자신의 몫까지 윈디가 다 먹어 버릴 터였다.
그 작은 몸집에 어떻게 그 많은 음식들이 들어가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침을 굶지 않으려면 지금 나가야만 했다. 마하임의 하루는 그렇게 또 시작됐다.
* * *
상업 구역, 알타베르나의 외곽에 있는 이곳은 각종 생활필수품으로부터 시작해, 마법아이템, 심지어는 고대 유적까지. 돈만 있으면 못 구하는 것이 없다고 일컬어지는 곳이었다.
지금 마하임이 길을 잃고 30분째 헤매고 있는 곳이 바로 상업 구역이었다.
한여름의 따가운 햇볕도 오후로 들어서 제법 많이 누그러들었지만, 아직도 덥긴 매한가지.
각종 먹거리와 잡화를 파는 가게들로 가득한 이곳은 오늘 역시 오가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특히 오늘은 그 정도가 심해 물건을 파는 사람과 사려는 사람들이 한데 뒤엉켜, 누가 누구인지조차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리고 이 끝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물결 속…. 그 속에서 마하임은 마치 표류하는 배처럼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고 있었다.
“망할…. 길도 잘 모르는데!”
마하임은 그야말로 멘탈 붕괴 직전이었다. 간만의 휴일을 맞이해 푹 쉬려는 마하임에게 윈디가 특명을 내렸던 것이다.
“여기에 적힌 거 모두 사 온다요. 거부권은 없다요. 졸업하고 싶으면 사 온다요. 알겠다요?”
그렇게 마하임의 때 아닌 ‘던전’ 탐험이 시작되었다. 길은 죄다 비슷비슷하게 생겼고 게다가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이리저리 떠밀리다 보면 어느 사이엔가 이상한 곳으로 흘러들기 일쑤였다.
“드디어 찾았다. 홀리랜스 상회!”
낡아서 흐릿하기는 했지만 분명이 맞은편 골목 저편에 마하임이 그토록 애타게 찾던 홀리랜스 상화 간판이 보였다.
마하임은 윈디가 준 쪽지를 다시금 확인하며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뜩이나 작은 쪽지에 깨알같이 적힌 글귀까지 성가셨지만, 이 미로 같은 시장에서 저길 찾았으니 천만다행이었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홀리랜스 상회 간판 앞에 도착하자 그때서야 그곳의 전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2층인지 1층인지 구별 안 가는 외관은 평범하다 못해 존재감조차 희미했다. 출입구와 간판만 없다면 그냥 벽이라 생각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건물이었다.
“계십니까?”
입구의 허름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나지막한 테이블과 계산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게 안에는 각종 잡화부터 시작해서 각종 농기구, 심지어는 칼과 방패 같은 무기까지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가득 전시되어 있었다.
“네, 나가요~”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자그마한 키의 소녀였다. 짧은 단발머리에 기름때 묻은 앞치마 그리고 장갑까지 꼈지만, 그녀의 귀여움은 지울 수가 없었다.
‘노옴인가.’
그녀의 단정한 갈색 머리칼 사이로 새하얀 뿔이 솟아오른 게 보였다. 일반적으로 노옴 일족은 우락부락한 근육으로 유명했지만, 어릴 땐 생각 이상으로 귀여웠다. 지금 마하임의 앞에 있는 소녀처럼 말이다.
“윈디 교수님이 보냈다고 하면 알 거라 했습니다.”
“아! 그럼 당신이 마하임 님이신가요?”
“그렇습니다만.”
“소문 들었어요. 그 재수 없는 슈라토 가문의 공자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줬다죠? 정말 속이 시원하네요.”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를 보고 있는 마하임조차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웃음이었다.
“제 이름은 안나 홀리랜스예요. 1학년이죠.”
얼굴을 붉히며 말을 잇는 안나. 하지만 마하임의 귀에는 이미 그녀의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정말 안나 홀리랜스입니까?!”
마하임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갑작스러운 마하임의 반응에 안나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안나 홀리랜스. 지금은 그저 무명의 학생에 불과했지만 그녀는 10년 뒤, 황제의 검이라 일컬어지는 ‘엑스칼리버’를 만든 전설적인 장인이었던 것이다.
비록 자신의 일족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제국에 조공으로 받친 물건이었지만, 안나가 만든 마장기는 양산형으로 제작된 마장기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완성도를 지녔다.
미래를 안다는 것은 다시 말해 미래에 활약할 인재를 안다는 말과도 같았다.
마하임은 회귀 직후부터 지금까지 기억나는 대로 반드시 등용해야 할 인재 리스트를 뽑아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 리스트 중 최상위에 그녀의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제 고향에서도 홀리랜스 공방의 명성은 대단하거든요. 앞으로도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학교에서 봐도 모른 척하기 없기입니다.”
“아, 그렇군요. 저 역시 잘 부탁드려요.”
활짝 웃는 안나. 마하임은 잠시 생각하다 자신의 품안에서 반짝이는 금화 하나를 꺼내어 안나에게 건넸다.
“뭐죠? 이건?”
“가지세요. 앞으로 여러 가지 부탁할 것도 많고 해서 잘 부탁한다는 의미에서 드린 겁니다. 굳이 말하자면 계약금 같은 거랄까요?”
“그래도 금액이 너무 큰데….”
지금 마하임이 건넨 금화는 대륙에서 널리 쓰이는 1달란트짜리 금화였다. 1달란트면 보통 성인의 3달 임금에 해당했다.
마하임이 알타베르나로 올 때 비상금으로 꽤 많은 돈을 챙겨왔기에 이 정도는 그리 큰 지출도 아니었다.
“받으세요. 제 성의입니다.”
“그렇다면야 뭐, 헤헷 감사합니다. 다음에 오심 서비스 많이 해 드릴게요.”
안나는 금화를 받아 들고는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순간 마하임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정도의 귀여운 미소였다.
저런 소녀가 대량 살육의 대명사인 마장기를 만드는 장인이라니 믿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