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시…아라?”
마하임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둘의 공격을 가로막은 사람은 다름 아닌 장차 자신의 왕비가 될 시아라였던 것이다.
“본인도 가끔은 외출을 즐깁니다만, 이런 거리에서 천박하게 싸우는 알타베르나의 학생이 있다 하여 이리 온 것이랍니다.”
“왜 막았지! 이건 나의 싸움이다!”
루다크는 목청껏 소리쳤다. 하지만 시아라는 웃기지도 않다는 듯 비웃음을 흘리며 쏘아 말했다.
“저를 웃기시려는 겁니까? 부끄러운 줄 아세요. 시오니아 제국 유수의 가문 자제가, 그것도 알타베르나의 ‘차석’을 차지하신 분이 ‘수석’의 자리를 탐하여 살기를 뿜어내다니, 어처구니가 없어도 유분수지!”
시아라는 말을 이으려다 순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마하임이 시아라의 등 뒤에서 그녀를 와락 껴안은 것이다.
“보고 싶었어. 정말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고….”
마하임은 자신의 앞에 펼쳐진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직도 자신의 품에서 죽어 가던 시아라의 모습이 생생했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마하임 자신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비록 지금의 시아라는 그때보다 훨씬 어렸지만 그런 거야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가 지금 이 자리에, 이 순간에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하임은 신께 감사했다.
“아무리 약혼자라 하지만 무례하군요. 떨어지세요!”
시아라는 당황한 듯 소리쳤다. 하지만 마하임은 그녀를 놓지 않았다. 그녀의 체취, 그녀의 체온 그 하나도 놓치기 싫었다.
마하임의 눈에는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넘쳤다. 너무나 그리웠고 너무나 보고 싶었던 그 얼굴. 지금 이것이 모두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아…. 정말 덩치는 커졌어도 여린 건 그대로군요.”
생각 같아선 힘으로라도 떼어 버리고 싶었지만, 누가 뭐래도 마하임은 그녀의 약혼자였고,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시아라였다.
게다가 마치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고 있는 마하임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그럴 마음도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놔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만.”
마하임의 흐느낌이 조금 잠잠해지자 시아라가 말했다. 마하임은 그제야 겨우 이성을 되찾은 듯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미안, 미안하오.”
“제가 당신에게 하오체를 들어야겠습니까? 존대하시죠?”
“너무 반가워 저도 모르게 그만, 죄송합니다.”
마하임은 얼굴을 붉히며 시아라에 사과했다. 지금 마하임과 시라아의 관계는 약혼한 사이.
하지만 이 약혼은 가문 사이에서 진행된 본인들의 의사와는 관계없는 정략적 약혼이었다.
당시 귀족들 사이에서 정략결혼은 흔한 일이었고, 마하임과 시아라의 사이도 딱 그 정도였다.
이 때문에 당시는 서로에게 거의 관심 없었고 심지어는 그녀가 알타베르나의 학생이었다는 것도 마하임은 몰랐다. 그렇기에 더욱더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그 이야긴 나중에 하죠. 자, 어찌하겠습니까? 루다크 공자님.”
시아라는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루다크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여기서 끝장을 본 뒤, 퇴학을 당해 제국과 당신의 가문에 먹칠하겠습니까? 아니면 이대로 물러서겠습니까? 제 개인적인 소견은 전자가 더 맘에 드는군요. 당신과는 자웅을 꼭 겨루어 보고 싶으니까요.”
옥이 굴러가는 뜻한 또렷한 시아라의 목소리에 루다크는 주먹만 불끈 쥐고 있을 뿐이다.
무신의 후예라 일컬어지는 선술 ‘시현류’의 정통 계승자인 그녀의 무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수업 중 루다크와 시아라가 몇 번 대련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루다크는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이기지 못했다.
발악을 하며 루다크는 시아라에게 덤볐지만 말도 안 될 정도의 압도적인 차이로 루다크는 그녀에게 패배했다.
“운이 좋은 줄 알아라. 다음에는 반드시 죽여 주마.”
멀쩡한 상태로 싸워도 못 이길 상대였다. 게다가 한쪽 팔까지 다친 상태로 싸웠다간 이기기는커녕 망신만 당할 것이 뻔했다.
루다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러고는 난장판이 된 거리를 가로질러 어디론가 사라졌다.
“후우…. 제국 사람들은 어찌 한결같이 저 모양일까요? 한심해서 웃음도 안 나옵니다. 그건 그렇고, 마하임 공자.”
시아라가 마하임을 향해 입을 열었다. 미래의 그녀도 아름다웠지만, 지금의 시아라는 그 이상의 매력이 있었다.
성숙미와 새침한 소녀의 귀여움이 적절히 뒤섞인 듯한 외모. 그리고 그녀의 은은한 갈색의 피부색은 마치 귀한 흑진주와 같은 매력이 있었다.
그리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선명한 검은색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길게 묶은 그녀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신비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야말로 ‘개과천선’하셨더군요. 중간고사 수석에다, 보아하니 키도 상당히 자라신 거 같고.”
마하임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시아라는 그에 대해 평했다. 시아라가 마하임을 마지막 본 것은 지난번 아르케비니아 국왕의 생일 파티에 초청되어 갔을 때 본 것이 고작이었다.
그때의 마하임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았고 왜소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마하임은 키는 물론 하거니와 웬만한 전사는 명함도 못 내밀 만큼 튼튼한 몸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이 기연을 얻어 환골탈태의 경지에 이르렀다 해도 놀라진 않겠습니다. 저희 고향에선 비교적 흔한 일이니까요. 헌데, 우리 가문의 비전 무예는 어찌 알고 계시는지요?”
시아라의 말에 마하임은 순간 뜨끔했다. 아마도 자신이 축지를 사용하는 것을 본 모양이었다.
시현류의 무공은 외부 사람에게는 가르쳐 주지 않는 가문 비전의 무예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아직 외인인 마하임이 이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명백히 문제가 있는 일이었다.
“지난겨울 기연을 만났었죠. 설마 장인어른을 만나 무공을 전수받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물론 거짓말이었다. 장인어른…. 다시 말해 시문을 만난 것은 사실이긴 했지만, 그 만남은 장인의 입장에서 만난 것이 아니라 적으로 만난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그녀의 집안 내력을 아는 마하임이 한 말이었기에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이야기였다.
시아라는 마하임의 말을 듣고선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장인어른이라뇨! 아직 우리는 약혼한 사이에 불과하다고 했었죠?!”
얼굴이 붉히며 소리치는 시아라. 하지만 그런 모습까지도 마하임에게는 너무나 사랑스럽게만 느껴졌다. 마하임은 애써 감정을 숨기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이었다.
“장인어른께서 직접 그리하라 명하셨습니다.”
“하아….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요. 아버님은 어찌하려고 외부인에게 가문 비전의 무공을 가르치셨는지 모르겠네요.”
“외부인이라뇨. 섭섭합니다. 비록 형식적이라곤 하나, 약혼은 약혼입니다. 미래의 사위에게 기술 몇 전수해 준 것이 대수입니까?”
마하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두말할 것 없는 거짓말이었지만, 뭐 어떤가? 굳이 진실만을 말할 필요는 없었다.
시아라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땠다.
“어쩔 수 없죠. 이왕 배운 거 더욱 정진하셔서 달인의 경지에 오르시길.”
시아라는 이 말만을 남기고 아직도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상업 구역 속으로 걸어갔다. 마하임은 그녀를 멈춰 세우려 했지만 그만두었다.
오늘은 그녀와의 첫 만남이었을 뿐, 시아라가 알타베르나의 학생으로 있는 한 앞으로도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괜한 무리수로 나쁜 인식을 심어 줄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마하임 역시도 상업 구역의 미로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마하임이 이곳 알타베르나에 온 것도 벌써 4달이 지났다.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된 모양인지 이른 아침인 지금도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구구구-
여느 때처럼 날아온 비둘기 한 마리. 윈드시크릿과의 연락은 이제 전서구를 통해 한 주에 한 번 정도 연락을 받고 있었다.
윈드시크릿의 재건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거의 막바지에 다다라 있다고 하륜은 보고했다.
최근에는 시오니아 제국이 점령한 국가에서 피난민이 몰려와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했다.
“예상대로라고 해야 하나?”
지금 이 무렵의 시오니아 제국은 영토 확장을 위해 주변 국가를 닥치는 대로 공격하고 있었다. 그로 인한 피난민들이 이웃 국가로 몰려들고 있었다.
대륙 대부분의 국가들이 기근으로 인해 자국민들도 못 챙기는 마당에 피난민을 반길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피난민들은 사실상 죽음만을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영주님의 말씀대로 피난민을 적극 수용하고 있습니다. 무리해서 자금을 확보한 보람이 있군요. 그럼 다음 단계로 넘어가겠습니다.’
다음 단계란 드디어 사탕무를 재배할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했다.
결과를 보려면 1년 이상은 더 걸리겠지만, 사탕무를 대량 재배해 기존의 상거래 질서를 재편한다. 그것이 마하임의 궁극적 목표였다.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
하륜의 편지는 허공에서 불타올라 사라졌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윈드시크릿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이제는 윈디의 협박이 문제가 아니었다. 대륙 최고의 마장기 장인이 될 안나에 대한 문제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약혼녀 시아라가 알타베르나에 있는 이상 그녀를 확보하기 전에는 이곳을 떠날 순 없었다.
“서두를 필요는 없어. 아직 시간은 있다.”
마하임은 애써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고 몸을 일으켰다. 엘케인의 닦달로 일찌감치 아침밥을 먹은 그는 곧장 알타베르나로 향했다.
윈디의 저택에서 알타베르나까지는 빠른 걸음으로는 1시간, 전력 질주를 한다 할지라도 20분 이상 걸리는 먼 거리였다.
이 때문에 윈디는 마차를 마련해 준다고 했지만, 마하임은 거부했다. 매일 아침 이렇게 달리는 것 역시 하나의 ‘수련’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 모든 무술의 기본은 바로 기초 체력. 그리고 그 기초 체력을 가장 확실하게 길러 주는 것이 바로 달리기였던 것이다.
그것을 잘 아는 마하임이였기에 그는 달리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훅훅. 하아. 허억.”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오늘도 마하임은 달리고 있었다. 지금 위치는 알타베르나의 새하얀 본관, 탑이 얼마 남지 않은 지점. 마하임은 이미 땀으로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교복 상의는 어깨에 걸치고 있어 젖지는 않았지만, 겉에 입고 있는 티셔츠 하며 속옷까지 모조리 젖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앗! 저기 좀 봐! 마하임 님이야.”
“어디 어디? 와~ 정말이잖아.”
마하임이 알타베르나 본관으로 향하는 대로에 이르자 근처에 있던 알타베르나의 여학생들의 탄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얼마 전 루다크와 일전을 벌인 이후 마하임은 유명인 아닌 유명인이 되어 버렸다.
루다크는 이 일로 때문에 정학까지 당했고, 마하임은 안나를 지켜 주었다는 이유로 학장의 표창까지 받았던 것이다.
가뜩이나 마하임을 좋게 보지 않던 학장이었기에 마하임에게 표창장을 건네는 그의 얼굴은 한마디로 똥 씹은 표정, 그것이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마하임의 인기는 그야말로 상한가를 쳤다.
중간고사 수석에다, 그 무력은 악명 높은 루다크와 막상막하.
근육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에 갸름한 턱선이 인상적인 얼굴은 뭇 소녀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귀찮군.”
마하임은 결코 유명인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괜한 관심 집중은 오히려 마하임에게 있어 방해였다. 게다가 지금 마하임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오늘은 만날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루다크와의 일전 후 시아라는 집안일 때문에 결석계를 내고 급히 고향으로 내려갔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가 돌아오는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어쩌면 이미 학교에 있을지도 몰랐다.
“자 그럼 가 볼까? 첫 수업이, 어디 보자. 인류역사학이군. 아, 그 교수 싫은데.”
이렇게 중얼거리며 마하임은 알타베르나의 본관으로 향했다. 마하임이 사라질 때까지 주위의 사람들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마하임이 사라지자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 소리. 이를 본 남학생들은 그저 씁쓸한 마음을 지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를 질투할 만한 레벨도 아니었던지라 그들 역시 묵묵히 학교로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