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알타베르나의 수업은 지루했다.
사실 수업은 그저 길을 알려 주는 것뿐, 알타베르나의 교육 방식은 학생 스스로 그 길을 개척해 나가야만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수업은 교수의 원맨쇼에 가까웠다. 물론 까칠한 몇몇 학생들이 질문 공세를 펼칠 때도 있었지만, 알타베르나의 교수진들은 유능했기에 망신을 당하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인류는 지구를 떠나 이곳 ‘시노쿠’로 대이주를 하게 됩니다.”
그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이 별에는 유사 인간도 꽤 됐지만, 대부분의 지적 생명체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 인간들의 고향은 이 별이 아닌 ‘지구’였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일이었다.
하지만 왜 지구를 버리고 이 세계로 이주한 것인지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했다.
“교수님, 그럼 인류를 지구에서 이주하게 만든 그 외계 지적 생명체는 지금은 찾아볼 수 없나요?”
짧은 단발의 남자 엘프의 갑작스러운 질문. 교수는 쓰고 있던 안경을 고쳐 쓰며 물끄러미 질문을 한 엘프를 바라보았다.
인류가 이곳으로 이주한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이 교수의 주장은 다름 아닌 외계 지적 생명체의 지구 침략이었다.
“우문이군요. 만약 그 외계 지적 생명체가 인류를 쫓아왔다면 인류가 이곳에 정착할 수 있었을까요?”
교수의 말에 엘프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자리에 다시 앉았다. 고대 인류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과학 문명을 지니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런 과학 문명으로도 어쩌지 못한 외계 지적 생명체가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면, 아무도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다시 이어지는 교수의 강의. 마하임은 하품이 나오는 것을 애써 참으며 턱에 손을 괴었다.
‘시아라는 지금쯤이면 군사학을 듣고 있겠군.’
알타베르나의 학생들은 문과와 무과 크게 둘로 나뉘어졌다. 마하임은 문과 계열이었고 시아라는 무과 계열이었기에 수업이 겹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마하임은 이런 수업을 듣고 있자니 답답할 뿐이었다. 지금 마하임의 급선무는 시아라와 어떻게 하면 가까워 질 수 있을까가 가장 큰 문제였던 것이다.
지금 마하임과 시아라의 접점은 둘의 부모님이 일방적으로 맺은 약혼이 전부였다.
미래의 기억대로라면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시아라는 자신에게 합류는 하겠지만, 그때까지 기다리면 너무 늦다.
제국의 침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가장 먼저 시아라의 가문부터 멸문당할 테니 말이다.
“에~ 마이크 테스트. 음 됐나?”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 그것은 다름 아닌 윈디 교수의 목소리였다.
“제군들 안녕하다요? 힘세고 강한 아침, 만일 누가 내게 물어보면 나는 윈디.”
어순을 완전히 파괴하다 못해 기괴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윈디의 말투는 엉망이었다.
평소에도 이상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오늘은 그 정도가 더 심한 것 같았다.
그녀의 말을 들은 학생들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 억누르며 힘겹게 윈디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 교실의 정면 칠판이 있는 곳에는 푸르스름한 화면의 입체 영상이 두둥실 떠 있었다. 그리고 그 영상에는 윈디의 모습이 커다랗게 잡혀 있었다.
언뜻 보면 마법이나 그런 이능의 힘 같았지만, 저 영상은 ‘과학’의 힘으로 만들어진 고대 인류 문명의 잔재였다.
제조법 같은 것은 오래전 소실되었지만, 유적을 조금만 뒤지다 보면 쉽게 발견할 수 있었기에 돈만 주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그런 물건이었다.
“모두 알다시피, 내일부터 축제다요. 그리고 이 축제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무투회의 예선이 오늘부터 열린다요.”
그건 마하임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며칠 전부터 알타베르나의 학생들이 축제 준비를 한다고 여념이 없었으니까.
단지 마하임은 이런 축제에 전혀 관심 없어 신경을 끄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알타베르나에는 1년에 단 한 번 여름이 시작될 즈음 ‘알타베르나의 여름’이라는 이름의 축제를 연다.
알타베르나의 학생들이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외부 손님에게 선보인다든지, 소소한 이벤트나 연극 같은 것으로 힘들고 지친 학생들을 위로하고자 하는 그런 취지의 행사였다.
“그런데 말이다요. 이번 무투회의 참가자가 너무 적다요. 윈디 정말 실망이다요. 그래서 특단의 결정을 내렸다요.”
잠시 말을 끊는 윈디. 강의실 안은 학생들은 물론하며 교수까지 숨을 죽였다.
“이번 무투회에 최종 승자에게는 100달란트의 부상과 함께 우리 알타베르나의 공식 퀸인 시아라 랭커스터 양과 데이트할 기회를 제공하기로 했다요!”
“우오오오오!”
교실에 있던 남자 학생들은 일제히 괴성을 지르며 환호했다. 시아라는 외모는 외모이거니와 시현류의 무예를 계승하는 일당백의 전사였던 것이다.
그녀와 어떻게든 관계를 맺어 보려 하는 귀족 가문은 지금도 수십 군데가 넘었다.
“윈디 님, 이의 있습니다! 시아라 본인과 어떻게 이야기가 됐는지 몰라도 이건 명백히 여성을 상품화시키는 이해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대륙 최고의 지성이 모이는 이 알타베르나에서 이런 성 상품화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교실 앞자리에 앉아 있던 엘프 여학생 한 명이 일어나 윈디에게 말했다.
그야말로 반론이 불가능할 만큼의 정론이었다. 그 말을 들은 다른 여학생들도 이에 동조하며 당장 집어 치우라며 야유를 보냈다.
이를 지그시 바라보던 윈디는 예상했다는 표정으로 손을 앞으로 내밀어 여학생들을 진정시킨다.
“자자, 진정하라요. 여학생들의 항의가 있을지 내 이미 알고 있었다요. 그래서 말이다요. 만약 여학생이 우승하면, 우리 알타베르나의 떠오르는 다크호스 마하임 폰 잉그램 군과 데이트할 수 있는 특권을 주겠다요!”
마하임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자신 역시 시아라와 마찬가지로 무투회의 상품이 된 것이다.
“캬아아아-!”
“윈디 님 최고!”
“반드시 우승하고 말겠어!”
남학생들은 침묵했고, 여학생은 환호의 비명을 질러 댔다. 도도하게 앉아 있던 자존심 강한 여성 엘프들도 이번에는 빠지지 않았다.
“자, 어서 신청한다요. 오늘이 신청 마지막 날이다요.”
“와아아아-!”
학생들의 함성 소리가 순간 강의실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수업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도 학생들은 밖으로 우르르 몰려 나갔다.
필시 대회참가 신청을 하러 간 것이리라.
순식간에 텅 비어 버린 강의실. 그곳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반쯤 넋이 나간 듯한 얼굴의 마하임과 교수 둘뿐이었다.
* * *
같은 시각 알타베르나의 학장실.
그곳에는 정학 중인 루다크가 오늘도 반성문을 쓰고 있었다. 바로 그 와중에 학장실에도 윈디의 입체 영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 썩을 마녀! 이번엔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야?!”
‘알타베르나의 여름’은 수백 년간 이어온 알타베르나 최대의 자랑이었다.
그러한 축제를 이런 어처구니없는 짓으로 변질시키다니 학장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크큭, 크하하하하하!”
반성문을 쓰던 루다크가 갑자기 미친 듯 광소했다. 학장은 갑자기 이 미친놈이 또 왜 이러나 하는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
“지금 웃음이 나오느냐? 네놈이 제국의 차대 제일검(第一劍)이라니, 믿을 수가 없구나!”
학장은 목소리를 높였다. 루다크가 수석을 하지 못하는 바람에 그의 ‘인생 역전’의 꿈은 한순간 무너졌다.
슈라토 가문에서는 기회를 다시 준다고 했지만, 그의 망가진 자존심은 회복할 길이 없었다.
이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다크는 여전히 광소를 할 뿐이었다.
“이 애송이 놈! 그만 웃지 못할까!”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학장은 루다크의 멱살을 붙잡았다. 그러자 루다크는 갑자기 광소를 그치고 학장을 매섭게 쏘아봤다.
“이 손 놓으시죠? 요즘 애송인 한 성질 하거든요.”
날카로운 살기를 뿜어내는 루다크,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화를 불렀다.
“그래, 너 말 잘했다. 그 애송이가 커서 된 게 바로 나다, 이놈아!”
그리고 학장은 자신이 지팡이로 쓰고 있던 나무막대로 루다크를 무차별 구타하기 시작했다.
지금 루다크는 지난 사건을 일으킨 벌로서 암흑투기를 봉인당한 상태인지라 마땅히 방어할 방법도 없었다.
하지만 워낙 덩치도 있고 맷집도 좋아 학장의 지팡이는 얼마 가지 못해 부러지고 말았다. 학장은 그제야 겨우 구타를 멈췄다.
“좋아. 이것도 기회라면 기회다. 암흑투기의 봉인을 풀어 주마. 무투회에서 우승해라. 그럼 네 정학도 없던 걸로 해 주마.”
“나 역시 바라는 바다. 이번에는 반드시 죽여주마. 마하임!”
“이 썩을 놈아. 2학년이면서 아직 무투회 규칙도 모르느냐? 죽이면 우승을 못 하지 않느냐! 너 같은 놈을 돈 몇 푼에 눈이 멀어 제자로 받아들이다니! 어휴 답답해! 이번에 우승 못 하면 넌 퇴학이야.”
이 말만을 남기고 학장은 방을 떠났다. 루다크는 말없이 그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 수모는 반드시 갚아 주겠다. 반드시!”
* * *
그로부터 1시간 뒤, 알타베르나 내에 위치한 윈디의 집무실.
지금 그곳에는 이번 무투회의 우승 상품이 되어 버린 두 사람이 거칠게 윈디에게 항의를 하고 있었다.
“교수님,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언질 한 번 없이 이런 일을 벌이 시다뇨. 정말 너무하십니다. 저를 모욕이라도 하실 작정이시십니까?”
마하임이야 이미 반쯤 포기한 상태였지만, 시아라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 하지만 윈디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입을 연다.
“이것도 다 공부다요. 인생 공부가 별거 있다요? 산전수전 겪다 보면 인생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요.”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윈디 님한테는 그런 말 듣기 싫군요. 애초에 당신은 인간조차도 아니잖습니까?”
시아라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외쳤다. 이를 지켜보던 마하임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이신 겁니까?”
“글쎄다요? 무슨 생각일까나?”
딴청을 피우는 윈디. 하지만 마하임은 이미 한두 번 당한 일도 아닌지라 그저 무덤덤할 뿐이었다.
그런 마하임과 시아라를 향해 윈디가 입을 열었다.
“들어라요. 나의 제자들. 가끔은 타인의 꿈도 헤아려 주길 바란다요.”
갑자기 분위기가 바뀐 윈디. 그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
“지금 너희를 사모하는 학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는 있다요? 비록 부질없는 꿈이겠지만, 그 꿈을 꿀 때만큼은 행복하다요.”
윈디는 살며시 날아올라 마하임과 시아라 앞에 멈춰 섰다.
“물론 너희보고 꼭 데이트를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요. 싫으면 너희도 직접 참여해서 무투회를 즐기면 된다요. 너희 머릿속이 복잡한 것 나도 안다요. 허나 즐길 땐 즐겨라요. 지나치게 팽팽한 줄은 결국 끊어질 수밖에 없는 것을 어찌 모른다요.”
윈디의 말을 들은 마하임과 시아라는 그녀의 말에 설득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시아라는 윈디를 향해 무거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윈디 님. 이번 한 번만은 그냥 넘어가 드리죠. 소녀 이번 무투회에 참여하여 ‘시현류의 유도 유선술’의 기상을 떨쳐 보이겠습니다.”
시아라는 윈디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동방의 인사법, 포권(包拳)으로 예를 표했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윈디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문밖으로 사라지자 마하임은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저도 참여하겠습니다.”
“어차피 네 약혼녀다요. 이번 기회에 호감도라도 올려 보라요.”
“시아라가 제 약혼녀란 것은 또 어떻게 아셨습니까?”
“비밀이다요.”
윈디는 이렇게 말하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마하임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윈디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런 것은 별로 중요치 않았다.
이미 무투회 참여는 피할 수 없는 일. 그렇다면 최대한 이 무투회를 이용하여 시아라와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인가? 뭐 할 수 없지.”
결심을 굳힌 마하임은 곧장 무투회 참가 신청을 하기 위해 집무실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