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그 무렵 알타베르나 본관 1층.
지금 그곳에도 나름 심란한 마음으로 일이 손에 안 잡히는 사람, 아니 노옴이 한 명 있었으니 그녀는 다름 아닌 홀리랜스 상회의 오너 안나였다.
“하아….”
땅이 꺼져라 한숨을 연달아 쉬는 그녀. 안나는 지금 알타베르나 유일의 승강기 ‘엘리’의 정기 점검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영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녀는 소위 근로 장학생으로서 자신의 고대 유적에 대한 탁월한 지식을 바탕으로 알타베르나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고대 유적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알타베르나에서의 수업료 전액을 면제받았다. 거기다 잡화점 홀리랜스도 운영하고 있었기에 혼자 생활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 갑자기 큰 문제가 생겨버리고 말았다.
“저기, 안나 양. 어디 아픈가요? 적외선 센서로 보니 열은 없는 듯한데, 그럼 심리적인 문제?”
“…….”
평소라면 엘리와 함께 신나게 떠들며 수다를 떨었겠지만, 오늘은 그저 침묵만을 지키는 안나였다. 그러자 엘리 군은 답답한 듯 계속 말을 걸었다.
“계속 혼자만 그렇게 앓고 있으면 병이 된답니다. 저 엘리에게 속 시원하게 털어놔 보세요. 아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이야기도 있잖아요? 제가 힘닿는 데까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저기, 비밀 지켜줄래?”
그때야 겨우 입을 여는 안나. 엘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물론이죠. 상담에 비밀 엄수는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말씀해 보세요. 무슨 고민인가요?”
“그게 말이야. 실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 버렸어….”
“오오오! 드디어 안나 님에게도 ‘마법의 가을’이 찾아온 건가요? 말씀해 보세요. 그분이 누굽니까?”
“그게 저기 그러니까. 마하임….”
말을 얼버무리는 안나, 이 말을 들은 엘리는 혹시나 해서 되물었다.
“저기 말이죠. 안나 님이 말씀하신 그분이 혹시 마하임 폰 잉그램이라는 그분이 맞나요?”
“으, 으응.”
“…….”
안나의 대답에 엘리 군은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마하임에 대해서는 엘리 역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하였기에 더욱더 다음 말을 꺼내는 데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저기, 너무 허들이 높은 거 아닌가요? 지금 마하임 님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다 못해 하늘을 고사(枯死)시킬 수준인데 말이죠.”
“그러니까 말야. 그게 문제라고.”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의 안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며칠 전, 자신이 운영하는 잡화점에서 처음 마하임을 만난 그녀는 첫눈에 마하임에게 반해 버리고 만 것이다.
지금도 자신의 앞을 떡하니 가로막고서 안나 자신을 지켜 주던 마하임의 믿음직한 등이 기억에 선명했다.
최근에는 잠조차 제대로 못 잘 정도였으니 그 증상이 나날이 심각해져 갔다.
"큰일이군요. 일단 안나 님 정도의 외모라면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지만, 문제는 경쟁자가 너무 많다는 것이죠. 당장 알타베르나 공인 퀸이라 할 수 있는 시아라조차 무려 마하임 님의 약혼녀니 말이에요."
물론 시아라가 마하임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을 엘리도 알고 있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알타베르나에서는 마하임을 노리고 있는 여학생이 넘쳐났다.
그 수많은 경쟁을 뚫어내야 겨우 마하임에게 다가갈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끝판 보스가 따로 없었다.
“어쩌면 좋을까? 엘리 군. 이번에 도와주면 천연 오일이랑 새로 구한 CPU로 싹 업그레이드해 줄게. 제발 좀 도와주라, 응?”
“흠, 저도 도와드리고 싶지만, 난이도가 너무 높은데요. 이건 ‘하드코어’를 넘어서는 ‘베리 하드코어’ 난이도라고요.”
엘리의 말에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안나. 예상은 했지만, 그 벽에 다시 한번 부딪히니 정말 울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안나 님 딱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합니다.”
“뭔데? 뭔데?”
안나는 반색을 하며 엘리에게 물었다. 엘리는 조금 머뭇거리나 싶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자고로 용기 있는 사람이 사랑을 쟁취하는 법, 이번 무투회에서 여학생이 우승하면 상품이 뭐죠?”
“그건 100달란트…와 데이트.”
그렇다. 이번 무투회에서 우승만 할 수 있다면 마하임과 데이트를 할 수 있었다. 그 데이트에서 마하임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만 있다면 그와 사귀는 것도 꿈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떻게 우승을 하지? 나는 싸움 못하는걸.”
그녀가 애초에 무투회를 관심사 밖으로 둔 이유는 그녀가 운동이라면 100미터 달리기조차 제대로 못 하는 몸치라는 점이었다.
그렇기에 안나에게 있어 무투회란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그런 행사였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안나 님. 지난번 유적에서 구한 파워드 슈트, 아니 탑승형 마장기가 있잖습니까?”
“하지만 그건 제어 장치가 망가진 거라….”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안나 님은 마장기에 탑승만 하시면 됩니다. 지금은 그저 승강기를 움직일 뿐인 AI이지만 저의 원래 용도는 전투용 파워드 슈트의 전술 지원용 AI. 저와 안나 님이 힘을 합치면 우승도 꿈은 아닙니다!”
신이 난 엘리는 그야말로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냈다. 사실 수백 년 동안 이놈의 엘리베이터에 얽매여 살다 보니 답답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던 엘리였다.
이번 기회를 잘만 이용하면 화려한 외출을 할 수 있다는 기대에 적극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근데 들키지 않을까? 마장기를 타고 출전하지 말라는 규칙은 없지만, 문제가 생길 것 같은데.”
“그건 걱정하세요. 탑승용 마장기는 겉보기엔 그냥 갑옷 같아 보일 테니까요.”
안나는 엘리의 말에 고심에 빠졌다. 엘리의 말처럼 안나가 이번에 발굴한 마장기는 일반 마장기와는 여러모로 많은 차이점이 있었다.
특히 그 크기가 매우 작아서 얼핏 보면 풀 플레이트 메일로 착각할 정도였다.
무투회에서 갑옷을 입지 말라는 규칙은 없었기에 갑옷이라고 우기고 참여하면 충분히 속일 수 있을 터였다.
“망설일 시간 같은 것은 없습니다. 안나 님. 오늘 오후부터 예선입니다. 서둘러야 출전이 가능할 거예요.”
“하아, 나도 모르겠다. 까짓거 해 보지 뭐. 일단 엘리 군의 코어부터 떼어낼 태니 좀 아프더라도 참아.”
“넵, 시간이 없습니다. 서둘러 주세요.”
안나는 들뜬 얼굴로 장비를 세팅했다. 그리하여 알타베르나 역사상 유례없는 치열한 무투회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 *
이곳은 무투회 예선이 펼쳐지고 있는 알타베르나 최상층 ‘아침의 영광’ 광장의 입구였다.
이미 수업이 다 끝난 늦은 오후인데도 이곳은 모여든 학생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의 목표는 오직 하나, 내일 있을 무투회 본선에 진출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최종 목적은 우승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이 우승하려는 이유는 저마다 가지각색이었지만, 그중 가장 비중이 높은 것은 역시 데이트였다.
여기 학생 대부분은 귀족인지라 100달란트의 부상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했다.
사실 그들에게 있어 큰 돈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또 다른 부상 데이트는 이야기가 달랐다.
그 데이트라 함은, 이미 윈디가 밝혔듯이 마하임, 혹은 시아라와의 데이트를 뜻했다.
시아라야 이미 오래전부터 알타베르나를 대표하는 미녀였고, 게다가 유서 깊은 명문가의 후계자였기에 당연하게 여길지 모르겠으나, 마하임은 좀 의외의 인물이었다.
그야말로 혜성처럼 나타난 신인. 그는 1학기 때는 학내에서 조금도 알려지지 못한 소위 듣보잡이었다. 그런 그가 중간고사에서 대학 역사상 처음으로 만점을 받은 것이다.
거기다 수려한 외모와 뛰어난 마법 실력이 겸해지자 시아라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인물로 성장했다.
“웬 사람이 이렇게 많죠?”
“그렇군요. 시아라 님과 데이트하고자 하는 사람이 정말 많은가 봅니다.”
마치 즐기듯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는 시아라를 보자 마하임은 저도 모르게 발끈해 말했다. 그러자 시아라는 피식 웃으며 반문했다.
“훗, 그럼 마하임 님은요? 저기 엘프들 좀 보시죠. 무력도 보잘것없는데 단체 참석을 했군요.”
그 엘프들 중에서는 남자가 더 많다는 것이 함정이었지만 말이다.
그야 어쨌든 마하임과 시아라는 서로에게 날이 선 대사를 주고받으면서 걸어가고 있다.
둘이 걸어가자 주변은 마치 구약 성경의 모세가 홍해 바다를 가른 것처럼 사람들의 물결이 좌우로 갈라졌다.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과 같은 풍경이었다.
“무투회 예선 신청을 하러 왔습니다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무투회 예선 신청장에 도착한 마하임과 시아라는 신청 담당자에게 말했다. 담당자는 갑자기 엄청난 거물이 연이어 나타나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저기. 두 분은 이번 대회의 중요 게스트여서 참석이 어려울….”
그는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사실 이번 대회의 포상품이 대회에 참석한다니,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마하임은 다가가서 신청 담당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윈디 님께 이미 허락은 받았습니다. 우리도 참가합니다.”
대회장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야말로 이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회 우승의 ‘포상품’이 대회에 참여하다니, 원래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규칙은 윈디에 의해 너무나 간단히 무너져 버렸다.
“바라던 바다. 너희 둘이 빠져버리면 무투회가 너무 시시해질 것 같았는데 잘됐군.”
그때 들려온 목소리. 그는 다름 아닌 루다크였다. 그는 예의 암흑투기를 뿜어내며 마하임과 시아라가 있는 곳에 다가왔다.
“그쪽은 정학 중인 걸로 알고 있었는데 말이죠.”
시아라는 루다크의 암흑투기와 비교해도 전혀 꿇리지 않는, 아니 그를 압도할 만큼의 투기를 뿜어내며 루다크를 향해 말했다.
“무투회를 한정해서 정학이 풀렸다. 우승하면 정학을 풀어 준다는 조건까지 붙어 있지. 네게 당한 수모 반드시 갚아 주마.”
“훗, 기대하겠습니다. 루다크 공자.”
시아라는 가소롭다는 듯 미소를 흘렸다. 루다크는 뭐라 말도 못 하고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시아라와 마하임을 번갈아 노려보다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급썰렁해진 예선장, 마하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희 예선은 언제 시작하죠?”
마하임의 말을 들은 접수 담당은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바, 방금 윈디 님께 연락받았습니다. 두 분이라면 바로 본선 진출시키라고 말이죠. 내일 아침 이곳에 오셔서 본선에 참여하시면 됩니다.”
가볍게 몸이라도 풀 수 있을 줄 알았던 마하임은 내심 실망했다. 하지만 윈디의 명령을 거스를 생각은 없었다.
“그럼 내일 오면 되겠군요. 수고하시길.”
시아라는 이렇게 말하고선 휙 돌아서 출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로 그때다.
“저기 시아라 님.”
“뭐죠? 마하임 님.”
“잠시 시간 좀 내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마하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를 갖춰 시아라를 향해 말했다. 그러나 시아라에게서 돌아온 답변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이야기는 무투회에서 우승한 다음에 하시죠.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뭐라 반박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깔끔한 거절. 마하임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마하임이 무투회에서 반드시 우승해야 할 동기가 생겨 버렸다.
멀리 서쪽으로 늦은 오후의 희미한 노을이 아른거렸다. 내일 역시 알타베르나의 하늘은 맑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