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오늘은 알타베르나의 여름이 시작되는 개막일.
이른 아침부터 거리는 이 유서 깊은 축제를 보기 위해 인근 마을과 타국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무엇보다도 오늘만큼은 평소에 외부인에게 개방되지 않는 알타베르나의 본관 결계가 해제되는 날이기도 했다.
그래서 누구나 이곳 알타베르나 본관 안에 들어와 자유롭게 구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축제는 그게 좀 어렵게 됐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대륙 유일의 대제국 시오니아 제국 황제 직속 경호병 ‘엠페러 가드’들이 중장갑옷으로 완전 무장한 채 알타베르나 본관 곳곳에 빈틈없이 배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엠페러 가드가 왜 여기 있지?”
엠페러 가드를 본 마하임은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다시 한번 살폈다. 엠페러 가드들은 알타베르나 정문부터 시작하여 각각의 출구마다 빼곡히 서 있었다.
‘황제가 온 것인가?’
제국의 황제가 이곳 알타베르나를 졸업했다는, 정확히는 윈디의 제자였다는 것은 마하임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큰 축제를 앞두고 한 번쯤 찾아오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일단 윈디 님부터 만나 봐야겠군.”
마하임은 곧장 알타베르나에 있는 윈디의 집무실로 향했다. 가는 길에 몇몇 엠페러 가드와 마주쳤지만, 마하임이 알타베르나의 학생인 것을 확인한 엠페러 가드는 별말 없이 마하임을 보내 주었다.
하지만 윈디의 집무실 앞에서는 달랐다.
“멈춰라! 지금 이곳은 접근 금지구역이다. 무단 접근 시 척살하겠다.”
윈디의 집무실 앞에는 무려 6명의 엠페러 가드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마하임을 보자마자 창을 치켜들며 말했다.
불길한 예감에 마하임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엠페러 가드가 무려 6명이나 윈디의 방을 지키다니….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들여보내라요. 내 제자다요.”
그때 문 안쪽에서 들려온 윈디의 목소리였다. 그 소리의 크기를 볼 때 ‘확성기’라는 고대 유적을 사용한 거 같았다.
이 소리를 들은 엠페러 가드들은 군말 없이 마하임이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터주었다.
“어서 오라요. 마하임.”
문 안으로 들어가자 언제나 그렇듯 윈디는 반갑게 마하임을 맞아 주었다. 평소라면 혼자 있을 때가 대부분인 그녀였지만 오늘은 누군가 한 명이 더 있었다.
“소개하지, 이쪽은 내 친구이자 제자인 시오니아 제국의 황제 ‘신시아 라오니오스 2세’다요.”
“…….”
순간 마하임은 할 말을 잃었다.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제국의 황제는 마하임이 알던 그 황제 아니었다.
성별도 달랐고, 심지어는 이름조차 달랐다. 마하임은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뭐 하고 있다요? 인사하라요.”
“아, 실례했습니다. 마하임 폰 잉그램입니다….”
겨우 정신을 수습한 마하임은 엉거주춤하게 인사했다. 그런 마하임을 빤히 바라보는 황제. 마하임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야기 많이 들었다. 우리 루다크를 귀여워해 줬다고. 잘했다. 걘 혼이 좀 나야 할 필요가 있었지.”
그녀는 손에 쥔 부채로 입을 가리며 소리 없이 웃었다.
마하임은 혼란스러웠다. 그가 알던 그 미래의 황제는 분명 남자였다.
그런데 지금 이 시간대의 황제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던 것이다. 그것도 이제 막 유년기를 벗어난 듯한 아담한 키의 소녀….
얼굴은 창이 긴 모자와 두건으로 가려져 대부분 보이지 않았지만, 형태나 윤곽으로 볼 때 충분히 귀엽다고 생각될 만큼의 외모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검은색과 하얀색이 적절한 조화를 이룬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머리에는 제국 황제의 상징, 월계관(月桂冠)이 씌워져 있었다.
두말할 것 없이 그녀는 시오니아 제국의 현 황제였다.
“그럼 전 먼저 대회장에 가 있겠습니다, 스승님. 그리고 마하임이라 했던가? 뛰어난 마법 전사란 소문이 자자하던데 오늘 기대하겠다.”
“아,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마하임은 복잡한 마음을 애써 숨기고는 허리를 숙였다. 황제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소리 없이 방 안을 나갔다.
황제가 사라지자 마하임은 반사적으로 윈디를 향해 입을 열었다.
“교수님.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제가 기억하기로는 분명 황제는 남자였습니다. 혹시 반란이 일어나 황제가 바뀐 건가요?”
마하임 말을 듣고선 윈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그의 코 바로 앞까지 날아와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다요? 애초에 제국의 황제는 처음부터 여황제였다요.”
“…….”
마하임은 입을 닫았다. 적어도 윈디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자신이 미래에서 회귀했다고 설명할 수도 없었다.
굳은 듯 서 있는 마하임을 바라보던 윈디는 마하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물론 네가 있었던 ‘세계’의 황제는 남자일 수도 있을 것이다요.”
“그, 그걸 어떻게?!!!”
마하임은 화들짝 놀라 말했다. 그러자 윈디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건 때가 되면 알 수 있을 것이다요. 지금 알려 줄 수 있는 건 이것뿐이다요. 여긴 네가 알고 있는 그 세계와 ‘한없이 가깝고도 한없이 먼’…. 바로 그런 곳이다요.”
“…….”
마하임은 침묵했다. 윈디의 수수께끼와 같은 말은 무엇을 뜻하는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고, 머릿속은 한없이 복잡하기만 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어떻게 이런 일이!’
황제가, 그 증오스러운 황제 ‘이틀러’가 이 세계에는 없었다.
그럼 마하임은 그 누구에게 복수해야 한단 말인가?!
사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복수라니. 그것 또한 웃긴 일이었지만, 갑자기 목표가 사라지자 마하임은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아직도 복수를 생각한다요? 복수란 부질없는 것. 하물며 이 세계에서는 그 복수할 대상마저도 불분명할 것이다요.”
윈디는 그렇게 말하고 품속에 있던 곰방대를 꺼냈다. 그녀가 곰방대를 입에 가져다 대자 새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솟아올랐다.
“윈디 님 그럼 전 어떻게 해야 하죠? 제가 알던 것들은 다 뭐라는 말입니까?!”
마하임은 터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단숨에 마하임이 믿고 있었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건 걱정 마라요. 역사의 흐름은 네가 알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요.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역사의 흐름도 그리 흐를 것이니, 제국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요.”
잠시 말을 멈춘 윈디는 마하임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넌 지금 너무 숲만 보려고 하고 있다요. 때론 나무에 집중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요.”
“나무….”
마하임은 반문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대략의 감은 잡을 수 있었지만, 이를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지금 마하임의 머릿속은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그러자 윈디는 마하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조용히, 하지만 알 수 없는 힘이 가득 담긴 언어로 말했다.
“네가 알고 있는 그 미래는 버려 두라요. 그것은 이미 죽은 미래다요. 오직 ‘현재’에 집중하라요. 지금 숲은 중요치 않다요. 눈앞의 나무, 눈앞의 현실. 그것에 답이 있다요.”
“현재….”
마하임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이곳은 마하임의 기억 속 미래와 뭔가 심하게 어긋나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시아라가 이 학교에 있는 것도 좀 이상한 일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이곳은 적어도 마하임이 알던 그 과거가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알겠습니다. 지금은…. 눈앞의 나무. 무투회에만 집중하겠습니다.”
“그래, 그래야 내 제자답다요. 그럼 무운을 빈다요.”
윈디는 자신의 앙증맞은 손으로 마하임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마하임은 가볍게 인사하고 방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마하임은 여전히 혼란스럽고 답답한 마음을 금할 길은 없었다. 그러나 윈디의 말처럼 지금은 숲을 볼 때가 아니라 나무를 볼 때였다.
복수도, 미래를 바꾸는 것도 다 좋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시아라의 마음을 마하임 자신에게로 돌리는 것이었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그 무엇도 시작할 수 없을 것이다.
“하아…. 쉬운 일이 없구나, 정말.”
긴 한숨을 내쉰 마하임은 무투회가 열리는 알타베르나 본관 최상층으로 향했다. 더 이상의 생각은 무의미했다. 바야흐로 알타베르나의 축제가 시작되었다.
* * *
알타베르나 본관 최상층, 다시 말해 옥상에는 ‘아침의 영광’이라 불리는 거대한 원형 경기장이 들어서 있었다.
이 경기장은 석조로 건축되어 있었는데 총 527m의 타원형 외벽에, 높이 48m로 총 4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내부는 약 5만 명을 수용하는 계단식 관람석이 방사상(放射狀)으로 설치되어 있어, 어느 위치에서라도 관객들이 경기를 원활하게 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그 규모만 따진다면 단일 경기장으로서는 제국의 엠페러 홀 다음으로 큰 건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입장 불가합니다. 자리 없어요! 들어오실 수 없다니까!”
“비싸게 암표까지 구해서 왔는데 자리가 없다니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이봐요. 무투회 입장은 원래 공짜입니다. 어디서 사기를 당하고 오셨는지는 몰라도 저리 가세요!”
넘쳐나는 사람들의 물결. 조금이라도 더 경기를 잘 볼 수 있는 곳을 차지하려고 사람들은 그야말로 전쟁을 벌였다.
이미 이 원형 경기장은 한계 수용 인원 5만 명을 훌쩍 넘겨 버린 상태였다.
아직도 다 못 들어간 사람들은 출입구까지 장사진을 이루었으니 이것은 알타베르나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
“존경하는 관람객 여러분 알타베르나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요!”
갑자기 경기장 전체를 진동시키는 쩌렁쩌렁한 윈디의 귀여운 목소리.
하지만 그 목소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저 엄청난 박력을 볼 때 언령 마법이 사용되었음이 틀림없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관람객들은 일제히 환호의 함성을 질렀다.
“생각 이상으로 많은 분이 왕림하여 주셔서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다요. 오늘은 특별히 시오니아 제국의 황제께서 왕림하여 주셔서 더욱더 영광이다요. 황제 폐하께서 여러분에게 전할 말이 있다 하니 한번 들어 보자요.”
와아아아아~!
또다시 함성이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윈디의 곁에 앉아 있던 황제는 몸을 일으켜 관객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녀의 모습은 경기장 중앙 상단에 두둥실 떠있는 대형 입체 영상으로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비춰졌다.
“우선 각기 국가도, 종족도, 사상조차도 다른 사람들이 이 알타베르나에 모여 이렇게 하나가 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됨을 신께 감사드립니다!”
황제는 그렇게 첫 입을 뗐다. 그녀 역시 언령 마법을 사용하는지 그 목소리에는 표현할 길 없는 강한 힘이 담겨 있었고, 그 힘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신사 숙녀 여러분. 길게 말하진 않겠습니다. 오늘만은 즐기십시오! 저 역시 모든 것을 잊고 여러분과 함께 즐기겠습니다! 오늘 경기의 우승과 준우승 선수에게는 우리 제국에서 각각 1천 달란트와 5백 달란트를 부상으로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여기 있는 모든 분에게 드리는 저의 선물입니다.”
구구구-
그때 하늘에서 들려온 뭔가 생소한 울림. 마하임은 반사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생소할지 모를지라도 마하임에게는 전혀 생소하지 않았다. 저 소리는 제국의 공군이 운영하는 비공정의 엔진 소리가 분명했던 것이다.
알타베르나의 하늘에 나타난 거대한 비공정. 그것은 황제 전용의 비공정 ‘엠페러 포스 원’이었다.
일반 비공정보다 무려 10배 이상 큰 이 비공정이 ‘아침의 영광’의 하늘에 나타나자 순식간에 주변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멈춘 비공정은 본체 곳곳에 장치된 해치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