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마하임 도령.”
마하임은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마하임 쪽으로 돌아누워 있는 샤오랑이 눈에 들어왔다.
“아, 깨어나셨군요.”
“전 어떻게 된 겁니까?”
목소리가 바뀌었다. 그것은 남자의 목소리가 아닌 샤오랑 본래의 목소리였다. 조금은 가냘픈 소녀의 목소리. 시아라의 목소리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는 그런 목소리였다.
“철완강시가 폭주했습니다. 죄송하지만 철완강시는 제가 쓰러트렸습니다. 손상이 심해서 다시 사용치는 못할 겁니다.”
마하임은 상체가 날아가 버린 철완강시를 떠올렸다. 마하임 자신도 자신이 사용한 기술이 그 정도나 강한 위력을 보일지는 생각지 못했다.
금강석과 버금가는 내구력을 지녔다는 철완강시를 단 일격에 폭사시켰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가? 그러한가….”
샤오랑은 멍한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샤오랑의 얼굴 전체가 마하임의 눈에 들어왔다.
시아라와 마찬가지로 진한 검은색 머리칼이었지만 마치 남자애처럼 짧게 다듬어져 있었다.
시아라는 혼혈인지라 눈동자 색이 푸른색이었지만, 저 샤오랑은 순수 동방인인 모양인지 눈동자까지 검었다. 그리고 얼굴선은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의 중성미를 자랑했다.
그야말로 어떻게 꾸미냐에 따라 남자가 될 수도 여자가 될 수도 있는 그런 얼굴이었다.
“뭘 보나, 도령.”
“아, 죄송합니다.”
넋을 놓고 샤오랑을 바라보던 마하임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샤오랑은 몸 여기저기를 움직여 보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참 질길 목숨이외다. 차라리 죽어 버렸으면 좋았으련마는, 후후….”
샤오랑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녀도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폭주해 자신에게로 살기 어린 공격을 퍼붓는 철완강시의 모습을. 정말 죽지 않은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어쨌거나 감사하오. 그대야말로 나의 생명의 은인이오.”
샤오랑은 고개를 쑥이며 포권 자세로 예를 표한다. 마하임은 저도 모르게 손사래를 치면서 말했다.
“당치도 않은 말씀. 누구나 그 자리에 서 있었다면 그랬을 겁니다.”
“정말 그럴까? 그 철완강시 앞에서? 정말 누구나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도령?”
“…….”
마하임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 압도적인 살기를 뿜어내는 철완강시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이 절로 움츠러드는 마하임이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그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멘탈이 날아가 버릴 것이다.
“확실히 ‘누구나’는 무리겠지요.”
“후후, 솔직해서 마음에 드오. 철완강시는 좀 아깝긴 하지만, 뭐 어떻게 되겠지.”
지금쯤이면 가문의 비밀 병기인 철완강시가 없어진 것을 알고 샤오랑의 본가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을 터였다.
하지만 그것 또한 시간이 알아서 해 줄 것으로 생각하고 샤오랑은 머릿속에서 그 생각을 지워 버렸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샤오랑은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마하임에게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우리 가문의 규칙상, 남자에게 생명의 구원받은 아녀자는 그 보답으로 평생을 수청 드는 것이 옳겠지만, 이곳은 타국. 문화도 전통도 다르니, 말해 보시오. 마하임 도령 내가 무엇을 해 주리까?”
샤오랑은 흑요석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마하임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하임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며 당황했다.
“특별히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닙니다.”
“무슨 소리! 누가 뭐래도 마하임 도령은 본인의 생명의 은인이오. 말해 보시오. 평생을 수청 들라고 해도 들겠소!”
마하임은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크게 나쁘게 전개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아니 어떤 의미로는 엄청나게 나쁜 전개일지도 몰랐다.
“저기, 전 정혼을 약속한 여인이 있습니다만.”
“첩이라도 상관없소.”
“전 첩을 둘 생각은 없습니다만.”
“…….”
사실이 그랬다. 그 미래에서도 마하임은 첩이나 후궁 같은 것은 두지 않았다.
물론 피 터지는 전쟁의 와중이라는 것도 있긴 했지만, 언제나 그러하듯이 마하임에게는 오직 시아라뿐이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샤오랑은 마하임이 자신을 놀린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마하임 도령! 정녕 이러기요!?”
바짝 약이 오른 샤오랑이 외쳤다. 이 경기에 참여한 여성이라면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알타베르나 최고의 남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마하임과 맺어지고 싶다. 아니 설령 맺어지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와 인연이라도 닿고 싶은 것이 그들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샤오랑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첩 살려 주는 셈 치고, 백년가약을 맺어 주시게. 그렇지 않으면 소첩은 얼굴도 본 적 없는 남정네와 맺어지게 생겼소!”
갑자기 이야기가 이상한 데로 흘러가자 마하임은 식은땀이 절로 났다.
그야 어찌 되었건 샤오랑은 진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학기에 알타베르나로 오면서 아버지께 들은 이야기가 아직도 귀에 생생한 샤오랑이었다.
‘만약 이번 가을까지 정혼자를 찾지 못하면, 내가 정해 주는 자와 혼약을 맺어야 할 것이야.’
그 가을까지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야말로 샤오랑의 발등에는 불이 떨어진 것이다.
눈물까지 글썽이는 샤오랑. 이렇게 되면 가문 대 가문 사이에 이루어지는 정략결혼의 희생물이 될 것이 뻔한 상황이었다.
그 사정은 딱했지만, 마하임의 마음은 변함없었다.
“샤오랑 님의 사정은 알겠지만, 저는 이미 정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녀를 버려 두고 샤오랑 님과 백년가약을 어떻게 맺겠습니까? 게다가 첩은 더 말이 안 됩니다. 아직 정실부인도 없는 사람이 첩이라니요? 그건 언어도단입니다.”
마하임의 말은 그야말로 정론 중의 정론이었다. 하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샤오랑의 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소첩은 상관치 않소. 자고로 영웅은 미녀를 밝힌다 하였소. 그대 역시 영웅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남자 중의 남자. 이 샤오랑은 이미 각오하였소.”
무슨 각오인지 알 수 없었지만 샤오랑은 자신이 입고 있던 셔츠를 벗어 던졌다. 그러자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색 속옷이 마하임의 눈에 들어왔다.
샤오랑은 침대에서 일어나 천천히 마하임에게로 다가왔다.
샤오랑은 마하임과 맞먹을 정도의 늘씬한 키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녀의 짧은 단발도 부적술로 만든 환영인 모양인지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장발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성숙한 여체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볼륨감 있는 몸. 그리고 동방인 특유의 풋풋함은 시아라와는 또 다른 매력을 자아냈다.
“이, 이게 무 무슨 짓입니까!”
“이런 짓이오.”
당황한 마하임이 뒤로 엉거주춤 물러서자 샤오랑은 품안에 있던 부적을 재빨리 꺼내 마하임의 몸에 붙이며 외쳤다.
“결(結)!”
그녀의 외침과 동시에 마하임은 손끝 하나 꼼짝할 수 없었다. 일종의 마비 마법과 비슷한 종류의 주술. 아차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당장 풀어 주십시오!”
마하임은 필사적으로 몸을 가누려고 했지만, 그의 몸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자신의 몸이지만 자신의 몸이 아닌 것 같은 기묘한 감각에 마하임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저의 청을 들어주신다면 못 할 것도 없지요.”
“그런 억지가 어디 있습니까!!”
마하임은 격렬히 항의했지만 샤오랑은 야릇한 미소를 흘리며 그에게 다가올 뿐이었다. 그리곤 마하임의 뺨에 살짝 키스한 후 샤오랑은 입을 열었다.
“포기하시지요. 마하임 도령. 20분 정도만 지나면 움직일 수 있으니 도령은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오.”
그렇게 말하며 넘어져 있는 마하임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았다. 샤오랑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어색한 침묵이 한동안 흘러갔다.
“본인은, 본인은!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지고 싶을 뿐이오. 단지 그뿐인데! 단지 그뿐인데…. 흑, 흐흑.”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는 샤오랑.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그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마하임 앞에 털어놓았다.
이야기 자체는 그다지 특이할 것도 없었다. 흔하다면 흔한 정략결혼 이야기….
이 시대의 귀족 가문 여자라면 피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말이 귀족이지, 귀족 여자라고 해서 특별할 것은 없었다. 여자의 존재는 물건이나 다를 바 없었고, 더 큰 재물과 더 큰 권력을 얻기 위해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가문과 가문 사이를 이어 주는 매개물에 불과했다.
“일단 진정하시고….”
마하임은 펑펑 울고 있는 샤오랑을 바라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애초에 제대로 된 연애 경험이 없는 마하임인지라 더욱 그러했다.
꼬로로록-
바로 그때 마하임의 배에서 들려온 우렁찬 소리에 둘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좋습니다. 샤오랑 님의 문제는 그리 간단히 해결될 것 같진 않군요. 일단 윈디 님께 한번 부탁해 보죠. 그리고 식사부터 하죠. 제가 배가 무척이나 고파서요.”
마하임이 그렇게 말하자 샤오랑은 눈물을 닦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마하임의 이마에 붙어 있는 부적을 뗐다. 그제야 마하임은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일단 입으시죠. 바로 나가 봐야 할 것 같으니까요.”
마하임은 샤오랑의 셔츠를 가져다줬다. 그리고 뒤돌아서는 마하임.
“곧 경기가 시작됩니다. 늦어선 곤란하다고요.”
“아, 알았소.”
그제야 몰려온 수치심과 부끄러움에 샤오랑은 절로 얼굴을 붉혔다. 샤오랑은 허겁지겁 옷을 입었다.
“다 입었소….”
약간은 상기된 얼굴로 샤오랑은 말했다. 그녀가 무투회 때 입고 있던 옷은 철완강시의 공격에 완전히 찢어져 버려 지금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알타베르나의 여성용 교복이었다.
여성용 교복의 디자인은 상의는 남성용 교복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하의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군청색 스커트와 그와 동일한 색의 타이즈로 구성되어 있다.
상당히 뛰어난 실용성과 착용감 때문에 일부 여학생들은 외출할 때도 거리낌 없이 입고 다닐 정도였다.
그런 교복을 차려입자 샤오랑의 가뜩이나 큰 키가 더 커 보였다.
“그럼 가볼까요?”
마하임은 몸을 일으켜 보건실의 잠긴 문을 열었다.
“와아아아아아!”
그리고 문을 열기가 무섭게 터질 듯 들려오는 함성. 보건실의 두터운 철문 앞에는 수백 명의 인파로 가득했던 것이다.
“꺄아아악! 마하임 님이시다!”
“마하임 님 여기 좀 봐주세요! 여기요!
대다수가 여학생이었지만 남학생도 제법 보였다. 그리고 외부 사람들까지 합쳐지자 그 수는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마하임은 재빨리 문을 닫은 뒤 잠갔다.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 흥분한 관객들이 보건실 문에 달라붙어 아우성쳤다. 이대로는 저 관객들 때문에 점심은커녕 경기 참석조차 힘들 것 같았다.
“난감하군요. 좀 더 신중했어야 하는데.”
“걱정 마시게, 도령. 이럴 때 쓸 만한 좋은 부적이 있다오.”
그녀는 자신의 허리춤에 차고 있는 작은 가방에서 노란색 종이 2장을 꺼냈다. 그리고 마하임의 이마에 그 부적을 붙이며 조용히 읊조렸다.
“발동. 투명부(透明符)”
그러자 마하임의 몸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마하임은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화에 깜짝 놀랐다.
“이, 이런 기술도 있군요.”
“우리 가문은 부적술이 주특기라오.”
이렇게 말하고는 샤오랑 자신의 이마에도 부적을 붙였다. 그러자 그녀 역시 배경에 녹아드는 것처럼 사라졌다.
“그럼, 출발합시다. 도령.”
“아, 네.”
마하임은 이렇게 말하고는 보건실 문을 열었다. 그러자 문 밖에서 진을 치고 있던 관객들이 순식간에 쏟아져 들어왔다.
“마하임 님! 어디세요?”
“어디? 어서 좀 찾아봐.”
“안 보이잖아! 여기 있는 것 맞아?”
보건실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관객들은 마하임을 찾으려고 보건실을 이 잡듯 뒤졌지만, 그 어디에도 마하임은 없었다.
마하임과 샤오랑은 그 틈을 타 보건실 밖으로 몸을 피했다. 그리고 그 둘은 곧장 알타베르나의 대식당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