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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군주-64화 (64/194)

64화

지금 이곳은 경기장에서 경기장 밖으로 이어지는 통로 안.

마하임과 멀린의 경기가 끝나자 잠시 주어지는 휴식 시간이었다. 통로 안에는 단 한 사람, 멀린이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경기장 밖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허허. 그 발경이란 기술, 생각보다 심한 내상을 입히는가 보구려.”

멀린은 걸을 때마다 느껴지는 통증 때문에 얼굴이 그다지 밝지 않았다. 신성력으로 표면적인 상처는 치료했지만 발경이 남긴 깊은 내상은 아무리 그의 신성력으로도 고칠 수 없었다.

“또 수행을 떠나는 거냐요?”

바로 그때 들려온 목소리. 그녀는 다름 아닌 윈디였다.

“아, 뭐 그렇습니다. 이 몸은 한 자리에서 머물 수 없는 몸. 신의 이끄심을 따라 그저 떠도는 것이지요. 하하하!”

멀린은 호탕하게 웃었다. 이를 본 윈디는 고개를 흔들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역할극은 이제 됐다요. 그건 그렇고 오늘은 너무 심했다요. 1급 기밀을 그렇게 대놓고 말해 버리면 어떡한다요. 만에 하나 진실이 알려져, 단체로 멘탈 붕괴가 일어나면 그 책임은 누가 진다요?”

“뭐 어차피 언젠가는 알려질 진실 아닙니까? 알타베르나의 황혼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거 저도 알고 있습니다. 단지 그 끝이 이르기 전에 ‘모세’의 사명을 지닌 자를 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

윈디는 침묵을 지켰다. 이 거짓된 세계를 지탱하는 우주 순양함 ‘시노쿠’의 수명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아니 지금껏 버텨 온 것만 해도 정말 신의 가호가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외계 지적 생명체 ‘레비아탄’의 공격을 피해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 지구를 탈출한 이 배는 제작 당시 최대 내구력 연한을 약 300년 정도 예상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시노쿠는 숨을 돌릴 만한 오아시스조차 찾지 못하고 이 무한의 우주를 방황하고 있었다.

시간은 흘러 500년 지났다.

주 동력원으로 사용하던 반물질도 바닥을 보인 지 오래였고, 중앙 관리 시스템도 과부하로 이미 타 버린 지 오래였다.

“그래서 이제는 어떡하려 한다요?”

“일단은 망가진 당신의 소프트웨어 복원에 전력을 기울이려 합니다.”

“이미 복원 불가 판정이 내려졌다요. 그냥 포기하라요. 그럼 편하다요.”

“적어도 당신이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요. 포기하면 당신은 죽습니다.”

“애초에 나는 살아 있는 생명체도 아니다요. 그리고 500년을 넘게 살았다면 살 만큼 산 거 아니다요? 나도 지쳤다요.”

윈디는 언제 꺼내 든 것인지 작은 곰방대를 물고 있었다. 길게 연기를 뿜어내는 윈디. 그런 윈디를 향해 멀린은 답답한 듯 말을 이었다.

“약해지지 마십시오, 윈디 님. 당신의 사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멀린은 윈디를 바라보며 신성력을 한껏 뿜어내며 말했다. 윈디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읊조린다.

“과연 나의 백업 시스템답다요. 그래, 네 뜻대로 해 보라요. 그것 또한 너의 꿈이 아니겠다요? 진실한 꿈을 꾸는 자, 이루어질 지어다. 그것이 이 거짓된 세계를 만든 ‘매트릭스급’ 가상현실 구현 시스템 ‘드림 메이커’의 모토다요. 설령 그것이 영혼조차 없는 AI라 할지라도, 그 꿈은 마땅히 이루어질 것이다요.”

“후, 다녀오겠습니다. 윈디피쉬팀이시여. 부디 우리의 꿈, 우리의 이상. 지구로 돌아갈 그날이 오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그리고 멀린은 몸을 일으켰다. 윈디는 경기장으로 향했다. 그것이 그들이 선택한 길이었고, 그것이 그들에게 정해진 사명이었다.

그렇게 최후의 ‘인큐베이터’급 우주 순양함 ‘시노쿠’는 그 속에 품은 144,000의 저온 수면 상태인 사람들과 함께 그 최후의 항해 막바지를 달리고 있었다.

지구 기준 현재 날짜, AD 2677년 10월 1일.

시노쿠의 지구 탈출일, AD 2165년 12월 1일.

시노쿠 총 항주(航宙)일, 187,480일. 약 512년.

이곳은 인류가 남긴 최후의 희망이자, 최후의 상아탑이다.

* * *

8강 경기가 끝나고 4강 경기에 출전한 선수는 다음과 같았다.

마하임의 4강 상대는 중장갑옷을 착용한 정체불명의 거한, ‘고스트 엑스’였다. 다른 경기는 시아라와 루다크가 상대였다.

마하임과 시아라, 그리고 루다크는 무투회 시작하기 전부터 우승 후보로 점쳐져 왔기에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었지만, 저 정체를 알 수 없는 중장갑옷을 입은 거한은 전혀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

‘고스트 엑스라…. 분명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인데’

마하임은 발표가 나기 전부터 저 고스트 엑스란 자가 무척 신경 쓰였다.

2미터가 살짝 넘는 키에 얼굴을 완전히 가리는 투구. 무언가 특수한 장치라도 된 모양인지 얼굴의 윤곽조차도 볼 수 없었다.

고스트 엑스란 이름 역시 분명 본명은 아닐 것이다. 물론 대회 규정상 알타베르나의 학생이면 무투회에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었고, 가명 사용도 얼마든지 가능했기에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저 거한이 입고 있는 중장갑옷은 수상했다.

‘설마 저게 마장기는 아니겠지?’

마장기는 복잡한 내부 구조 때문에 아무리 작아도 그 키가 3미터는 넘었다. 그 이하의 소형은 적어도 마하임은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마장기는 아니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렇다고 그냥 중장갑옷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여러모로 의심스러운 점이 많았다.

특히 저 갑옷 구석구석에 붙어 있는 정체불명의 기계 장치 하며, 희미한 빛을 뿜어내는 발광석 같은 것은 마장기만이 갖는 특징이었던 것이다.

쿠르르릉-

멀리서 들려오는 천둥소리에 마하임은 머리를 들어 하늘을 봤다. 하늘은 언제부터인가 몰려든 불길한 느낌의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비가 오려나?’

마하임은 비가 싫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도 비가 왔었고, 그 미래에, 윈드시크릿이 함락당한 날도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비가 내리는 날은 이상하게도 모든 일이 꼬였다. 그것은 소위 징크스라 불러도 좋을 만큼 마하임에게는 좋지 않은 징조였다.

그야 어찌 되었건 4강 경기의 막이 올랐다.

“신사 숙녀 여러분 이제 대회도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럼 4강 첫 번째 경기에 참여할 선수를 소개하겠습니다!”

경기장 한가운데서 엘케인은 자신의 정령력리 가득 담긴 목소리로 관객들을 향해 외쳤다. 관객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환호성을 질렀다.

“먼저 신학부 3학년 멀린을 물리치고 4강에 진출한 떠오르는 신예 마하임 폰 잉그램!”

엘케인은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관객의 환호성과 마하임의 이름을 연호하는 외침이 장내를 가득 채웠다. 마하임은 경기장에 올라 고개를 숙이며 관객들의 환호에 답례했다.

“그리고 이 대회의 다크호스, 그 정체는 알 수 없지만 모든 경기를 일격 필살로 끝내 버린 중장갑옷의 사나이, 고스트 엑스!”

엘케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고스트 엑스는 단숨에 경기장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키만큼이나 거대한 투핸드소드를 바닥에 끌며 마하임에게로 다가왔다.

지직 그그그극-

과연 엘케인의 말처럼 일격 필살로 승리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얼핏 봐도 저 검의 길이는 2m를 상회했다.

당연히 무게 역시 엄청날 것이다. 저런 검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면 스치는 것만으로도 치명상을 피하기 어려울 터였다.

“그럼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이 말을 끝으로 엘케인은 경기장에서 사라졌다. 남은 것은 마하임과 고스트엑스 둘뿐이었다.

잠시 이어진 침묵. 그 침묵을 깬 사람은 다름 아닌 고스트 엑스였다.

“휴우, 나름 힘들었어요. 근데 어땠나요? 마하임 님. 제 실력이.”

고스트 엑스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무려 여성의 목소리였다. 게다가 그 목소리는 마하임도 어디선가 들어본 낯익은 목소리였다.

“설마 당신은 안나 님…?”

“역시 날카로우시군요. 엘리 군. 야차의 안면 투구를 열어 줘요.”

“네, 알겠습니다. 안나 님.”

엘리의 밝고 경쾌한 목소리와 함께 고스트 엑스, 야차의 투구 상단이 열리면서 그 속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얼굴의 주인공은 마하임이 예상한 대로 안나였다. 땀에 흠뻑 젖어 얼굴은 부스스했지만, 그 정도로 안나의 귀여움을 가릴 수 없었다.

마하임과 처음 만난 날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트윈 테일로 묶었던 머리 모양이 짧은 단발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오! 의외의 인물이다요? 우리 알타베르나의 근로 장학생이자 최고의 기계공학도인 안나가 ‘고스트 엑스’였다니! 이 대회 최고의 이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요.”

“그, 그렇군요. 그렇다면 지금 안나 님이 입고 있는 갑옷은 고대 유적이란 이야기겠죠. 소위 마장기라 불리는 자동인형처럼 보이는데요?”

“그렇다요. 하지만 저건 마장기가 아닌 콤팩트 사이즈의 소형 엑토스켈레톤의 업그레이드판이라고 할 수 있겠다요. 보아하니 커스텀 강화까지 해 놓은 것 같은데 성능이 궁금하다요.”

윈디의 눈에 비친 안나의 소형 파워드 슈트, 다시 말해 마장기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강한 힘을 잠재하고 있었다.

만약 저 힘을 다 끌어낸다면 아무리 마하임이라 할지라도 안나를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왜 안나 님이 이런 곳에…?”

솔직히 그녀의 무투회 참가는 정말 의외였다. 마하임이 알기로는 안나는 전투와는 전혀 인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안나는 그 수많은 고수들을 물리치고 무려 4강까지 올라온 것이다. 놀라지 않으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머리를 자르셨군요.”

“헤에, 저도 나름 각오를 하고 나왔으니까요.”

안나는 자신의 목 바로 아래서 찰랑거리는 갈색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마하임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연다.

“진짜…. 저와 싸워야겠습니까?”

“음, 마하임 님의 대답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죠.”

씽긋 웃으며 안나는 말했다. 그러자 마하임은 또다시 엄습한 불안감에 머리가 아파져 옴을 느꼈다.

“저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안나 님.”

“그, 그건…. 음.”

손가락을 꼬며 말을 머뭇거리던 안나는 마지막 용기를 짜내어 말했다.

“저, 저와 사귀어 주세요!”

“…….”

순간 할 말을 잃은 마하임. 이 무투회에 참여한 이상 어느 정도는 예상한 일이었지만 그녀의 입에서 저러한 대사가 나올지는 상상하지 못한 마하임이었다.

“와우! 안나가 공개 고백?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안나는 기계 말고는 전혀 관심 없는 그런 아이가 아니다요?”

“네, 그렇습니다. 그동안 안나 님에게 고백해서 차인 남자들만 해도 백 단위를 넘을 겁니다. 그런 안나 님이 이런 공개된 장소에서 고백하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겠죠? 자, 그럼 마하임 님의 대답을 한번 들어 볼까요!”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진 대회장. 마하임은 정말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분명 마하임에게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었다. 여차하면 거짓말을 해서라도 이 상황을 넘길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마하임은 안나의 마음을 속이기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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