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죄송하지만 전 이미 정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저도 그건 알아요. 하지만 아직 결혼한 것도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사실 아직 시아라는 마하임 자신을 그저 스쳐 가는 인연보다 조금 나은 존재로밖에 생각지 않았다. 달리 말하자면 사실상의 짝사랑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저에게도 기회를 주세요! 꼭 정실부인이 아니라도 좋아요. 마하임 님도 일국의 왕자. 첩이나 후궁은 얼마든지 둬도 상관없잖아요?”
정실부인도 아닌 첩이나 후궁도 상관없다니…. 안나는 자존심 같은 것은 이미 내려놓은 지 오래였다.
마하임은 그녀의 이 말을 듣고선 한숨이 절로 나왔다.
마하임이 안나에게 접근한 것은 그저 뛰어난 동료를 얻기 위해서였다. 일이 이렇게 까지 꼬여 버릴지는 정말 상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어쩌지?’
둘 다 손에 넣는다는 것은 욕심이었다. 마하임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뜬 마하임은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제게는 시아라, 제 약혼녀밖에 없습니다.”
마하임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 미래의 지옥 속에서 시아라는 마하임의 등불과 같은 존재였다.
만약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마하임은 결코 시아라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이 세상 그 무엇을 준다고 해도 나는 그녀와 바꾸지 않을 겁니다. 제 인생에 있어 배우자의 위치에 있을 사람은 시아라 한 명이면 충분합니다. 첩이든 후궁이든 그 무엇도 저에게는 필요치 않습니다. 부디 이해해 주시길.”
마하임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그렇게 말을 맺었다. 그리고 그의 이 목소린 멀리서 다음 경기를 준비하던 시아라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잘도 그런 말을, 거기다 남들 다 보는 경기장에서…. 어찌하여 남자들이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시아라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마하임의 입을 막고 싶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렇게 나쁜 기분만은 아니었다. 예전이나 지금도 결혼이나 남자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 없었지만, 지금의 마하임에게 흥미가 없다는 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하더라도 마하임은 자신의 약혼자라고 말하기조차 부끄러울 정도의 한심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의 앞에서 저런 닭살스러운 대사를 남발하는 저 남자는 너무나 완벽히 달라져 있었다. 심지어는 본인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왜, 무엇 때문에 마하임이 저렇게나 변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변화가 결코 싫지만은 않은 시아라였다.
“그런, 역시 그렇군요….”
안나는 마하임의 말을 듣고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소위 말하는 ‘차였다’라는 건데, 이보다 더 완벽하게 차일 수는 없을 것이다.
거기다 무려 5만이 넘는 관객들 앞에서 보기 좋게 차였으니 이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그래도 안나는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좋아요. 마하임 님. 사귀는 것까지는 무리라도 대회에서 우승한다면 데이트 정도는 가능하겠죠. 사랑은 결국 움직이는 것. 이 대회에서 우승해 마하임 님의 마음을 제게로 돌리겠어요!”
당돌한 안나의 외침에 마하임은 저도 모르게 뒷머리를 잡았다.
물론 우승 상품이 상품인 만큼, 이런 비슷한 일이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실제 당해 보니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였다.
이렇게 된다면 안나와의 일전은 피할 수 없을 터였다.
“역시 그렇게 되는 겁니까? 할 수 없군요. 어울려 드리겠습니다.”
마하임은 늘 하던 대로 자세를 취했다.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어도, 지금이라면 그 누구에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물며 전투 경험조차 별로 없는 안나에게 마하임이 패할 확률은 없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방심할 수 없었다. 내로라하는 강자가 즐비한 무투회를 단숨에 돌파하고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안나가 절대 약하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엘리 군, 고스트 엑스 시스템을 가동해 줘.”
“네, 안나 님. 고스트 엑스 스텐바이!”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안나가 입고 있던 마장기 전신에서 희미한 붉은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묘한 울림이 마장기의 외부 장갑 전체를 감쌌다.
위잉, 위잉-
“각오하세요! 마하임 님.”
안나는 땅을 박차고 마하임에게로 달려왔다. 그리고 마장기의 오른손에 들려 있는 거대한 대검을 휘둘렀다.
그야말로 마장기의 힘만을 의지해 아무렇게나 휘두른 공격이었다. 그러나 마하임은 그 검을 피할 수 없었다.
“뭐?! 허억!”
그것은 순간적인 일이었다. 마하임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안나의 검은 마치 마하임이 어디로 피할지 이미 아는 것처럼 마하임의 움직임을 귀신같이 읽고 날아들었다.
마하임은 이를 악물고 바닥에 거의 눕다시피 피했지만, 완벽히 피할 수는 없었다.
“젠장! 피할 수가 없어?!”
그저 살짝 스쳤을 뿐인데도, 마하임의 갈비뼈 3개가 부서져 버렸다. 그 덕분에 숨 쉬는 것조차도 힘들어졌다. 마하임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겨우 몸을 추슬렀다.
“역시 마하임 님…. 저의 일격을 피한 사람은 마하임 님이 처음이에요. 고스트 엑스의 미래 예측 시스템도 마하임 님의 움직임만큼은 완벽히 읽지 못한 모양이네요.”
안나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마하임에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마하임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경고. 분기 우주 병렬 탐색 행동 예측 시스템 탐지. 긴급 이탈을 권고합니다.]
때마침 들려온 오페라의 경고 메시지.
마하임은 그제야 모든 기억이 떠올랐다. 마하임이 아는 그 미래에서 제국이 일방적으로 반제국군을 괴멸시킨 원동력.
그것은 단순한 미래 예지를 넘어선 확정된 미래를 선별하여 사용자에게 알려 주는 사기적인 기술이었다.
‘망할! 저게 여기서 왜 나와?!’
마하임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건 10년 뒤에나 불완전하게나마 사용되는 기술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여기서. 그것도 안나가 이것을 사용하다니…. 뭔가 잘못돼도 한참은 잘못된 일이었다.
“포기하시죠? 마하임 님. 저의 분기 우주 탐색 미래 예지 시스템 앞에서 ‘만약’이란 것은 없으니까요.”
차갑게 미소 짓는 안나.
이 세상에는 수많은 우주, 다시 말해 분기 우주라는 것이 존재한다.
고스트 엑스 시스템은 각각의 분기 우주상의 동일한 목표물을 파악하여 그 대상이 어떠한 행동을 하는지 초 단위로 스캔, 현 세계의 목표물의 다음 움직임을 예측하여 알려 주는 궁극의 전투 지원 시스템이었다.
때문에 그 미래에서도, 그리고 지금 역시도 아무리 변칙적인 움직임을 펼쳐 봤자 고스트 엑스는 그것을 미리 ‘관측’해 대응했기에 마하임은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직 멀었습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미래’라는 것은 없습니다.”
마하임은 다시금 자세를 가다듬었다. 마하임의 말을 들은 안나는 발끈해 자리를 박차고 그에게 다가왔다.
어디로 피하건 고스트 엑스 시스템이 있는 한 따라잡힐 것이 분명했다. 마하임은 도망치는 대신 안나를 향해 내달렸다.
‘축지!’
안나와의 거리를 순식간에 무로 만든 마하임은 연이어 기술을 발동시켰다.
‘파이어 볼, 인첸트. 발경!!!’
주문의 영장조차 없었다. 길게 끌면 끌수록 이 싸움은 불리해진다는 것을 안 마하임은 샤오랑의 철완강시에게 사용한 그 기술을 다시금 사용했다.
“다 읽고 있다니까요.”
그러나 마하임의 이 회심의 일격은 허무하게 빗나가고 말았다. 안나는 단순히 피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돌려차기로 마하임을 경기장 구석으로 날려 버렸다.
퍽-!
“어억!”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바닥을 뒹구는 마하임. 일반인이 맞았다면 이것만으로도 치명상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마하임은 곧 아무렇지도 않은 듯 몸을 일으켰다. 이를 본 안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엘리 역시 그런 마하임을 유심히 살폈다.
“이상하네요, 안나 님. 저 정도 타격이라면 벌써 항복을 했어야 하는데 말이죠.”
“그러게. 마하임 님의 몸을 스캔해 보니 내장 전부가 엉망진창인걸? 저런데도 어떻게 서 있을 수….”
안나는 전투 지원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는 센서를 보다 깜짝 놀랐다.
마하임의 몸이 치유되고 있었던 것이다. 부서진 갈비뼈가 시간을 역행하는 것처럼 다시금 맞춰지고 파열된 내장 역시 원상태로 회복되어 가는 모습에 안나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이건 아마도 그 멀린이 마하임에게 내린 ‘축복’ 때문인 듯합니다. 멀린의 고위 신성력이면 지속 회복, 심리 고착 정도는 어렵지 않게 쓸 수 있을 테니까요.”
엘리의 전투 지원 소프트웨어는 신성력 같은 이능은 감지할 수 없었지만, 그에 대한 정보는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예전에도 알타베르나의 무투회 때 멀린은 이러한 권능을 사용한 전적이 있었으니, 말할 것도 없이 저것은 멀린의 축복. 흔히들 말하는 ‘버프’가 틀림없었다.
“맙소사, 축복의 효과가 그렇게 좋았어?”
“멀린이니까요.”
“…….”
간단명료한 엘리의 설명에 안나는 입을 닫았다.
멀린, 그는 신관들 사이에서도 전설적인 인물로 통했다. 전염병이 돌아 죽기 직전의 수백 명의 사람들을 동시에 치료한 ‘실로암’의 기적은 대륙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였다.
“저 축복이라는 거 영원한 건 아닐 테고, 언제까지 지속될까?”
“음, 지난번에 봤을 땐 6시간 정도던데요.”
“완전 사기야, 저건 좀비나 다름없잖아.”
“좀비보단 불사신이 어울리지 않을까요?”
“그거나, 그거나!”
안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지금 안나가 타고 있는 야차의 활동 가능 시간은 겨우 30분이 고작이었다. 야차가 멈추면 고스트 엑스 시스템 역시 정지된다.
이대로 시간을 끈다면 패배는 기정사실이었다. 하지만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제아무리 멀린의 축복이라 하지만, 회복 능력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 한계치 이상의 대미지를 주면 결국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미래 예측, 과연 대단하군요. 하지만 저도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마하임은 이를 지그시 깨물며 말했다. 거의 반칙에 가까운 기술이었지만, 그 미래에서 제국의 분기 우주 미래 예측 시스템을 무력화시킨 적이 있었던 것이다.
다만 시아라가 사용한 그걸 마하임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가가 문제였다.
‘어쩌면 이 몸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마하임은 단전으로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복식 호흡을 통해 흐트러진 혈도를 바로 잡았다.
이 기술의 핵심은 신체에서 나오는 모든 기운을 철저히 감추어 무로 돌아가는 것.
시현류 유도 유선술의 극치라 불리는 경기공(硬氣功)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럼 갑니다!”
마하임은 망설임 없이 발을 뗐다. 경기공이 제대로 발동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애초에 내공이 없는 마하임이 경기공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원래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질 것 같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어떤 강대한 힘을 가진 무언가가 마하임 자신을 이끄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하임은 그저 이 힘에 몸을 맡기고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어림도 없어요. 이 일격으로 마하임 님을 쓰러트리겠어요!”
“아, 안나 님 피하세요! 마하임 님이 사라졌습니다!”
“……?!”
안나는 순간 엘리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하임은 사라지기는커녕 여전히 그녀의 시야 안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