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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군주-70화 (70/194)

70화

지금 마하임의 머릿속에서는 그 ‘미래’의 기억들이 폭발하듯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그 처절한 전쟁 가운데서 자신을 단련하고 또한 서로의 등을 지켜주던 전우이자 배우자로서의 시아라의 기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찌 그 기억을 잊을 수 있으랴!

마하임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아라 그녀와 함께해 왔다. 그리고 그 세계와 한없이 가깝고, 또한 한없이 먼 이 세계에서도 그것은 같았다.

“한 가지만 묻죠.”

“무엇을 말입니까?”

터져 나갈 것만 같은 감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마하임은 가까스로 시아라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녀는 여전히 허초와 실초를 날카롭게 섞은 공격을 날리며 미소 지었다. 그리곤 가벼운 몸놀림으로 마하임과 조금 떨어진 거리로 도약한 다음 입을 열었다.

“‘제 인생에 있어 배우자의 위치에 있을 사람은 시아라 한 명이면 충분합니다. 첩이든 후궁이든 그 무엇도 저에게는 필요치 않습니다’”

시아라는 마하임의 말투를 그대로 흉내 내며 말했다. 마하임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빨갛게 변하고 말았다.

시아라는 그런 마하임의 얼굴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 말 믿어도 될까요?”

“굳이 믿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직접 보여 드릴 테니.”

마하임은 시아라의 눈을 바라보면 분명하고도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시아라는 웃음을 거두며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대의 말이니, 허언은 아닐 터. 기대하도록 하죠.”

권력과 힘이 있는 자가 모든 것을 가지는 약육강식의 세계가 바로 이 시노쿠 대륙이었다.

권력과 돈이 넘쳐나는 귀족들은 수십 명의 첩을 두었고, 웬만한 일국의 왕들은 그에 더해 30~40명의 후궁은 기본이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시아라는 귀족의 귀 자만 들어도 학을 뗐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하임이라고 해도 별다를 바 없을 것이라고 시아라는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보아 온 마하임은 그 여타의 귀족들과는 본질적으로 무언가 달랐다.

“뭐, 그렇다 할지라도 승부는 내야겠죠.”

“그렇죠. 이긴 사람이 데이트 장소를 결정하는 건 어떤지요.”

“나쁘지 않네요. 그럼 받아 보시죠!”

시아라는 땅을 박차고 마하임을 향해 달려들었다.

마하임은 시현류 팔괘장의 기본자세를 취하며 시아라의 움직임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이를 바라봤다. 그리고 격돌하는 ‘권’!

주먹과 주먹이 오가고 차기와 차기가 오갔다. 그것은 이미 대결이라고 보기보다는 완벽하게 연출된 연극과 같았다.

하지만 그 기세만큼은 웬만한 실전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완벽히 계산된 한 방 한 방의 공격은 대기를 진동시켰고 등골 서늘한 살기는 관람객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팍 파팍!

파팍 팍!

시현류의 권은 모든 공격이 다음 공격을 이어 가기 위한 준비 동작으로 이루어졌다.

같은 계통을 지닌 권이었지만, 마하임의 권은 조금 더 힘 있고 직선적이었다. 그리고 시아라는 좀 더 부드러웠고 또한 날카로웠다.

두 권은 그야말로 시현류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무예 ‘태극’을 완벽히 형상화시켰다.

“믿을 수가 없군요, 당신…. 정말 아버님께 시현류를 전수받으신 거 맞나요? 이건, 말도 안 돼! 이럴 수가!!!”

“쉿- 내 나중에 모든 것을 밝히겠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함께 즐기시죠. 이 축제를 말입니다.”

마하임은 시아라를 뚫어지듯 바라보며 말했다. 시아라는 무언가 더 말하려다 입을 닫았다.

시아라 자신에게도 사연이 있는 만큼 마하임에게도 분명 사연이 있으리라.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좋습니다. 그다음은 무투회를 끝낸 뒤 데이트 때 듣기로 하죠.”

“후후, 그럼 이번에는 제가 갑니다.”

마하임은 다시 자세를 잡았다. 이제 더는 허초와 실초와의 경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공격은 하나의 허초이면서도 실초였으며 심지어는 방어와 공격의 경계마저 사라져 버렸다.

모든 기술은 완벽히 조화를 이루었으며 그 어디에도 헛된 움직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실전 기술의 극치. 관객들은 완전히 넋을 잃고 이를 바라볼 뿐이다.

“역시, 그렇군요. 당신은 최소 10년 이상 무공을 배워 왔음이 틀림없습니다. 그것도 나 이상의 ‘고수’로부터 말이죠.”

“자세한 사정은 데이트 때 모두 알려 드리겠습니다.”

마하임은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그녀 앞에서 비밀이란 존재할 수 없었다. 애초에 숨길 생각도 마하임은 하지 않았다.

그저 때가 되길 기다렸을 뿐이다. 그리고 그 때는 이제 그리 멀지 않은 것 같았다.

마하임의 말을 들은 시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정’이 정말 미칠 듯 궁금했지만, 지금은 일단 승부를 지어야만 했다.

“승부!”

“승부!”

두 남녀의 외침. 그리고 권과 권이 교차한다.

그리고 둘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것은 마하임이었다.

“하아. 하아….”

마하임은 바닥에 대자로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애초에 시아라가 내공을 사용 안 했으니 제대로 된 승부라고도 할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마하임은 졌다. 그것은 변치 않은 사실이었다.

“조금 아까웠습니다. 마하임 공자.”

“역시 당신에게는 이길 수 없군요. 제가 졌습니다.”

절대 봐주거나 한 것은 없었다. 마하임의 정권 찌르기는 시아라의 귓가를 아슬아슬하게 스친 것이 다였다.

하지만 시아라의 흩어 찌르기는 마하임의 턱을 정확히 강타했다.

턱은 인체의 급소 중 하나, 제대로 맞게 되면 뇌가 흔들려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도 없게 된다. 지금 마하임의 상태가 바로 그런 상태였다.

“약속은 꼭 지키셔야 해요. 서방님.”

“하하…. 물론이죠.”

시아라는 마하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마하임은 시아라의 마지막 일격이 작렬한 턱을 만지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시아라의 손을 붙잡았다.

와아아아아아아!!!!

그제야 터져 나오는 관객들의 함성. 알타베르나 전체가 진동하는 듯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관객들로부터 들려온 외침이 하나 있었다.

키스해! 키스해!

마주 선 마하임과 시아라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런 둘을지켜보던 윈디 역시 여기에 가세했다.

“지금 뭐 하는 거냐요. 어서 키스하라요!”

키스해! 키스해!

연이어 외치는 관중의 소리에 압도되어 마하임과 시아라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부끄러운 듯 목덜미가 붉어졌지만 내색하기 싫은지 웅얼거리는 시리아.

“뭐, 키스 정도야…. 뭐, 첫 키스이긴 하지만…. 그대라면…. 흐흡!!!”

시아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마하임의 입술이 거칠게 시아라의 입술을 덮쳤다. 그리고 격렬한 키스가 둘 사이에 오갔다.

시아라는 순간 깜짝 놀라 빠져나오려 했지만, 형용할 길 없는 감미로운 키스에 순간 온몸의 힘이 모두 빠져나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시아라는 더는 반항치 않고 마치 운명처럼 마하임에게 자신의 몸을 맡겼다.

‘사랑하오, 시아라. 정말 사랑하오!’

마하임은 너무나 행복했다. 이보다 더 행복한 순간은 과거에도 미래에도 그 어느 순간에도 없었다.

그토록 그리워하고 또한 그리워했던 사람. 시아라 그녀가 자신의 품 안에 있었다.

그 미래에서는 마하임이 그녀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언제나 그녀의 도움만을 의지한 채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로 자기 한 목숨 부지하는 것도 버거웠다.

그러나 적어도 이번 ‘세상’에서는 다를 것이다. 이번만큼은 그 처절함을 반복하지 않으리라!!

그를 위해, 오직 그 하나의 목적을 위해 마하임은 지금 여기에 서 있었다.

‘반드시 지켜 보이리라! 나의 삶, 나의 영혼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반드시 그대를 지키리라!’

마하임은 그렇게 자신의 결심을 자신의 영혼에 새겨 넣었다.

노을로 희미하게 빛나던 하늘에 기어코 어둠이 찾아왔다. 그리고 이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아침의 영광 하늘에는 휘황찬란한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파아아앙 파팡!

파파팡!

형형색색의 불꽃이 하늘을 수놓았다. 그 수를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많은 폭죽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그리고 그 정점에 이르렀을 때 오색찬란한 불꽃을 산개하며 사라졌다.

알타베르나의 여름은 그렇게 막을 내리고 있었다.

‘시노쿠’가 외계 지적 생명체 ‘레비아탄’의 공격을 피해 지구를 탈출한 지 187,770일이 지났을 무렵의 일이었다.

* * *

무투회가 끝난 그날 밤. 알타베르나의 아침에 영광 경기장에서는 성대한 파티가 벌어졌다.

지금 이 자리에는 외부에서 손님은 일체 참여할 수 없었다. 이 파티는 알타베르나의 학생들과 관계자들만 참석할 수 있는 자리였다.

낮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경기장은 깔끔히 치워졌다. 그곳에는 음식으로 가득한 테이블이 좌우로 정렬되어 있고 제국에서 특별히 파견된 오케스트라 악단이 부드러운 선율의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알타베르나의 학생들은 저마다 담소를 주고받으며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거나 가득 차려진 진수성찬을 맛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번에 알타베르나에서 제대로 한턱 쏘는 모양이네.”

“와구와구- 왕궁에서 먹던 거보다 더 맛있다.”

“체통을 좀 지키십시오. 명색이 귀족이란 분들이 왜 그 모양입니까?”

“확 그 주둥아리 뽑아 버리기 전에 닥쳐 주셨으면 참 감사하겠습니다. 이 썩을 호빗 놈아!”

어디를 가나 말썽꾼인 드워프 학생 몇몇이 난동을 부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지금 이곳에 모인 학생들의 수는 약 1천여 명. 알타베르나의 학생 대부분이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 마하임과 시아라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 둘은 지금 어디 있을까?

“후우…. 여기도 없나? 대체 어디로 사라졌지?”

마하임은 경기장 이곳저곳을 이 잡듯 뒤지고 있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보였던 시아라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나름 오늘 밤을 기대하고 있었던 마하임으로서는 정말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몇십 분을 헤매고 다녔을 때였다.

아침의 영광 경기장의 서쪽 탑 위에서 멍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시아라가 마하임의 눈에 들어왔다.

마하임은 반가운 마음에 단숨에 시아라가 서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축지!”

가볍게 땅을 박찬 마하임은 탑 최상층까지 단숨에 뛰어올랐다. 원래 마하임의 축지는 직선거리밖에 이동할 수 없었지만, 이번 축제 때 열심히 구른 결과, 축지의 성능을 전보다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다.

장족의 성장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나쁜 결과는 아니었다.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윈디 님도 아까 전부터 당신을 찾으시더군요.”

마하임은 시아라의 곁에 가볍게 착지한 후 말했다. 하지만 시아라는 하늘에 두둥실 떠오른 두 개의 달, 에다와 시다에 눈을 고정한 채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시아라는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우리 인류는 저 달을 넘어, 아득히 먼 곳 ‘지구’라는 곳에서 왔다죠?”

“네, 그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 선조는 왜 젖과 꿀이 흐른다는 그 고향을 버리고 이 삭막한 곳까지 왔을까요?”

“…….”

마하임은 문득 멀린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인류를 멸망시킨 레이비아탄. 그리고 고향을 버리고 도망친 인류.

마하임은 고개를 흔들며 조소했다. 한마디로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였다.

설령 이것이 진실이라면 인류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은 ‘레비아탄’은 지금 어디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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