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마하임은 머리를 부여잡고 ‘저 빌어먹을 님프’ 윈디를 어떻게 괴롭히면 잘 괴롭혔다고 소문이 날까를 고심했다.
하지만 윈디는 마하임의 후견인이었고 사실상의 물주였다. 지금으로서 마하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참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 갑니다!!!”
마하임은 순간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훌쩍 공중으로 뛰어오르더니 온천을 향해 다이빙했다.
풍덩!
“꺄아아악!”
“쿠억! 무슨 짓이오, 마하임 공자!”
“마하임 님 너무해요…!”
“…….”
각자의 반응은 달랐지만 그중에서도 윈디는 마하임이 일으킨 파도에 휩쓸려서 물속 깊숙한 곳까지 빨려 들어가 버렸다.
“어라? 윈디 님이 안 보여.”
“응? 정말이군요. 어디 있지?”
“내버려 두시죠. 그 변태 님프는 이 정도로는 절대 죽진 않을 겁니다.”
“하긴 무간지옥으로 끌려가도 당당히 귀환하실 분이지. 암, 그렇고말고.”
그렇게 윈디는 천천히 잊혀진 존재가 되어 갔다. 마하임은 물 위에 상채를 드러낸 채로 지난 무투회의 피로를 천천히 풀었다.
하늘에서 내리던 함박눈은 제법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함박눈은 그치지 않고 계속 내리고 있었다.
“한잔 받으시죠. 마하임 님.”
엘케인은 와인이 가득한 유리잔을 마하임에게 건넸다.
물 위를 유령처럼 떠 있는 엘케인의 모습을 보자니 술맛이 확 달아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바람의 정령왕이 건네는 술을 거부할 만큼 마하임은 강심장이 못되었다.
‘어찌 되었건 여기까지 와 버렸구나.’
마하임은 술잔을 받아 들고 생각에 잠겼다.
그 미래에서 이곳까지, 아니 그것이 정녕 미래인지도 이젠 믿을 수 없었다. 과거와 미래. 그 무엇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마하임 앞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답은 이미 알고 있어. 현재, 오직 현재에 집중하자. 미래의 기억은 죽은 기억. 오직 현재에 모든 것을 걸자.’
마하임은 다시금 결의를 다지듯 중얼거렸다.
지금 마하임이 가장 염려되는 것은 바로 제국의 동향이었다.
이번에 황제가 선보인 ‘키메라’는 마하임이 아는 미래에서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것은 곧 미래가 변하다 못해 이제 전혀 다른 길로 접어든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마하임은 두렵지 않았다. 마하임은 그 미래와는 달리 혼자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지상 최강의 멘토 윈디가 있었고, 사랑스러운 아내 시아라가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힘이 되어 줄 것이 분명한 안나와 샤오랑까지.
이것을 씨앗으로 삼아 그 최악의 미래를 돌파할 열쇠로 삼는다. 그것이 마하임이 구상한 1차 계획이었다.
“뭐 하고 있다요? 같이 한잔하자요.”
술에 잔뜩 취해 하늘에서 곡예비행을 하던 윈디가 마하임을 향해 말했다. 마하임은 그런 윈디를 단숨에 낚아챘다.
“켁, 뭐 하는 거냐요!?”
마하임은 들은 채도 안 하고 자신의 와인 잔에 윈디를 집어넣어 버렸다.
“푸핫, 윈디 살려…!”
“이것으로 퉁치는 것으로 하죠.”
“뭘 말이다요?!”
“저의 데이트를 방해한 거 말입니다.”
“쿨럭쿨럭, 히잉 너무하다요. 마하임 다시 봤다요!”
마하임은 대꾸도 하지 않고 엘케인을 바라보며 와인 한 잔을 더 주문했다.
“와인 한 잔 더 주시겠습니까? 기분이 대략 좋진 않군요.”
“죄송합니다, 마하임 님. 제가 말려 봤지만 소용이….”
“엘케인 님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어쨌든 오늘 데이트는 완전히 망쳐 버린 것 같군요.”
“앗,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어디를 봐서 이게 망친 건가요?”
이를 멀찌감치 바라보던 안나가 마하임에게로 다가왔다.
“오늘 마하임 님 정말 멋졌어요. 그 괴물 같은 성직자 멀린과 싸워도 전혀 밀리지 않다니…. 정말정말, 굉장했어요.”
안나 역시 술에 많이 취했는지 유달리 말이 많아졌다.
마하임에게로 다가온 안나는 갑자기 마하임의 팔을 꼭 껴안았다. 이를 본 시아라의 눈꼬리가 올라갔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마하임 님, 그래서 말이죠, 우리 날짜 잡아서 조용한 곳에 가서 둘이서만 재미나게 놀아요. 약속하셨잖아요. 우리 친구하기로.”
“…….”
갑자기 뿜어져 나오는 살기, 그것의 근원은 당연하게도 시아라였다. 물살을 헤치며 안나에게로 다가오는 시아라의 몸에는 엄청난 살기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감히 약혼녀가 지켜보는 앞에서 서방님에게 추파를 던지시는 겁니까? 죽으려고 환장을 하셨군요.”
“흥, 아직 결혼은 안 하셨잖아요. 마하임 님이 저랑 친구 해주신다고 했거든요. 저도 열심히만 하면 마하임 님과 충분히 맺어질 수 있다고요.”
안나의 말에 순간 두 여성의 시선은 마하임을 향해 집중됐다. 마하임은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아니, 전 그저 상황을 수습하려고….”
말을 더듬으며 황급히 변명하는 마하임. 그런 마하임을 바라보며 시아라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영웅호색이라 했던가요? 뭐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안나 양, 그 말 취소해 주시죠? 누구와 누가 맺어진다고요?”
“취소 못 해요. 마하임 님을 독점하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어요!”
대놓고 시아라에게 도발하는 안나. 시아라의 얼굴은 붉어지다 못해 검게 변했다.
“갈(喝)!!!”
시아라의 일갈이 사방을 뒤흔들었다. 음공, 사자후의 술식을 응용한 것이었다.
시아라의 사자후를 바로 코앞에서 뒤집어썼으니, 안나가 무사할 리가 없었다. 안나는 순간 의식을 잃고 그대로 물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아, 안 돼! 빨리 안나를 구해야…!”
마하임은 허겁지겁 안나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한참이나 늦은 뒤였다.
푸하아아-!
거대한 물기둥이 물속에서 솟아올랐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레드안나로 변한 안나였다.
“누구냐! 내 친구를 괴롭힌 자는!!!”
안나의 눈동자는 타오를 것 같은 붉은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변화의 시작일 뿐이었다.
그녀의 근육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고, 근골 자체가 마치 남자처럼 변화하기 시작했다.
160cm도 안 되는 그녀의 키는 순식간에 170을 훌쩍 넘어섰다. 그 모습은 마치 루다크의 투체 변신술을 보는 듯했다.
“호오…. 당신이 바로 광전사 레드안나인가 보죠?”
시아라는 눈도 한 번 깜박하지 않고 레드안나를 바라보았다. 레드안나는 이를 으드득 깨물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 나는 안나를 수호하는 붉은 검! 감히 나의 소중한 안나를 건드리다니, 겁대가리를 상실했구나!”
터져 나오는 박력!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마치 사자후의 기운이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그 목소리를 계속 듣고 있자니 마하임은 귀가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흥! 사돈 남 말 하시는군요. 먼저 남의 약혼자에게 추파를 던진 게 누군데요?”
“문답무용! 그 이유야 어떻든 넌 이미 죽어 있다!!!”
어디서 많이 본 대사를 거침없이 내뱉는 레드안나. 그녀는 물을 박차고 거침없이 시아라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맹렬한 기세에 시아라조차 움찔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시아라는 당황하지 않고 숨을 천천히 가다듬었다.
이보다 더 숱한 아수라장을 격어 보았던 시아라였다.
“후우….”
단전에 기의 흐름을 조절하는 시아라. 들이쉬고 내쉬고 다시 들이쉬는, 시현류 고유의 단전호흡으로 마음을 안정시켰다.
여전히 레드안나의 살기는 온몸을 찌릿하게 만들 정도로 강력했지만,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시아라는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죽으라뇨? 당치도 않을 말씀이십니다. 고작 광전사 주제에, 주제 파악부터 하시죠?”
“닥쳐라! 그리고 들어라! 안나의 앞을 가로막는 자 그것이 설령 신이라도 용서치 않으리!”
이미 불타오를 때로 불타오른 레드안나는 물 위를 달리듯 시아라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시아라는 전혀 동요치 않았다.
“그대의 전술은 서방님과의 대련 때 이미 봤습니다. 별것도 없더군요.”
“닥쳐라!!!”
살기로 가득한 레드안나의 주먹이 시아라의 얼굴을 향해 내리꽂혔다.
하지만 시아라는 몸을 살짝 비트는 것만으로 이를 피해 버렸다. 레드안나는 몸을 비틀어 재차 공격을 날렸지만 이번 역시 시아라는 그녀의 공격을 살짝 흘려 버렸다.
“너무 흥분하시는 것 같군요. 머리 좀 식히시죠?”
시아라는 회피함과 동시에 레드안나의 배에 발경을 구겨 넣었다.
아무리 레드안나라 할지라도 시아라의 발경에 직격당하면 무사할 리 없었다. 하지만 레드안나도 절대 만만치 않았다.
“크킄, 당하는 건 한 번으로 족하다.”
시아라의 발경이 안나의 배에 닿기 직전 안나는 다리를 치켜들어 발경의 기운이 담긴 시아라의 손을 쳐 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시아라를 위에서 아래로 힘껏 내려쳤다.
퍼억-!
풍덩~
안나의 주먹에 맞은 시아라는 물속 깊은 곳까지 처박혔다. 이를 본 마하임은 허겁지겁 둘 사이의 싸움에 끼어들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제삼자는 빠져라! 이건 나의 투쟁이다!”
주먹을 불끈 움켜쥐며 외치는 레드안나.
마하임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냥 데이트 한번 해 보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일이 이렇게나 꼬여 버릴 줄이야.
퍼퍼퍼펑-!
시아라가 물속에 처박혔던 그 장소에서 엄청난 폭음과 함께 시아라가 물 위로 솟구쳤다.
“저도 참을 만큼 참았습니다. 이젠 각오하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물 위로 뛰어오른 시아라는 문자 그대로 물 위를 걸어 레드안나에게로 다가갔다.
그녀의 몸 주변에는 살기가 형상화되어 이글거리는 아지랑이가 사방으로 피어올랐다.
그 엄청난 열량에 그녀의 발이 수면에 닿을 때마다 폭발하듯 물이 증발되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그 기세는 방금 레드안나가 보여 준 박력보다 한참 위였다. 레드안나는 이 기 싸움에 밀리지 않으려고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쳤다.
“그따위 잔재주에 내가 주눅이 들 성싶으냐! 그래 우리 제대로 한번 싸워 보자! 나와라, 야차!”
레드안나의 외침과 함께 그녀의 등 뒤에 거대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안나가 무투회 때 입고 나온 마장기, 야차였다.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가슴과 배 부위의 장갑이 열리면서 새하얀 촉수 같은 것이 꿈틀거리며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레드안나의 몸을 감싸더니 자신의 본체 안으로 끌어들였다.
푸쉬-
고스트 X 시스템 스텐바이.
야차의 메인 컴퓨터가 가동됨을 알리는 메시지가 시아라의 귀에까지 들렸다. 시아라는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아무리 시아라라고 하지만 저 마장기는 조심해야만 했다. 안나가 아닌 레드안나였기에 고스트 X 시스템을 사용할 수는 없겠지만, 그녀가 지금 치켜든 거대한 검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승부다, 시아라!”
“흥 웃기지도 않군요. 그따위 갑옷 없이는 힘을 낼 수 없는 겁니까? 그대에게 무사도라는 것이 존재는 하는지요? 무기도 없는 사람에게 그런 무식한 도를 들이대다니!”
“닥쳐라! 그리고 들어라! 나는 안나를 수호하는 붉은 검이 될지 될지지….”
검을 어깨 위로 치켜든 안나는 시아라를 향해 검을 겨누며 말했다. 터져 나오는 박력, 그리고 그와 함께 주변을 쩌렁쩌렁 울리는 살기.
이미 마하임이 말릴 만한 수준의 전투가 아니었다.
“일기당천(一騎當千)! 나의 검이 베지 못할 것은 없다!”
쏘아진 화살처럼 돌진하는 레드안나. 그러나 시아라 역시 한 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누구 한 명은 죽어 나갈 것이다.
“이익! 윈디를 내버려 두고 이게 무슨 짓이다요! 라이덴!”
콰쾅-!
하늘에서 떨어진 한줄기 섬광. 그것은 낙뢰 그 자체였다. 술에 잔뜩 취한 윈디가 술주정이나 다름없는 낙뢰 마법 ‘라이덴’을 시전한 것이다.
하지만 윈디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이곳이 사방이 물인 노천탕이라는 점이었다.
노천탕에 내리꽂힌 라이덴은 전해질 성분이 풍부한 물을 타고 윈디를 비롯하여 시아라, 안나, 샤오랑, 심지어는 마하임까지 모두의 의식을 단번에 날려 버렸다.
순간 침묵이 찾아온 노천탕. 지금 이곳에서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하늘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는 눈과 경악한 얼굴로 익사 직전의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엘케인뿐이었다.
그렇게 엉망진창 마하임의 첫 데이트는 끝나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