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어서 온다요. 왜 이렇게 늦었다요?”
“…….”
“…….”
윈디를 본 마하임과 시아라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시아라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말했다.
“윈디 님은 참으로 뻔뻔하시군요.”
“응? 이제 알았다요? 내가 괜히 5백년 이상 산 게 아니다요.”
너무나 당당하게 말하는 윈디의 말에 시아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닫았다.
“이곳은 웬일입니까?”
마하임이 차갑게 윈디에게 물었다. 지난밤도 그렇고 그녀의 행색이 마치 자신을 스토킹하는 것 같아 무척이나 기분이 나빴지만 대놓고 따질 수 없었던 것이다.
“친구 집에 놀러 왔다요. 뭐가 잘못됐냐요?”
“놀러 좋아하네. 또 카레나 얻어먹으러 온 거겠지.”
테레사는 팔짱을 끼고 불쾌한 듯 말했다. 테레사와 윈디의 질긴 인연은 언제부터인가 윈디가 이 집 카레가 맛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테레사의 가게를 제 집 드나들 듯이 찾아온 게 시작이었다.
“정답이다요. 왜 카레 아직 안 온다요? 테레사가 만든 카레가 제일 맛있다요. 엘케인이 만든 카레는 이제 질린다요.”
“대충 좀 먹지? 이 날벌레 씨. 세상에 술 파는 주점에서 카레 내놓으라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야.”
“칵! 죽는다요. 감히 이 위대하신 님프, 윈디 님을 모욕했다요! 용서 못 한다요!”
윈디는 정말 화가 나기라도 한 듯, 몸 주위에 검푸른 기운을 마구 뿌려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테레사는 기도 안 찬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어디 해 보시지? 그럼 카레는 없어. 두 번 다시 여기 못 오게 만들어 주지.”
“…….”
그 말을 들은 윈디는 언제 그랬냐는 듯 검푸른 기운을 순식간에 지워 버린다. 그리고 두 눈을 반짝거리며 테레사에게 말했다.
“내가 잘못했다요. 그냥 카레만 있으면 윈디는 행복하다요. 카레 빨리 달라요.”
윈디는 쪼르르 날아와 테레사의 얼굴에 자신의 뺨을 부비며 말했다.
“알았으니까 오버 좀 하지 말고 얌전히 기다리셔! 하여튼 넌 변태가 틀림없어. 아우 닭살 돋아.”
이렇게 말하곤 테레사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방. 시아라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미래에서 테레사의 관계는 어떻게 되죠? 혹시 후궁이나 첩? 뭐 그런 건가요?”
시아라도 일단은 여자였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여자와 얽히는 것이 달가울 수 없었다.
이 말을 들은 마하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절대 그런 건 아닙니다. 그녀는 그 미래에서 저와 등을 맞대고 싸워 준 전우일 뿐입니다. 제 유일한 사랑은 그 미래에서나 지금이나 시아라 당신뿐이죠.”
“…….”
이 말을 들은 시아라는 다시 한번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를 본 윈디는 배를 잡고 웃으며 말한다.
“저런 낯간지러운 대사를 표정 하나 안 바꾸고 잘도 한다요. 마하임 넌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다요. 하하하!”
“시끄럽습니다. 윈디 님! 당신은 스토커인가요? 왜 제가 가는 곳마다 졸졸 따라다니며 훼방을 놓습니까?”
“그건 비밀이다요. 왜냐고 묻는다면 웃을 뿐이다요. 하하하하!”
그리고 하늘 위로 날아오른 윈디는 쾌활하게 웃으며 허공을 마음껏 날아다녔다.
마하임은 다시금 뒷골을 부여잡고, 시아라는 긴 한숨을 푹 내쉴 뿐이었다.
“자, 고대하던 카레 왔…!”
“어, 꺄아악!”
퍼억-!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온 테레사와 기세 좋게 하늘을 날던 윈디는 그대로 정면으로 충돌하고 말았다.
테레사는 얼굴을 부여잡고 뒤로 넘어졌고 윈디는 그 충격에 테레사가 가져온 뜨거운 카레 그릇 안으로 그대로 추락해 버렸다.
“우왁 뜨거, 앗 뜨거! 윈디 살려! 앗뜨…. 근데 맛있다요….”
카레의 열기에 순식간에 적응한 윈디는 게걸스럽게 카레를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이를 본 마하임과 시아라는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야야, 아무리 카레가 좋다고 하지만, 카레 그릇에 들어가 먹는 건 좀 아니다.”
“신경 끈다요.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고 했다요.”
“하아, 개가 아니니 문제지! 그래 내가 졌다. 졌어. 네 마음대로 하렴. 카레 그릇에서 수영을 하든, 마사지를 하든 멋대로 하셔.”
“하하하. 그럼 그렇지, 어디서 이 윈디 님을 이기려고 한다요? 음냐, 근데 카레 정말 죽인다요. 대륙 최고의 카레다요.”
그렇게 말하면서 윈디는 빠르게 카레를 줄여 갔다. 저 조그마한 몸집에 어떻게 저리 많은 카레가 들어가는지 그야말로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었다.
“너희들도 좀 먹는다요. 카레는 많다요.”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이제 카레를 보기만 해도 토가 나올 것 같군요.”
윈디가 극찬할 정도로 확실히 카레는 맛있어 보였지만 그녀가 목욕한 카레를 먹고 싶어 할 만큼 배가 고프진 않았다.
그런 둘에게 테레사는 화이트 와인이 찰랑이는 두 개의 잔을 건넸다.
“저 카레 귀신은 내버려 두고 한잔하죠. 윈디랑 얽힌 거 보니 그대들도 고생길이 훤해 보이는군요.”
“안타깝지만 이미 충분히 고생 중입니다.”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술잔을 받아 든 마하임과 시아라는 윈디를 노려보았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테레사는 마하임을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참, 시아라랑은 어디까지 갔어요? 요고, 요고도 했어요?”
손가락으로 피스톤 운동을 하는 남녀를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테레사. 이 말을 들은 시아라는 발끈해서 소릴 질렀다.
“이익! 무슨 헛소리야 테레사! 너 죽어 볼래?”
“오!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간만에 한판 붙어 볼까?”
“와왓, 재밌겠다요. 윈디도 끼워 준다요!”
“꺼져 주세요. 윈디 님.”
“받아라요! 카레 스트라이크!”
자신이 먹던 카레를 염동력으로 띄워 시아라와 세실이 있는 곳으로 집어 던지는 윈디. 갑자기 카레 덩이가 날아오자 둘은 기겁했다.
“무슨 짓인가요. 윈디 님!”
“이 빌어먹을 님프가?!”
윈디의 카레를 뒤집어쓴 테레사가 분노했다. 그리고 테레사는 외쳤다.
“각오해! 윈디, 카레 속에 묻어 버릴 거야! 나와라 스톤!”
그리고 테레사는 자신의 주특기인 땅의 정령을 소환했다. 바야흐로 방 안이 전쟁터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마하임은 눈 깜짝할 사이에 각종 음식물이 날아다니는 우습지도 않는 전장으로 변한 방 안을 보며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그 전쟁은 마하임이라고 내버려 두지 않았다.
“전방 1m 지점, 마하임 발견했다요! 조준~ 파이어다요!”
윈디의 외침과 함께 카레, 과일 안주, 샐러드가 적절히 혼합된 음식물 폭탄이 마하임을 덮쳐 왔다.
“젠장!”
날아오는 음식물 폭탄을 보고선 마하임은 저도 모르게 발경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것은 치명적인 판단 미스였다. 발경을 맞은 음식물 폭탄은 문자 그대로 폭탄이 되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터져 버렸다.
퍼어엉!
“…….”
마하임은 잡다한 음식 쓰레기를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쓰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윈디는 배를 잡고 웃었고, 테레사와, 시아라도 웃음을 참느라 애써 표정 관리하기에 바빴다.
“저도 참을 만큼 참았습니다…. 만능의 마나 그 목적 없는 힘이여!”
“어, 어! 마법은 반칙이다요!”
“서방님 참으세요. 이 좁은 방에서 마법을 쓰면!”
시아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7발의 매직 미사일이 윈디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날 죽이려는 거냐요? 윈디 살려!”
마하임의 시전한 7발의 매직 미사일은 먹이를 노리는 맹금류처럼 윈디를 뒤를 쫓았다.
목숨을 건 추격전까지는 안 되었지만, 충분히 비장미 넘치는 명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하아…. 정말 할 말이 없군요.”
이 난장판을 바라보던 시아라는 땅이 꺼져라 한 숨을 내 쉬었다. 드렁큰 타이거는 그렇게 오늘도 평화로웠다.
* * *
오늘도 태양은 뜨지 않았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
방학이 시작되고 마하임은 간만에 윈디의 저택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넉 달이라….”
방학은 생각 외로 길었다. 다른 알타베르나의 학생들처럼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도 해 보았지만, 윈디가 혼자 있다면 심심하다는 이유로 결사반대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금의 상황에 이른 것이다.
게다가 지금 마하임은 사실상 시오니아 제국에 사로잡혀 유폐된 신세나 마찬가지였기에 마음대로 윈드시크릿으로 떠날 수도 없었다.
“연락이 늦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자신의 방에 난 창으로 비 내리는 밖을 바라보던 마하임은 지난번 받은 윈드시크릿에서의 메시지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사탕무 제배 시작. 특이 사항 발생 시 바로 연락하겠음.’
한 달 전 정기 연락 이후로 윈드시크릿에서 연락이 끊어졌다.
간혹 정기 연락이 늦어진 적도 있긴 했지만, 이번처럼 길어진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연락이 끊긴 시기가 미묘했다.
사탕무는 윈드시크릿의 전략 상품. 이것이 대륙에 유통된다면 반드시 문제가 생길 것이다.
그리고 그 시기와 정기 연락이 끊긴 시기가 거의 일치한 것을 볼 때,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마하임 있다요?”
바로 그때 문밖에서 들려온 목소리. 목소리의 주인공은 말할 것도 없이 윈디였다.
문이 열리자, 윈디가 한눈에 봐도 힘없는 모습으로 마하임에게로 날아왔다.
“무슨 일 있습니까?”
“손님이 온다요.”
“손님?”
“난 못 도와준다요. 때가 좋지 않다요. 마하임 네가 처리해야 한다요.”
윈디는 힘없이 침대에 축 늘어졌다. 당황한 마하임은 윈디를 붙잡았다.
“뜨겁다? 윈디 님 어디 아프신 겁니까?”
“걱정할 것 없다요. 그것보다도….”
콰아아앙!
윈디의 말이 끝나기도 전 폭음이 윈디의 저택을 뒤흔들었다.
“정문이 뚫렸다요. 뒷일은 맡긴다요.”
이 말을 끝으로 윈디는 의식을 잃었다. 당황한 마하임은 윈디를 흔들었지만 그녀는 반응이 없었다. 그리고 뒤이어 느껴진 살기.
“암살자인가?”
그 느낌은 익숙한 것이었다. 마하임은 어려서부터 온갖 암투와 계략이 난무하는 아르케비니아의 왕궁에서 커 왔고, 또한 살아남았다.
말할 것도 없이 암살자에게 목숨을 노려진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마하임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살기를 느끼는 법을 깨달았고 그 때문에 마하임은 정글과 같은 왕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누굴 노리는 걸까?”
갑자기 떠오른 의문. 뭔가 타이밍도 뭔가 이상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직접 물어보면 되겠지.”
어차피 적과의 일전은 피할 수 없었다. 더욱이 자신의 목숨을 빼앗으러 온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은 더욱이 없었다. 마하임은 오페라를 빼 들었다.
[오페라, 초진동 모드 작동, 유지 가능 시간은 3분입니다.]
오페라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마하임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오페라의 초진동 모드는 강철마저 가볍게 절단한다. 비록 집안이라는 좁은 공간에서의 전투였지만, 초진동 모드가 작동하고 있는 이상 두려울 것은 없었다.
‘꽤 실력은 있어 보이는군.’
살기가 느껴지는 1층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마하임. 놈들의 살기는 점점 가까워졌지만,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말인즉 적은 상당한 실력을 가진 암살자라는 것을 뜻했다.
[비인가 생체 반응 급속 접근 중. 거리 10m…. 8m….]
오페라가 마하임의 머릿속에 경고 메시지를 전했다. 적이 다가오는 것은 분명했지만, 모습은 고사하고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