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대군주-85화 (85/194)

85화

“가는 길은 걱정 말라요. 포탈이라도 열어 주고 싶지만 지금 내 몸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하다요.”

윈디의 말에 마하임의 얼굴이 밝아졌다. 어떤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허풍 끼 많은 윈디라 할지라도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믿을 만 했던 것이다.

“안나, 전에 내가 맡긴 거 수리 다 끝났다요?”

“어? 그거 말이죠? 끝나긴 했죠.”

“그걸 타고 마하임과 같이 다녀와라요.”

“네에?!”

화들짝 놀라는 안나. 안나는 난처한 듯 머릴 긁적거리며 윈디에게 말했다.

“저기…. 허락 맡아야 하지 않을까요? 신시아 황제님이 별로 안 좋아할 텐데요.”

“상관없다요. 선물을 줬으니 내 꺼다요. 내 걸 내 마음대로 쓴다는데 뭐가 문제다요.”

윈디는 쪼르르 날아와 안나의 귀에 속삭였다.

“게다가…. 이런 기회가 또 있을 것 같다요? 오가는 길에 단둘만 있을 텐데 뭘 더 망설이냐요?”

“아!!!”

안나는 순간 번개를 맞은 듯한 충격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동안 마하임과의 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해 안나는 많은 시도를 해 보았지만, 시아라에게 일편단심인 마하임 덕분에 기회조차 좀처럼 만들 수 없었다.

하지만 윈디가 말한 대로 한다면 싫든 좋든 둘만의 시간이 생길 것이 분명했다.

이것이 기회가 아니라면 또 뭐겠는가? 윈디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억누르며 외쳤다.

“당장 여기로 가져올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안나는 타고 있는 마장기의 최대 출력으로 순식간에 산 아래로 사라졌다. 이를 바라보던 마하임은 윈디를 수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윈디 님…. 안나 님께 또 이상한 바람을 넣은 건 아니죠?”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한다요. 난 그저 살짝 어드바이스를 한 것뿐이다요.”

시치미를 떼는 윈디. 마하임은 저도 모를 불안감에 순간 몸이 오싹 움츠러들었다.

그렇게 역사의 수레바퀴는 다시 한번 새로운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쏴아아아-!

폭우에 가까운 비가 윈드시크릿을 적시고 있었다.

윈드시크릿의 포위하고 있는 롤카의 2만 명이 넘는 병사들은 이틀째 내리는 이 비를 맞고서도 꼼짝도 하지 않고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 생각보다 많군요.”

하륜은 언제나 그렇듯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멀리 펼쳐진 군세를 바라보았다.

하륜은 윈드시크릿의 성벽 재건이 끝남과 동시에 설탕무에서 설탕을 추출해 암시장 유통을 시작하였다.

기존의 사탕수수에서 추출한 설탕보다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싸게 설탕이 시장에 풀리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롤카였다.

롤카는 설탕 무역을 중계하는 중계상으로서 제국과 함께 설탕으로 막대한 부를 벌어들이는 전형적인 상업 국가였다.

그런데 뜬금없이 윈드시크릿에서 대규모의 설탕이 풀리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롤카는 시오니아 제국의 묵인 하에 일방적인 선전 포고를 한 후 3일 만에 윈드시크릿으로 쳐들어왔다.

침략에 맞서야 할 아르케비니아 왕국도 무슨 뒷거래가 있었는지 롤카의 윈드시크릿 침략을 묵인했다.

국가 대 영지의 불 보듯 뻔한 전쟁이었지만 그런대로 잘 버티고 있었다.

“생각보다 성이 튼튼해서 다행입니다.”

하륜의 곁에 서 있던 마법사 제난은 자신의 지팡이를 의지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제난은 하륜의 설탕 무역을 처음에는 결사반대했다. 롤카, 어쩌면 시오니아 제국의 분노를 살 만한 설탕 제조는 자살 행위로 보였다.

하지만 이 성벽을 보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윈드시크릿을 감싸고 있는 성벽의 높이는 약 12m. 폭은 4m정도. 높다면 높고 낮다면 낮은 성벽이었지만, 롤카의 병사들 중 단 한 명도 이 성벽을 넘은 자는 없었다.

“고대인의 기술을 살짝 참고했을 뿐입니다. 철골 구조에 강화 콘크리트로 만들어졌으니 앞으로 100년은 끄떡없을 겁니다.”

“그건 동의합니다만…. 괜찮은 겁니까? 이대로 무작정 영주님을 기다리기만 하는 게.”

요한은 비에 젖은 은빛 갑옷을 입은 채 하륜을 바라보았다.

“달리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지금쯤이면 눈치를 채셨을 겁니다. 그분이라면 말이죠.”

원래라면 벌써 회신을 전해 왔을 전서구가 아직도 도착하지 못한 것을 볼 때 롤카의 포위망을 전서구조차 뚫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설령 전서구가 제때 도착해 마하임이 윈드시크릿으로 돌아온다고 해도 전세를 역전시킬 만한 뾰족한 방법은 없었다.

윈드시크릿의 전력은 기껏해야 5천 그나마도 훈련을 받은 정규 병사는 3천에 불과했다. 그 나머지는 급하게 징집한 오합지졸들.

만약 이번에 재건한 이 성벽이 없었다면 윈드시크릿은 롤카의 대공세에 단 하루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이놈의 비! 몸에서 버섯이 자랄 것 같아!”

성벽의 외길을 따라 세실이 자신의 부하인 리자드맨 5마리와 함께 하륜의 곁으로 다가왔다.

한 달간의 긴 전쟁에 지친 그녀는 가만히 있어도 짜증이 절로 났다.

“언제까지 여기 처박혀 있을 거야? 별동대라도 만들어서 롤카의 지휘부를 날려 버리자고. 그럼 이딴 전쟁 금방 끝날 텐데.”

세실은 머리카락에서 뚝뚝 털어지는 빗물을 쓸어내며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하륜은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나모네 님.”

하륜은 아무도 없는 성벽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성벽 아래의 그늘진 곳에서 검은색 그림자가 일렁이더니 몸에 착 붙는 검은색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났다.

“정시 정찰 보고. 매복 병력을 확인. 수는 약 2천 명. 선제 기습 공격은 자살 행위로 판단됨.”

“역시 함정입니까? 예상은 했습니다만…. 너무 뻔하군요.”

하륜은 고개를 끄덕였다. 첫 공격이 시작된 지는 한 달 전. 바로 3일 전까지 파상 공세를 펼치다 별안간 공격을 멈춘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뻔한 함정이라서 시시할 정도였다.

“뭐, 좋습니다. 시험해 볼 것도 있고, 적의 기대에 부응해 주도록 할까요?”

하륜은 몸을 돌려 요한과 세실을 향해 말했다.

“요한 님. 정예병들을 모아서 적진 중앙으로 파고드는 척만 해 주시고 도망쳐 주십시오.”

“적이 함정을 파고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요한의 질문에 하륜은 적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날씨는 흐리고 땅은 물러져서 엉망이죠. 병사들이 매복하고 있다지만 수가 너무 많습니다. 말이 2천 명이지 저들이 한 번에 움직이면 아주 재밌는 상황이 벌어질 겁니다.”

“아….”

그제야 요한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실은 주먹을 꽉 움켜쥐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핫 드디어 제대로 싸울 수 있겠네.”

지난 한 달 동안 성안에서 방어전만 펼쳐 왔던 세실인지라 온몸이 근질근질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부하들인 리자드맨들도 마찬가지였다.

“케에에엑! 싸움이다! 케엑!”

“크르르르 세실 두목, 인간 먹는다. 적 먹는다! 허락?!”

“안 돼, 멍청아! 그리고 두목이 아니라 대장이야!”

발끈한 세실은 이렇게 외치며 리자드맨 한 마리의 머리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울상이 된 리자드맨들. 하지만 세실은 본 척도 않고 성벽 아래로 빠르게 내려갔다.

“요한 님.”

세실을 뒤따라 성벽 아래로 향하는 요한을 멈춰 세운 하륜. 요한은 고개를 돌려 하륜을 바라보았다.

“세실 님을 지켜 주십시오. 저래 보여도 엘프랍니다.”

“네. 기사로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말을 남기고 요한 역시 빠르게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 하륜은 묵묵히 이를 바라보다 제난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도 움직이죠. 첫 반격인데 화려하게 시작해 봅시다.”

하륜의 말에 제난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지난 한 달간의 길고 긴 기다림은 끝났다.

미래는 여전히 확실치 않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적어도 롤카 따위에게 질 생각은 없다는 것.

롤카에게조차 이기지 못한다면 시오니아 제국과 싸워 이긴다는 것은 헛소리에 불과했다.

“부디 지켜봐 주시길. 반드시 승리해 보이겠습니다.”

그렇게 각오를 다지는 하륜이었다.

* * *

윈드시크릿과 1km 떨어진 롤카의 진영. 롤카의 본진 수뇌부가 있는 천막 안에서 격론이 오가고 있었다.

“이건 미친 짓이오! 본진을 완전히 노출시켜서 적의 공격을 유도하다니! 이런 전법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소.”

“그럼 다른 방법을 말해 보시오! 적이 저 난공불락의 성안에 있는 한 끌어낼 방법이 없지 않소!”

“그렇다고 수뇌부가 모여 있는 본진을 이렇게 전면으로 노출시키다니, 미치지 않고선….”

“닥치시오!!!”

헥사스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마하임의 암살을 실패하고 언데드 오우거뿐만 아니라 현자의 돌까지 잃은 그는 패닉 직전의 상황이었다.

게다가 3일 전…. 총력 공세를 펼치다 잃은 병사만 해도 4천 명이 넘었다.

이대로라면 윈드시크릿을 점령하기는커녕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철수해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더는 시간을 끌 수 없다는 것들은 귀공도 잘 아실 텐데 이 이상의 의논은 의미가 없소!”

“흥! 그건 헥사스 자네의 계획이 실패했기 때문은 아니고?”

“뭐라?!”

헥사스는 더는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나이 40세. 장래를 촉망받는 네크로맨서일 뿐 아니라 롤카의 국왕 람스 4세의 절대적 신의를 받아 이번 원정군의 총대장이 되었지만, 그 위상은 이미 바닥을 치고 있었다.

“윈드시크릿의 영주를 잡아온다고 호언장담해 놓고선 비밀 병기인 언데드 오우거까지 잃고 무슨 낯짝으로 여기 서 있는지 모르겠군.”

원정대 부사령관 휴스 장군. 그의 눈에 헥사스는 이미 패배한 개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국왕의 명으로 어쩔 수 없이 헥사스를 보좌하고 있지만, 그의 인내심도 한계가 있었다.

“휴스 장군. 애초에 당신이 저 빌어먹을 성을 함락 못 시켜서 일이 모두 꼬여 버린 것 아니오?! 지금 병사들의 사기를 보시오.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지 않소.”

“큭,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이 빌어먹을 네크로맨서가!”

“좋소!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계급장 떼고 한번 붙어 봅시다!”

한순간에 난장판으로 변하는 작전 회의장. 바로 그때 급보가 날아들지 않았다면 둘의 싸움은 피를 보고야 말았을 것이다.

“적의 성에서 움직임이 있습니다. 아마도 병사들을 움직인 것 같습니다.”

병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헥사스는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그렇지. 적도 사람인 이상 이렇게 포위하고 있으면 언젠가는 움직이기 마련이지.”

헥사스는 가장 먼저 천막 밖으로 나왔다. 밖은 여전히 폭우에 가까운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욱하게 피어오른 안개….

바로 한 치 앞도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의 안개가 이 일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헥사스가 밖으로 나오자 병사들 몇이 그의 곁으로 달려왔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적이 오면 언제든 반격 가능합니다.”

병사의 말에 그제야 헥사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롤카의 주력 부대는 건재했지만,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3일이면 끝낼 수 있는 전쟁인 줄 알았지만, 벌써 한 달이 지났다.

몇 번의 대규모 공성전에도 윈드시크릿의 성벽 안으로 단 한 명의 병사도 집어넣을 수 없었다.

격렬한 저항도 저항이었지만, 성벽에 설치되어 있는 알 수 없는 함정 때문에 성벽에 닿기가 무섭게 병사들이 몰살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어디 이뿐인가? 공성 병기조차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집채만 한 바위를 날려도 윈드시크릿의 성벽에는 흠집 하나 만들 수 없었다.

이 전쟁의 활로를 찾기 위해 영주인 마하임을 암살하려던 시도도 실패하고, 더욱이 언데드 오우거까지 잃은 것은 그야말로 뼈아픈 손실이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조급함은 포위당한 채 한 달 이상 공격을 당하고 있는 윈드시크릿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롤카군은 수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윈드시크릿이 단 한 번이라도 실수를 하면 그것으로 이 전쟁은 끝날 터였다.

“그런데 이 안개. 수상하군. 너무 짙어.”

헥사스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불길한 듯 중얼거렸다. 비오는 날 안개는 흔한 일이지만 이 안개는 지나치게 짙었다.

이미 한 달 이상 이곳에 주둔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짙은 안개는 처음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