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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군주-86화 (86/194)

86화

콰아앙-!

바로 그때 지축을 울리는 폭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와 함께 짙은 안개를 해치고 한 무리의 병사들이 나타났다.

“적군이다!!!”

롤카의 병사 중 누군가 소리쳤다. 헥사스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생각보다 적은 훨씬 가까이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 다가왔는데도 눈치를 못 채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적진이 눈앞이다! 단숨에 해치운다!”

최전방에서 기마를 타고 돌진하고 있는 두 명은 다름 아닌 요한과 세실이었다. 둘은 거침없이 돌진하며 닥치는 대로 롤카의 병사를 베었다.

목책과 창병들이 사방으로 둘을 애워 쌌지만 그 무엇도 이들을 막지는 못했다.

“크에엑! 인간 죽인다!”

“크르르릉! 비켜! 방해다! 케에엑.”

그리고 뒤이어 등장한 리자드맨.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닌 수십 마리가 동시에 롤카의 병사들을 학살했다.

윈드시크릿은 해안 인근이었기에 여기에 리자드맨에 나타나도 이상할 것은 없었지만, 인간을 따르는 리자드맨이라니,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뭐, 뭣들 하나! 적을 막아! 이 머저리 놈들!”

지휘부 천막에서 뒤늦게 나온 휴스 부사령관이 검을 뽑고 소리쳤다.

롤카의 병사들은 아직 많았지만, 일점 돌파를 당하는 시점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병사의 벽은 얇았고, 그 얇은 벽을 요한과 세실은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조금만 더!”

적의 본진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을 확인한 세실은 더욱 거칠게 말을 몰았다.

저기 눈앞의 적만 몰아내면 이 기나긴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생각에 세실은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부우웅-!

그녀의 주특기인 정령검은 그야말로 일격필살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세실이 자신의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롤카의 병사들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다.

“세실 님! 너무 깊게 파고들었습니다! 후퇴해야 합니다!”

“뭐?! 여기까지 와서?! 농담하지 마!”

적은 이렇다 할 대응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전진할 수 있다면 전 본진을 단숨에 제압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요한은 퇴각하자고 했으니, 세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함정이 분명합니다. 시간을 끌면 적의 계략에 넘어가는 겁니다!”

“으으으….”

세실은 뭐라 항변하려 했지만, 이내 입을 닫았다. 아무리 허를 찔렀다 하더라도 롤카군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리고 세실 역시 뭔가 이상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던 터였다.

“하아, 명령은 명령이니까.”

세실은 미련 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하륜이 밉상이긴 했지만, 그의 말을 들어서 나빴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늦었다! 윈드시크릿의 잔챙이들아!”

헥사스의 외침과 함께 요한과 세실의 앞에 갑자기 3m에 다다르는 목책이 바닥에서 솟아올랐다.

나무로 대충 만들어진 목책이었지만, 날카롭게 다듬어진 나무가 못처럼 사방에 박혀 있어 함부로 돌진한다면 말과 함께 꼬챙이에 낀 것처럼 죽게 될 것이다.

“어느 사이에 저런 걸….”

요한은 차가운 눈동자로 목책을 바라보았다. 그의 특기인 오러로 뚫을 수도 있겠지만, 분명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동안 적의 포위망이 완성되면, 도망친다는 것은 불가능해질 터.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요한.”

세실은 겁먹은 말을 애써 진정시키며 말했다. 세실의 뒤로 리자드맨과 정예로 뽑혀 온 윈드시크릿의 병사들이 불안한 눈으로 요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도 롤카군의 포위는 좁혀 들어오고 있었다. 요한은 결단을 내렸다.

“적의 본진을 치죠.”

“정말?!”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대로라면 포위되어서 전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아무리 요한과 세실이 일기당천의 무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적의 병력은 아군을 압도하고 있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빠른 결단, 그리고 이를 실행하는 행동력뿐.

“제가 앞장섭니다!”

요한은 말 허리를 박찼다. 그리고 롤카의 병사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든 적의 본진으로 돌격했다.

“칫, 어쩔 수 없나!”

입술을 깨무는 세실. 적의 움직임은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이미 퇴로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사방에 롤카의 병사들이 넘쳐났고, 윈드시크릿의 병사들은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모두 요한 대장을 뒤를 따른다! 뒤처지면 죽는다!”

세실은 검과 마창을 동시에 뽑아 들었다. 그리고 각각의 무기에 정령을 빙의시켰다. 여기서 밀리면 그것이 곧 끝이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세실이 잘 알고 있었다.

부우웅-!

세실의 검이 울었다. 그녀의 검과 창이 번뜩일 때마다 롤카의 병사들은 뼈와 살이 분리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앞장선 요한, 그 역시 무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요한의 특기인 오러소드는 롤카군의 방패와 갑옷을 무시하고 단번에 압살했다.

제2격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문자 그대로의 일격필살. 요한의 오러소드가 지나간 곳에는 죽음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익! 물러서지 마라! 적은 소수다! 단숨에 밀어붙인다!”

적의 강함은 헥사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무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강한 적이라도 숫자 앞에서는 장사가 없다는 것은 모든 전쟁사에서 통용되는 법칙이었다.

슉 슈슈슉-!

롤카의 병사들이 밀린다 싶으면 어김없이 화살이 비처럼 요한과 세실을 향해 쏟아졌다.

피할 곳이라고는 없었다. 윈드시크릿군은 필사적으로 화살을 쳐 내고 방패로 막았지만, 피해는 순식간에 불어났다.

요한과 세실이 타고 있던 말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적의 본진까지의 거리는 50m도 안 남았지만, 더는 전진할 수 없었다. 요한의 오러소드도, 세실의 정령술도 한계는 분명 있었다.

“흐흐흐, 항복해라.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 주마.”

헥사스는 요한과 세실이 이끄는 윈드시크릿군을 향해 말했다.

이것으로 윈드시크릿을 점령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소수 정예인 윈드시크릿군의 사기를 떨어지게 만들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항복할 것 같습니까?”

피 묻은 검을 고쳐 잡고 몸을 일으키는 요한. 세실 역시 질 수 없다는 듯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네가 롤카의 총대장이냐! 네놈의 목만 따면 되는데 왜 항복을 해야 하지?”

세실의 말을 들은 헥사스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하하하! 고작 500도 안 돼는 병사들로? 소설을 너무 많이 봤구나. 소원이라면 죽여 주지! 네놈들의 머리로 윈드시크릿을 장식해 주마!”

헥사스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롤카의 병사들은 꾸역꾸역 요한과 세실에게로 몰려들었다.

요한과 세실은 남은 힘을 모조리 끌어내 달려드는 롤카의 병사들을 학살했다.

보통 이쯤 되면 겁을 먹기 마련인데 롤카의 병사들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끊임없이 윈드시크릿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젠장, 저 병사들 정상이 아닙니다.”

“알아! 나도. 큭!”

적은 절대 정상이 아니었다. 롤카군의 눈은 이미 죽어 있었다. 놈들은 죽어 가면서도 신음 하나 내지 않고 살아 있는 한 끝까지 윈드시크릿군을 노렸다.

두려움이 없는 병사. 그것은 공포 그 자체였다.

“크하하하! 네놈들의 강함은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직접 조제한 좀비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 내가 만든 좀비들에게는 두려움이란 없다!”

헥사스는 유쾌하게 웃었다. 이 한 수를 위해 얼마나 고심했던가?

언데드 오우거도, 현자의 돌도 잃은 헥사스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제 전공을 세우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를 위해서라면 영혼이라도 팔 각오가 되어 있는 헥사스였다.

“하아, 하아.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만 더 빨리 눈치챘더라면….”

요한은 온몸이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채로 말했다. 상황은 불리하다 못해 처절했다.

세실 역시 정령력을 완전히 소모하여 정령검조차 풀려 버린 상태였다. 그녀의 부하인 리자드맨도 대부분 상처를 입어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뭐, 각오는 하고 있었는데…. 하! 막상 죽는다고 생각하니 좀 아쉽네.”

이제 시작인데. 조금만 더 힘을 모은다면 시오니아 제국에 복수할 수도 있었는데. 그리고 동생을, 하나뿐인 여동생을 구할 수도 있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내야 한다니, 세실은 지금의 상황이 마치 지독한 악몽처럼 느껴졌다.

슈욱-

퍼어엉!

그때 들려온 폭음에 세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새하얀 섬광이 하늘에서 연이어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지이이잉! 슈우욱!

쾅, 콰콰쾅-!

연기와 폭음. 그리고 강렬한 열기가 주변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그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내리는 비까지 증발하는 듯했다. 그리고 잠시 후 폭음은 멈췄다.

“서, 설마 저건!?”

그것을 가장 먼저 본 것은 헥사스였다. 구름 속 하늘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시오니아 제국에서만 운용하는 비공정이었다.

“어째서 제국의 비공정이 여기에 있는 거지?”

시오니아 제국과 롤카 왕국은 동맹 관계였다. 그래서 이번 침공도 모른 척하고 넘어가기로 이미 약속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제국의 비공정이 나타나다니…. 아니 백번 양보해서 나타날 수 있다 치더라도, 방금의 그 공격은 롤카 왕국군을 향한 공격이었다.

우웅 우웅-

비공정에서 다시 한번 기묘한 울림이 들려왔다. 그리고 다시 한번 쏟아진 눈부신 빛의 기둥. 그 강렬한 빛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롤카 왕국군을 휩쓸었다.

파파팟. 슈웅!

콰콰쾅-!

연이은 폭음과 검은 연기. 롤카군은 우왕좌왕하며 도망쳤지만, 하늘에서 쏟아지는 빛을 피할 길은 없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비공정에서 쏟아지던 빛은 사라졌다.

“나…. 아직 살아 있는 거야?”

매캐한 연기 속에서 당황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세실. 주변은 아직도 불바다였다. 시체가 타면서 나는 매캐한 냄새가 그녀의 코를 자극했다.

아직 롤카의 병사들은 사방에 널려 있었지만, 이 불바다 속으로 들어오지는 못했다.

“불이 약점인가 보군요.”

요한은 그제야 숨을 길게 몰아쉬며 자신의 검을 고쳐 쥐었다. 예상치 못한 도움에 목숨은 건졌지만, 그렇다고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롤카의 병사들에게 포위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익! 겁먹지 마라! 돌격, 돌격하라!”

화가 난 헥사스는 목청껏 소리쳤다. 그러자 머뭇거리던 헥사스의 좀비들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불을 싫어하는 좀비들이었지만, 헥사스가 직접 명령을 내리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사광’으로는 이 정도가 한계인가?”

바로 그때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들려온 목소리. 요한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설마, 영주야?”

세실 역시 바로 그 목소리를 알아챘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마하임이었다.

“미안. 좀 늦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마하임. 그는 안나의 새까만 마장기를 입고 있었다.

세실은 반가운 나머지 마하임에게 달려가 그를 껴안았다.

“왜 이리 늦은 거야!”

온몸에 피와 진흙으로 엉망이 된 세실을 본 마하임은 차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요한, 병사들을 재정비해라. 뒤는 내가 맡겠다. 적진을 돌파해 퇴각한다.”

“네! 영주님!”

자포자기했던 요한은 다시금 힘이 솟는 것을 느꼈다. 마하임과 함께라면 뭐든 가능할 것만 같았다.

요한은 다시금 오러를 일으켜 검으로 주위를 밝혔다.

“네, 네놈!”

마하임을 보고 놀란 사람은 또 한 명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헥사스였다.

마하임은 헥사스의 얼굴을 몰랐지만, 헥사스는 언데드 오우거의 눈을 통해 그의 얼굴을 익히 알고 있었다.

“어째서 마하임 네놈이 여기에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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