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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군주-87화 (87/194)

87화

헥사스의 외침이 마하임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마하임은 헥사스를 힐끔 쳐다보더니 차갑게 웃었다.

“네가 헥사스냐? 생각보단 젊군.”

“그 마장기, 그리고 저 비공정, 어디서 손에 넣은 거지? 저건 분명 시오니아 제국의 병기일 텐데!”

“그런 건 네가 알 필요 없을 텐데? 한 가지 제안을 하지. 우리 군을 이대로 보내 줘라. 그럼 나도 조용히 돌아가겠다.”

“닥쳐라! 대 롤카국의 총사령관인 나를 능멸하려는 것이냐?! 저놈을 붙잡아라! 죽여도 좋다! 바로 저놈이 윈드시크릿의 영주다!”

헥사스의 외침에 롤카의 병사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하임은 기다렸다는 검을 치켜들며 말했다.

“역시 말로는 안 되는군. 안나 님, 부탁합니다.”

[네. 마하임 님. 연막탄 지금 갑니다~]

무전으로 마하임의 말을 들은 안나는 씽긋 웃으며 말했다.

윈디의 부탁 겸 명령을 받은 안나는 윈디가 시오니아 황제로부터 선물받은 비공정에 마하임을 태워 3일 만에 윈드시크릿에 도착한 것이다.

그리고 본 것은 위기에 빠진 요한과 세실이 이끄는 윈드시크릿군이었다.

파파팟 슈우욱.

비공정에서 발사된 새하얀 빛의 덩어리. 그것은 회색 연기를 내뿜으며 전장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그리고 마하임은 연막탄의 시뿌연 연기 속에 녹아들 듯 사라졌다.

“사라졌다?!”

눈을 부릅뜨고 마하임의 위치를 살피는 헥사스. 그러나 마하임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헥사스는 예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 시오니아 제국의 비밀 병기 중 자신의 몸을 투명화시키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이것 말고는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모두 눈을 부릅뜨고 살펴라! 적은 몸을 투명화시킬 수 있다!”

롤카의 병사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푸하학!

피 보라와 함께 두 명의 병사들의 허리가 두 동강 나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롤카의 병사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필사적으로 적을 찾았지만 보이는 것은 연막탄의 새하얀 연기뿐이었다.

“자, 숨바꼭질을 시작하지. 어디 한번 도망쳐 봐라. 내 영지를 노린 대가를 치르게 해 주마.”

퍼퍼퍽-!

크악!

마하임의 목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목이 날아가 버린 세 명의 병사들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런데도 마하임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젠장! 활을 쏴라! 놈이 있을 법한 곳이라면 어디라도 좋다!”

헥사스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방금 죽은 병사들 위로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그러나 그러한 공격으로는 마하임에게 전혀 타격을 입힐 수 없었다.

안나가 빌려 준 마장기는 총탄은 물론하며 방검, 방화까지 완벽하게 소화해 내는 전천후 슈트였다.

거기다 광학미체를 이용한 은폐까지 가능하게 개조된 이 마장기는 이런 전장에 사용하기에는 완전히 오버 스펙이었다.

퍽 푸하학!

으아악!

커억! 살려 줘!

병사들의 비명 소리가 주위를 메아리쳤다. 헥사스가 만든 좀비는 비공정에 장착되어 있는 ‘사광’ 즉 광학 병기에 대부분 불타 버리고, 남아 있는 병력은 대다수가 일반 병사들이었다.

아직 남아 있는 병사의 수는 많았지만, 전쟁은 수로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적에 의해 순간순간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 가는 아군을 바라보는 롤카군의 사기는 급격하게 떨어졌다.

“이게 어찌된 일이오! 호언장담을 하고선! 어떻게든 해보란 말이오.”

보이지도 않는 적에게 병사들이 연이어 죽어 나가자 휴스 부사령관은 당황해 외쳤다. 하지만 헥사스라고 해서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큭, 군을…. 뒤로 물린다. 적은 소수. 아니 한 명뿐이다! 겁먹지 마라! 우리 군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헥사스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하지만 바로 눈앞에서 보이지도 않는 적에게 잔혹하게 살해되는 전우를 보고 있는 롤카의 병사들 입장에서는 그의 말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큭, 으아악! 사, 살려 줘!”

“유령이다! 저건 괴물이라고!”

보이지 않는 무언가의 공격에 영문도 모른 채 롤카의 병사들은 연이어 죽어 나갔다.

병사들의 사기는 급격하게 떨어졌고 헥사스의 명령도 듣지 않을 정도로 상황은 나빠졌다.

‘젠장, 언데드 오우거만 있었더라도!’

헥사스는 안타까운 듯 주먹을 움켜쥐어 봤지만, 현실적으로 보이지 않는 적을 처치할 방법이 없었다.

[마하임 님. 슬슬 철수하셔야 할 것 같아요. 배터리도 얼마 남지 않았고요.]

닥치는 대로 롤카의 병사들을 베고 있는 마하임의 귀에 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마하임이 타고 있는 마장기는 성능은 뛰어났지만, 불안정한 배터리로 운용되고 있었기에 30분 이상 연속으로 움직일 수 없었다.

“윈드시크릿군의 철수는 끝났습니까?”

[네. 방금 윈드시크릿 성문 안으로 모두 퇴각했어요. 롤카군도 군을 물리고 있으니 슬슬 저희도 움직이죠.]

윈드시크릿군을 구한다는 목표는 이미 달성되었다. 조금 더 무리해서 지휘부를 몰살시켜 버린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큰 의미가 없었기에 마하임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위이잉-!

귀에 거슬리는 기계음과 함께 마장기의 광학미체 기능이 작동을 멈추었다.

그러자 방금 전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던 허공에 마하임의 모습이 드러났다.

“큭! 저놈이다! 저놈이 윈드시크릿의 영주다! 잡아라! 잡아!”

마하임의 모습이 드러나자 헥사스는 미친 듯 외쳤다. 헥사스의 말에 반사적으로 움직이는 병사들. 그러나 그들은 손끝 하나 마하임의 몸에 댈 수 없었다.

부우웅-!

컥 으아악-!

퍽-!

광학미체의 투명화가 풀렸다고 마하임이 약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마하임은 자신에게 달려든 5명의 병사를 들고 있던 장검으로 일격에 날려 버렸다.

피떡이 되어 바닥에 널브러지는 롤카의 병사들. 마하임은 죽은 병사들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죽고 싶다면 덤벼라. 얼마든지 상대해 주마.”

전장에 순간 침묵이 흘렀다. 헥사스는 여전히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마하임의 압도적인 위압감에 그 어떤 롤카의 병사들도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하임은 그런 롤카군의 병사들을 가로질러 유유히 윈드시크릿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점점 롤카군의 진영에서 멀어지는 마하임. 그를 바라보며 헥사스는 이를 악물고 외쳤다.

“두, 두고 보자. 네놈…. 반드시 죽인다. 죽이고 말 테다!”

* * *

와아아아-!

마하임이 윈드시크릿 안으로 들어오자 함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전혀 예상치 못한 영주의 귀환. 그것도 윈드시크릿군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빠져 있는 순간에 나타난 마하임의 존재감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돌아오셨군요.”

하륜은 마하임에게로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마하임은 하륜의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방금 작전은 무모했다.”

“저도 롤카가 그런 함정을 팔 줄은 몰랐습니다.”

“궁색한 변명이군.”

“하하, 저라고 전지전능할 수는 없으니까요.”

“보고는 나중에 듣겠다.”

“네, 네-”

하륜은 언제나처럼 여유롭게 말했다. 마하임은 그런 하륜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저만한 인재를 구하는 것 역시 사실상 불가능했기에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영주님!”

허겁지겁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요한과 세실. 둘은 마하임 앞에 무릎을 굽히며 말했다.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어서 와. 아까는 정말 멋진 타이밍이었어!”

세실은 다짜고짜 마하임을 껴안으며 기뻐했다. 마하임은 그런 세실의 머리를 한 번 스윽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고생 많았다.”

“오오, 몇 달 못 본 사이에 키도 좀 큰 것 같고. 이제야 좀 남자다워졌네!”

세실은 마하임을 위아래로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그녀는 마하임이 떠나기 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단지 달라진 게 있었다면 피로 얼룩진 가죽 갑옷을 입고 있다는 점 정도가 전부였다.

마하임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요한을 일으켜 세워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잘해 주었다. 요한.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무, 물론입니다. 영주님. 목숨을 다해 영주님을 섬기겠습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요한은 듬직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전쟁 때문에 약간 말라 보였지만, 전장에서 본 요한의 실력은 전보다 강했으면 강했지, 약해 보이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제페쉬 인사드립니다.”

“환영합니다. 영주님. 제난 인사드립니다.”

공손히 허리를 숙이는 제페쉬와 제난. 사실상 윈드시크릿의 내정을 담당하는 사람이 바로 저들이었다. 마하임은 둘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모두 수고했다. 포상이라도 내려 주고 싶지만, 아직 상황이 좋지 못하군.”

“당치도 않습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

“들어가시죠. 연회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둘의 환대에 마하임은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윈드시크릿은 마하임이 몇 달 보지 못한 사이에 전혀 다른 곳이 되어 있었다.

다 무너져 가던 성벽은 완전히 재건되어 대륙 그 어떤 성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았다.

거리도 완전 재정비되어 있어 윈드시크릿이 아닌 다른 곳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짧은 시간에 대단하군. 무슨 마법을 부린 거지?”

말없이 자신의 곁을 걷고 있는 하륜을 향해 말했다. 하륜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마하임의 말에 답했다.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시오니아 제국과 싸워 이기게 해 드리겠다고. 이 정도 능력은 돼야 제국과 비벼 볼 만하지 않을까요?”

하륜의 말에 마하임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하륜이 이런 녀석이라는 것을 그 역시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입니다. 싫다면 시작도 안 했겠죠. 자, 어서 가시죠. 아나모네 님이 영주님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하륜은 이렇게 말하며 마하임을 새로 만들어진 영주관으로 안내했다.

영주관은 3층 규모로 윈드시크릿 정중앙에 만들어져 있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앞으로의 전쟁을 감안해서인지 한눈에 봐도 요새처럼 튼튼해 보였다.

하지만 내부로 들어가자 제법 깔끔하게 마감이 되어 여느 귀족의 저택과 비교해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영주관의 중앙 복도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연회장으로 보이는 넓은 곳이 나타났다.

“어서 오십시오 영주님.”

“식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시종 여러 명이 마하임에게 다가와 말했다. 하지만 긴장감이 일순간 풀린 마하임은 식욕보다 몸을 씻고 싶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식사는 나중에. 먼저 목욕부터 하고 싶군. 어디서 씻으면 되지?”

마하임이 말에 시종들은 자리를 물러났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사람,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아나모네였다.

“루!”

달려온 아나모네는 마하임의 품에 안겼다. 아나모네는 마하임의 품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기다렸다. 루! 왜 이리 늦었나?”

“미안,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난 루가 날 버린 줄 알았다. 그래서, 그래서….”

“그럴 리 없다는 거 알고 있잖아?”

마하임의 말에 아나모네가 그의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자신의 감정을 거의 안 드러내던 아나모네였지만 몇 달 만에 만난 마하임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아나모네는 마하이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루, 같이 목욕…하면 안 될까?”

“그건 좀 곤란한데….”

말없이 둘의 재회를 보고 있던 하륜은 희미하게 미소 짓고선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마하임은 새로운 미래에 첫 발자국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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